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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프라다는 악마도 이용한다

국내여행 난제를 풀기 위한 프라다식 해법

by 고재열 여행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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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가본 지 17년이 되었다. 17년 전 갔던 뉴욕의 소호 거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프라다 안테나숍이었다. 맨해튼을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가로지르는 브로드웨이와 프린스 거리가 만나는 소호의 심장부에 프라다의 안테나숍이 있었다. 옷을 살 생각은 아니었지만 프라다라는 브랜드가 어떻게 자신을 디스플레이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로 루이뷔통과 함께 세계 패션계를 이끌고 있는 프라다의 뉴욕 안테나숍은 구겐하임 미술관의 소호 분관을 개조한 곳이었다. 프라다 본사는 프라다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프라다의 창의성이 집결된 이 매장은, 그 자체가 다양한 설치미술 작품 집결체로서 현지 예술가들로부터 웬만한 갤러리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2001년 말 완공된 이 안테나숍은 개조 공사와 실내 인테리어에 2천만 달러(약 2백40억 원)가 넘게 들었다고 했다. 램 쿨하스와 메트로폴리탄 건축사무소 등 당대 최고 건축가들이 공동 설계하면서 이 매장은 많은 관심을 모았다. 메트로폴리탄 건축사무소에서도 가장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AMO팀은 구매자가 자신의 전신 모습을 다양한 방향에서 감상하고 어울리는 옷을 시뮬레이션으로 고를 수 있도록 최첨단 디지털 장비를 동원했다.


시즌마다 내부 인테리어에 변화를 주는 이 매장의 인테리어가 내가 방문하기 얼마 전 바뀌었다. 우리에게 무척 낯익은 모습이었다. 바뀐 매장의 콘셉트가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 매장 내벽에는 북한 여성들의 카드섹션 장면을 찍은 거대한 사진이 벽을 장식하고 있고, 곳곳에 인민군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마네킹들은 사열하는 인민군 사병처럼 도열해 있었다.


프라다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뉴요커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 중 하나이다. 검은색을 바탕으로 한, 평범함 속에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는 프라다의 미학이 실용적인 뉴요커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프라다 뉴욕 안테나숍의 새로운 인테리어는 단순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프라다의 미니멀리즘과 간결한 메시지의 사회주의 선전선동술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반영한다.


프라다는 단지 패션적인 면만을 고려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뉴욕 안테나숍의 주요 콘셉트로 잡았을까?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프라다 제국을 이끌고 있는 미우치아 프라다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창업주 마리오 프라다의 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는 가내 수공업 수준에 머물렀던 프라다를 세계적인 패션 제국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그녀의 히스토리를 들여다보면 이 의문을 풀 수 있다.


정치학 박사 출신인 미우치아 프라다는 대학 시절 사회주의당에 몸 담기도 했던 급진 좌파 성향의 학생이었다. 한때 여성운동에도 투신했던 미우치아는 창업주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 침체 일로이던 가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스물여덟 살이던 1978년 경영 일선에 뛰어들었다.


전문 디자이너 수업을 받지 않은 그녀는 ‘컨셉터’로서 디자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프라다의 콘셉트를 명확히 했다. 겉으로 화려하지 않으면서 실용적이고, 두고두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 프라다는 거품 경기가 꺼진 후 실용적인 패션에 눈을 돌리던 여성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특히 낮과 밤, 정장과 캐주얼, 어떤 상황에도 어울리는 프라다의 핸드백은 그 실용성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1985년 토드 핸드백이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키면서 일약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한 프라다는, 이후 여성복과 남성복을 잇달아 선보였고, 저가 캐주얼 브랜드인 미우미우, 활동적인 프라다 스포츠를 선보이며 실용성 위주의 디자인으로 패션 혁명을 주도했다. 1990년대에 해마다 성장세를 기록한 프라다는 헬무트 랭·질 샌더·펜디 등을 인수하며 20년 만에 세계적인 패션 그룹으로 도약했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뉴욕 안테나숍의 주요 콘셉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설정한 것은, 좌경화하고 있는 뉴요커의 의식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뉴욕은 9·11 사태 이후 ‘반부시 감정’이 팽배해 있다. 뉴요커들에게 부시 대통령은 ‘이디엇’(멍청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리 곳곳에서 부시의 대외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자를 만날 수 있었다.


뉴요커들의 좌경화 성향은 다른 미국 언론에 비해서 비교적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뉴욕 타임스>보다도 더욱 진보적인 타블로이드판 <빌리지 보이스>가 무가지임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역 특성에 맞게 이미지숍을 만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미우치아 프라다가 뉴요커들의 이런 성향을 읽고 부시가 ‘깡패 국가’로 지목한 북한을 매장의 주요 콘셉트로 도입한 것으로 짐작된다.

언젠가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프라다가 북한 인민군 제복을 디자인해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프라다와 군복은 낯설지만은 않다. 프라다를 세계적 브랜드로 이끌어준 소재인 ‘포코노 나일론’은 미우치아가 버려진 군용 물품 공장에서 찾은 것이었다. 17년 뒤에 프라다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프라다의 큐레이션 능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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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함은 이미 와 있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 프라다가 군용 물품에서 소재를 찾고 조선민주주의공화국에서 영감을 받았듯이 여행을 디자인할 때도 기존에 있는 것 중에서 절묘한 것을 뽑아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치장하는 능력이 아니라 알아보고 뽑아내는 능력이다.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다.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공격할 때 그 악의 축에서 컨셉의 축을 뽑아낸 프라다처럼 말이다.


국내여행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숙박 인프라다. 제주 부산 강릉 여수 등 극히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턱없이 부족하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눈높이가 높아진 여행자들을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프라다식 해법이다. 중요한 것은 안목이다. 여행자에게 절묘한 숙소를 골라낼 안목이 중요하다. 여행을 짜다가 갑자기 17년 전 프라다의 뉴욕 안테냐숍을 기억해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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