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에 환희가 있다면 패배에는 그것을 뺀 모든 것이 있다
왕가위 영화 중 <일대종사>를 가장 좋아한다. 장예모가 대놓고 마초라면 왕가위는 세련된 마초다. 대부분의 남자는 이 둘 중 하나다. 이제는 관변 예술가가 된 장예모가 군주의 자기 변명을 포장하는 동안 왕가위는 ‘농담같은 속담’을 끌고 와서 사람들을 끄덕이게 만든다. <일대종사>가 특히 그렇다.
<일대종사>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지면 수평으로 눕고, 이기면 수직으로 선다. 수평과 수직의 단순질박한 서사 속에 온갖 느와르를 야바위처럼 녹여낸다. 화려함 속에 깃든 지루함을 포착하고 단순함이 빚어내는 오묘한 변화를 풀어낸다. 어쨌든 광야와도 같고 사막과도 같고 시베리아 벌판과도 같은 강호에서 주인공은 살아남고 수직으로 선다.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스스로 ‘몸값’을 계산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주겠다는 금액의 배를 요구했고 딜은 틀어졌다. 이 셈이 맞는지 틀린지를 증명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다. 지금까지 실험했고 이제부터는 실전인데, 내년엔 수평으로 눕게 될까, 수직으로 서게 될까? 시사IN을 퇴사한 지금 처음 시사IN을 설립할 때가 생각난다. 그때도 실패를 각오하고 ‘의미 있는 도전’이라는 명분으로 시작했었다.
살다보면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2006년 여름부터 2007년 여름까지 시사저널에서 삼성 기사 삭제 사건에 항의하고, 징계 당하고, 파업하고, 결국 결별했던 우리가 그랬다. 그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 고난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 터널의 초입인지 중간인지 끝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 몰라 힘들었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줄어들었고 이에 비례해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는 명분도 사라졌다. 처음에는 우리의 싸움을 외면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우리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결국 우리를 죽게 한다는 것을. 그 목소리에 취해서 혹은 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파업의 터널에서 도망가지 못했고 결별을 선택해야 했다.
그때 시사저널 선배였던 소설가 김훈 선생이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왔을 때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짝퉁 시사저널’이 발행되고 있지만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다고 했더니 그는 “매체의 정통성은 판권을 가진 사람에게 있다”라고 일갈했다. 그때 그 말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는데 지나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는 응원에 취한 우리를 깨어나게 하기 위해 찬물을 끼얹은 셈이었다.
져 본 사람들은 달랐다. 동아투위 해직기자 선배들이 우리를 응원하러 방문했다. 하지만 술자리에 가서는 단호하게 훈수했다. 어떤 희생과 모욕을 감수하고라도 다시 들어가라고. 자신들처럼 40년을 떠돌지 말고 순간의 모욕을 참고 들어가서 살 길을 찾으라고.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 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집단 사표를 내고 나왔다. 회사는 우리를 붙잡지 않았고 우리는 파업이라는 일리아드를 마치고 다시 창간이라는 오딧세이아를 써야 했다.
후회는 없다. 멋진 패배였고 다시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사주간지 정상에 올라섰다. 만약 우리가 시사IN 창간에 실패했다면 파업의 추억은 악몽이 되었겠지만 다행히 우리는 부활했고 파업의 기억은 단골 술안주가 되었다. 파업 와중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퀴즈프로그램에 나가 우승했던 나의 경험은 ‘모듬 과일안주’만큼이나 술자리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패배의 의무’를 수행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런 패배의 기억 때문인지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국정농단 재판도 ‘패배의 품격’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그런데 볼수록 한심했다. 평범한 잡범만도 못했다. 그들이 저지른 비리도 구차했지만 재판에 임하는 그들의 태도는 더 실망스러웠다. 한때 국정을 통솔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하고 몰염치했다. 밖에서 그들을 응원하던 사람들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패배의 품격’은 중요하다. 실상 우리의 인생은 패배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성공은 모든 조건이 맞아야 가능하지만 실패는 하나의 조건만 어긋나도 바로 직면하게 된다. 성공이 아니라 실패가 일상의 궤도 안에 있는 행성이다. 우리의 개인사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기억으로 점철된다. 성공이 명절 때나 먹게 되는 특식이라면 실패는 매일 먹는 일상식이다.
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그 역사의 주역들 역시 다들 망해서 지금은 사라졌다. 비록 스스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해 기록되지만 패자의 역사는 많은 정한을 남긴다. 유물과 유적을 보면서 과거의 화려한 성취를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런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하고 망할 때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 백제 여행을 좋아한다.
그런데 백제 유적지에서 ‘패배의 정한’을 느끼기에는 후손들의 손길이 너무나 잔망스럽다. 후손들은 백제의 화려함을 부각하는 데에만 주목했다. 그 화려함을 부각하면 관광객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려함을 복원하기 위해 ‘대백제전’을 했는데 한 해 예산이 400억원 남짓이었던 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물량공세에도 백제의 화려함이 부활하지 못하자 이제는 ‘백제’를 뒤로 돌리고 ‘금강’을 내세우고 있다. ‘패배의 정한’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몇 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반면 2016년부터 매년 가는 코카서스 여행에서는 ‘패배의 정한’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1700년 동안 기독교를 유지한 조지아(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는 숱한 외침에도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켜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웠던’ 그들의 조상이 남긴 유적을 볼 수 있다. 부서지고 다시 짓기를 반복해서 도시의 교회는 층층이 다른 벽돌이었다.
산으로 숨어든 교회는 최후의 방어선이 되었다. 조지아의 옛 수도 므츠헤타에 있는 스베티츠호벨리 교회에는 회당 안에 우물이 하나 있다. 그 우물은 인근 강으로 빠져나가는 비상구인데 최후의 순간 성물을 안고 탈출한다고 했다. 그렇게 탈출해서는 성물을 들고 카즈베기 산으로 오른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는 신화가 있는 자리에 세워진 게르게티 삼위일체 교회로 간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비밀의 방에 곡식의 씨앗을 숨겨두듯 성물들을 숨겨둔다.
지금은 ‘사랑의 도시’가 된 시그나기에는 우리의 남한산성에 해당되는 산성이 있다. 그 성벽의 망루에 서면 카스피해 방향으로 평원이 펼쳐지는데 거기 서면 페르시아와 몽골과 티무르 군대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준비된 패배’를 기다리며 조지아 청년들은 포도나무 가지를 허리띠로 묶었다고 한다. 자신이 쓰러진 자리에 포도나무 가지를 꽂아 한 그루 포도나무로 부활하기 위해서란다. 후손들은 그렇게 스러진 병사들의 이름을 시그나기 성벽에 새겨 놓았다.
스위스 루체른에는 프랑스혁명 당시 마지막까지 프랑스 왕실을 보호하다 사망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을 기리는 ‘빈사의 사자상’이 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혁명군은 그들에게 항복을 종용했지만 그들은 여기서 우리가 물러나면 어떤 왕조도 우리의 후손들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옥쇄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기록은 역사의 진짜 승자를 재소환한다.
지독한 패배는 승리를 품기도 한다. 베트남이 그렇다. 근현대에 베트남은 프랑스 일본 미국 중국 등 강대국과의 싸움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런데 베트남의 승리 비결은 바로 패배였다. 패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전쟁터를 지옥으로 만들어 주인이 아닌 자가 그 지옥에서 먼저 달아나게 만들었다. 약자가 강자와 싸워서 이기는 방법의 전제는 예정된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베트남에 갔을 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스 함선이 거친 함포 사격을 가한 뒤 베트남 독립군의 리더를 불러 항복하지 않으면 계속 함포 사격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그가 초연하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함포를 쏘면 그 자리에 구덩이가 생긴다. 비가 오면 그 구덩이에 물이 고인다. 물이 고이면 그 구덩이에 메기가 산다. 그 구덩이에서 자란 메기를 우리 아이들이 잡아먹으며 자라서 당신들과 싸울 것이다.”
승리에 환희가 있다면 패배에는 그것을 뺀 모든 것이 있다. 패배를 읽는 것은 바로 인생을 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