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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Nov 28. 2020

사심으로 기획한 것들이 일으킨 마법

사심은 힘이 세다, 반면 공심은 힘이 없고


모든 출발은 ‘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생 중간 정산’을 위해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쉽게 결론이 나왔다. 여행이었다. 여행을 할 때 행복했고 더 멀리, 더 오래,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경제적 체력적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사심을 ‘공심’으로 포장했다. 회사에 독자와 함께 하는 여행을 제안했다. 회사도 흔쾌히 동의했다. 회사 밖에서 ‘재열투어’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여행에 대한 평판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코카서스와 아프리카와 야쿠시마와 캄차카 여행을 기획했고, 모두 매진되었고,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요즘은 아예 ‘여행감독’을 자처하고 다닌다. 여행의 영역에서도 연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도 여행 기획을 많이 했지만 감독을 자처하니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당신의 여행으로 나를 만족시켜보라’는 태도였다면 지금은 ‘당신이 연출한 여행이 궁금해서 따라가 보고 싶다’는 태도로 바뀌었다.     


사심은 힘이 셌다. 이제 애써 공심으로 포장하지 않아도 의도가 관철되었다. 회사에서는 계속 여행을 기획하라고 하고 이제는 외부에서 여행 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이제 사람들에게 여행의 로망을 심어주기 위해 힘겹게 설명하지 않아도 여행을 함께 갔던 분들이 다음 여행지 일정을 기다려 준다.     


그래서 생각했다. 좋은 기획은 사심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힘이 있다고. 뮤지컬 시장이 그렇다. 공연 시장 중 최근 10년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한 뮤지컬 시장을 키운 힘은 ‘표 잘 사 주는 예쁜 누나(드라마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의 패러디)’들의 사심이었다. 이들의 팬심과 그들의 사심을 적절히 활용한 기획력이 고품격 뮤지컬 시장을 구축하게 만들었다.     



사심(私心)의 사전적 의미는 ‘제 욕심을 채우려는 사사로운 마음’이다. 그런데 사심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남에게 자기의 마음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있다. 여기에 힌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기획이란 사심을 공심으로 변환하는 것인데, 이를 바꿔 말하면 자신의 의도를 공적 틀에 맞게 승화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공심(公心)을 들여다보자. 공심의 의미는 ‘공평한 마음’이다. 문화예술의 영역에 공심이라는 것은 ‘활성화’라는 말로 치환된다. 하지만 활성화, 이것은 ‘가능한,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활성화 금지법’을 막는다면, 말 그대로 정부가 어떤 활성화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정부가 어떤 활성화 정책도 수립할 수 없고 활성화 사업에 예산을 절대 쓰면 안 된다고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활성화’를 가장 못할 집단을 한 번 꼽아보자. 누구일까. 공무원이다. 생각해보라. 다른 집단과 달리 수단과 방법을 가려야 한다. 성과를 내는 것보다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가장 창의적이지 못한 집단이 가장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을 주도하고 있다. 가장 부가가치와 거리가 먼 집단이 부가가치를 만들겠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공무원이 주동하는 활성화는 ‘가능한 불가능’이다.     


그렇다면 활성화 사업을 없애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엄청난 예산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부작용 없이 예산을 줄여서 다른 긴요한 곳에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정부의 활성화 사업을 없애는 것이다. ‘진흥’이라는 이름이 붙는 재단과 위원회의 사업도 마찬가지다. 바꿔 말하면 공심은 힘이 없다.     


힘없는 공심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방자치단체가 남발하는 축제다. 예전에 한 서울시 간부가 지자체들의 축제가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를 꼽았는데 설득력이 있어서 메모해 두었다. 세 가지다. ‘기원하는 바가 없다. 즐거움이 없다. 일탈이 없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는 이 세 가지는 예전 우리의 축제가 성공했던 이유다. 이런 집단적인 사심이 없어지고 그 자리를 단체장의 사심이 채우면서 우리의 축제는 힘을 잃었다.     


사심은 예술성과도 직결된다. 예전에 ‘예술가들아 박원순 시장의 멱살을 잡아라’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다. 예술성과 공공성에 대한 글이었다. 공공 예술기관은 예술성과 공공성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데 서울시의 예술 행정은 다분히 공공성에 치우쳐 있었다. ‘기승전-시민과 함께’로 끝나곤 했던 서울시의 문화예술 행사는 공공성을 최우선에 두었다. 이를 지적하고 예술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동안 서울시의 예술 행정은 시민의 예술 향유에 방점을 찍었는데, 그러는 사이 현장에선 예술성이 간과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승전-시민과 함께’로 끝나는 기획은 대개가 ‘그럴듯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기획인 경우가 많다. 박원순 시장의 공심이 예술가들 그리고 문화기획자들의 사심을 압도하면서 싱거운 감동이 반복되었다. 비슷한 상황이 전국의 지자체에서 벌어지고 있다.     



예술성과 공공성은 상호 대립적으로 각축하는 듯 보이지만 의외로 간단한 함수다. 지극한 예술성은 공공성이 될 수 있어도 지극한 공공성은 예술성이 될 수 없다. 공공성은 예술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예술 회피이거나 혹은 예술 파괴일 수 있다. ‘시민과 함께’라는 멋진 구호 아래 예술적 태만이 숨어 들어갈 여지가 많다. 공공성은 어설픈 얼버무림일 수 있다.     


예술성은 세대를 두루 망라할 수 있다. 예술성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다. 그래서 공공적이다. 민간이 못하는 것을 공공이 해내라고 공공 예술단체를 두는 것이다. 이런 공공 예술단체의 최우선 의무는 바로 예술적 성취다. 예술성이 예술단체가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성취라면 공공성 혹은 대중성은 가장 낮은 단계의 성취다. 공공 예술기관은 예술의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 시민에게 새로운 미적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최고의 의무다.  

   

반복하면 사심은 힘이 세고 공심은 힘이 없다. 사심은 예술성을 성취하려 하지만 공심은 공공성에 기대어 숨는다. 문화를 풍성하게 하려면 사심 가득한 기획이 필요하다. 사심을 공심으로 포장하는 과정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있으면 족하다. 기획자들이 마음껏 ‘사심이 넘치는 나라’를 만드는 세상을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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