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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Sep 16. 2021

남원에서 실험한 한국형 아그리투리스모(농가체험민박)

여행감독의 '길 위의 살롱' 구축기 - 남원동편제마을 휴락


‘여행감독’이라는 직업을 창직했다. 여행감독은 ‘여행을 연출하는 사람’, 즉 다양한 모형의 여행을 기획하는 사람이다. 여행사들의 패키지여행이 여행이 아닌 관광에만 주안점을 두면서 여행의 격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고 여행감을 살릴 수 있는 ‘수제 패키지여행’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여행감독을 자처하게 되었다.  


여행감독으로서 다양한 여행 실험을 벌이고 있다. 국내 여행의 격을 높이자는 생각에 '명품 한국 기행'과 ‘명품 한국 스테이’ 시리즈를 개발하고 있다. 국내 여행인데 기본 가치를 3박4일 99만원으로 정했다. 그런데 숙소가 고급호텔이 아니다. 마을숙소나 게스트하우스를 활용하면서 이 가격을 받는 것이다.  


이런 여행에 오려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여행을 다녀와서는 만족할까? 만족한다. 몇 번의 시범여행을 통해 확인했다. 코로나19 집합금지(2020년 11월)가 시행되기 전 세 차례 정도 다녀왔는데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 여행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해서 그 효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숙소나 게스트하우스를 숙소로 이용하고 이런 비용을 지불하고도 비싸다고 느끼지 않는 비결이 무엇일까? 이에 맞는 사람을 섭외했기 때문이다.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 여행으로 인연 맺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가성비보다 가심비를 중시하는 사람을 섭외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여행업 관계자들이 국내 여행에 눈을 돌리며 ‘프리미엄 국내여행’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패키지여행 대국인 한국의 등잔 밑이 어두웠다. 그럴듯한 국내 여행 패키지여행 상품이 없었다. 대부분 가성비를 높이려는 저가형 상품뿐이었다. 가심비를 높인 프리미엄 패키지여행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를 고민해 보았다. 


‘명품 한국 기행’과 ‘명품 한국 스테이’를 기획하면서 도입한 개념은 '업트레블링'으로, '내가 여행한 곳을 여행하기 전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오는 여행'이었다. 방법은 소통이었다. 여행자와 현지에서 맞아주는 사람이 끝없이 소통하도록 중재해서 여행자는 현지의 사정을 이해하고 맞아주는 사람은 여행자가 원하는 바를 알아가도록 했다.  



남원의 동편제마을영농협동조합 마을숙소 ‘휴락’, 광주 양림동의 마을협동조합 게스트하우스 ‘호랑가시나무’ 그리고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 중인 삼척 나릿골의 ‘삼척살롱’은 이런 업트레블링 실험의 무대였다. 이곳을 반복적으로 여행하고 끝없이 소통하며 도시인의 욕망과 지역의 열망 사이의 접점을 찾아보았다.  


판소리 동편제의 창시자 가왕 송흥록의 생가가 있는 남원 동편제마을은 가장 적극적인 실험을 했던 곳이다. 이곳 마을영농협동조합은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마을숙소와 오픈 키친을 구축해 두었는데 여기서 다양한 여행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여행감독으로서 구현하려는 여행의 가치가 ‘어른의 여행’ ‘길 위의 살롱’ ‘사람 스테이’인데 동편제마을의 휴락은 최적의 공간이었다.   


우리 농촌의 미래를 개척하려면 미래를 위한 포석이 있어야 한다. 그 포석은 투자에서 나온다. 그 투자가 효율적이려면 트렌드와 맞아야 한다. 트렌드와 동떨어진 투자는 자칫 짐이 되어서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남원 동편제마을 휴락은 미래를 위한 포석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전범이라 할 수 있다. '도시보다 더 도시 같은' 경험을 구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시인들은 도시를 떠나 전원에 와서도 도시를 구현하고 싶어 한다. 샤워는 할 수 있어야 하고, 화장실은 깔끔해야 하고, 벌레는 방에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도시의 삶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대 도시인들이 요구하는 '최소 도시'라 할 수 있다. 보통의 마을 숙소는 청소년 수련 시설로나 쓸 수 있을 정도로 투박한데, 휴락은 처음부터 눈높이를 높게 맞췄다.  



휴락은 단순히 숙소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길 위의 살롱’을 구현하는 곳으로 활용했다. 요즘 도시에서도 모임을 할 때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연출할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해서 파티를 열곤 한다. 휴락을 점유하고 몇 번 ‘길 위의 살롱을 구현해 보았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남원(지리산)에 살롱문화를 구축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인숙 동편제마을영농조합 위원장이 공간을 마음껏 연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서 우리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 휴락을 보았을 때는 위치가 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딱 봤을 때 풍경이 좋다 싶은 곳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휴락은 동편제마을 언저리에 논과 밭, 논과 마을, 논과 숲의 경계에 있었다. 마을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 간섭받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원경은 좋았지만 근경은 다소 산만했다. 


그런데 이곳을 예닐곱 번 드나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휴락은 독특한 공간감을 선사했다. 마을의 일부이면서도 마을과 적당히 분리되어 있었다. 사계절의 변화를 휴락을 둘러싼 농작물의 변화로 더 실감할 수 있었다. 시골 마을이 주는 포근함이 있었다. 시골 출신인 나에게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는데 마치 논 한가운데 있는 인도네시아 리조트들을 연상시켰다. 


처음 시설을 설계할 때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지은 점도 돋보였다. 여행자의 휴식에 방점을 찍고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오 위원장이 꼼꼼하게 디테일을 직접 챙겨서 창호의 견고함이나 바닥 마무리나 빈틈이 없었다. 지리산 둘레길의 오마주로 긴 회랑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호텔 복도를 연상시켜 숙소를 고급스럽게 느껴지게 했다. 



건물이 품고 있는 '옆마당'을 잔디밭으로 가꿔서 행사를 할 수 있게 한 점도 돋보였다. 이 공간에서 휴락의 메뉴를 책임졌던 셰프가 야외결혼식을 열었는데 그런 행사를 진행하기에 딱 맞는 공간이었다. 처음부터 '마을 잔치'를 염두에 두고 설계한 것이라고 했다. 고립되지 않았음에도 외부와 적절히 분리되어 있는 특유의 공간감이 좋았다. 


휴락은 숙박 공간인 '휴'와 식사 및 모임 공간인 '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락'에서는 남다른 미식을 경험할 수 있다. 오 위원장의 남편인 박화춘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돼지 육종 전문가다. 그가 개량한 지리산 흑돼지 버크셔K는 고급 돈육의 상징이어서 유명 셰프들이 자신의 음식을 소개할 때 "나는 버크셔K 쓴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현지에서 최적의 기간 동안 숙성시킨 버크셔K를 맛볼 수 있다.   


박화춘 박사는 이곳 흑돼지를 다른 곳보다 크게 키운다. 보통 돼지는 끝까지 기르지 않고 사료를 경제적으로 먹일 수 있을 때까지만 키운다. 그런데 이곳은 더 키운다. 지방이 익을 만큼 키워야 돼지고기가 맛있기 때문이다. 소와 다르게 돼지는 지방이 익어야 고기 맛이 풍부해지기 때문에 키울수록 맛이 좋아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다양한 방식의 바비큐를 만들 수 있는 앤디가 지방이 가장 맛있을 만큼 익힌다. 


좋은 식자재가 주변에 나는 동편제마을은 미식 실험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휴락의 전속 셰프가 지리산 토속음식으로 정찬을 차려주었다. 신메뉴 개발도 도왔다. 버크셔K를 활용한 ‘흑돼지 샤브샤브’를 개발하려고 해서 피드백을 주며 도왔다. ‘흑돼지 샤브샤브’는 일본 가고시마 지방의 특산물로 일본에서 가이세키요리로 가장 유명한 료칸의 메인 메뉴이기도 하다. 버크셔K가 품종적으로 우월해서 그 이상의 맛을 냈다.    



공연 실험도 반복적으로 해보면서 여행에 최적화된 공연 모형을 가늠할 수 있었다. 휴락의 식당은 좌우 개폐식 창문이어서 이를 열면 바깥쪽 데크를 무대로 쓸 수 있었다. 여기서 세 명의 뮤지션(하소라/가야금, 정찬희/소프라노, 최원경/플라멩코)이 <지리산 카르멘> 공연을 했다. 휴락에서 몇 번 솔리스트로 공연을 했던 이들은 하나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유기적인 무대를 만들자며 <카르멘>을 재해석한 옴니버스 공연을 만들었다.  


휴락의 화룡점정은 버크셔K로 만든 샤퀴테리(저장식 육가공품)였다. 박화춘 박사의 아들인 박자연씨는 버크셔K로 하몽 살라미 등 고급 샤퀴테리를 제조하는데 이를 화이트 와인과 페어링 하면 하모니가 좋았다. 참여한 이들이 도시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멋진 파티라고 만족스러워했다. 도시는 세련되고 농촌은 뒤처진 곳이라는 이분법을 뛰어넘었다. 농촌이기에 더 의미 있는 취향 실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기업체 소규모 연수 등에 이를 활용한다면 격조 있는 프로그램이 될 것 같았다. 


동편제마을 휴락은 여행감독으로서 취향의 큐레이션을 하기에 아주 유용한 곳이었다. 식자재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여행가독으로서 연출의 여지가 많았다. 처음에는 마을숙소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게 되지만 이용하고 나면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휴락에서의 여행 실험을 통해 현대 도시인에게 맞는 ‘최소도시’ ‘최소예술’ ‘최소기획’이라는 여행 모형을 정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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