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류근일 칼럼'에 첨삭 지도를 해주던 시절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내 첨삭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생'으로 언론계를 은퇴했지만, 오랜만에 추억의 첨삭 지도를 꺼내 보았다. 김대중 주필에게는 여론을 호도하는 공식이 있다. 그런데 그 공식이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 공식을 풀어보았다.
2008년 9월8일자 김대중 칼럼 '언론의 세 가지 터부'에 대한 첨삭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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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군 보아요. 9월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언론의 세 가지 터부’ 잘 보았어요. 아니, 잘 보지 못했어요. 김군, 이번 글은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조갑제 군의 글을 보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김군에게 ‘조선일보의 세 가지 터부’를 알려주는 것으로 김군의 글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해요)
흔히 나이 들면 애가 된다고 얘기를 하지요. 김군의 이번 글을 보니 정말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이번 글은 정말 ‘초딩’이 쓴 글 같아요. 김군은 요즘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안 그랬으면 논술세대에 밀려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거나 조선일보에 들어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한 번 따져 볼까요? 김군의 논리는 이렇죠. 우리 언론에는 ‘지역, 여성, 종교’에 대한 성역이 있다. ‘언론은 지역문제로 큰 곤욕을 치르곤 했다’ / ‘여성의 문제도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 ‘언론의 터부 중에서도 으뜸가는 터부는 종교다’라고 하면서 우리 언론이 이 세 영역을 다루는 것을 기피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이런 터부의 영역은 정치권이라고 해서 없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이런 영역을 터부시 하는 것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자기들의 배타적 이익에 집착하며 우월적 지위를 요구하는 집단의 규모와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라며 문제를 지적했어요. 또한 ‘사회에 터부가 늘어간다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어요.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김군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해요. 이런 궤변을 펼친 이유는 이 한 문장 때문이지요. “그에 못지않게 불교계 역시 정치권력과 어떤 게임을 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일부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해 주기 바란다” 바로 이 문장 때문이지요. 즉, 불교계가 ‘시국 법회’ 등을 통해 대통령과 맞서는 것을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지요, 그리고 언론이 이런 불교계의 ‘행태’에 대해 할 말을 해야 한다며 ‘할 말은 하는 신문’ 조선일보에 김군은 하고 싶은 말을 했죠.
김군의 괘변은 ‘언론의 성역’을 ‘언론의 터부(taboo)’로 격하하는 지점에서 발생해요. 언론에서 ‘지역 차별’ ‘여성 차별’ ‘종교 차별’은 성역에 가깝죠. 우리보다 더한 절대적인 언론 자유를 추구하는 미국에서도 ‘차별을 주장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만은 허락하지 않고 있죠. 거의 유일하게 언론 자유에 앞서는 부분이 바로 이 차별에 대한 부분이죠.
그런데 김군은 우리가 절대적인 금기로 삼아야 할 ‘지역 차별’ ‘여성 차별’ ‘종교 차별’의 문제에 ‘지역 혐오 표현’ ‘여성계 비리’ ‘사이비 종교’의 문제를 끌고 들어와서 언론이 제대로 말해야 하는데, 반발이 무서워서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어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식으로...) 그러면서 ‘지역 혐오 표현’ ‘여성계 비리’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 언론이 말해야 하는 것과 ‘지역 차별’ ‘여성 차별’ ‘종교 차별’을 말하는 것과 헷갈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불교계 비판을 정당화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결론을 말할게요. 김군이 말하는 터부는 깨는 것이 옳아요? 그렇다고 터부를 깬다는 명분으로 성역을 침범해서는 안돼요. 누구도 ‘지역 차별’ ‘여성 차별’ ‘종교 차별’을 주장할 자유는 없어요. 김군이 늘 따르는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김군, 오늘은 선생님이 서비스로 ‘조선일보의 세 가지 터부’를 짚어줄게요. 김군이 후배들에게 잘 일러 주세요. ‘할 말을 하는 신문’ 조선일보가 할 말을 다 못하는, 터부라기보다는 성역에 가까운 존재가 세 가지 있어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해서, 삼성 등 재벌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한 마디씩 하는 조선일보가 할 말을 다하지 못하는 존재, 누구일까요?
바로 미국과 보수세력과 언론 자유예요. 조선일보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김대중 학생에게 더욱 두드러지는) ‘아이 몇 명 데리고 ‘곁방살이’하는 흥부’ 같아요. 더 구체적으로 비유를 해보면 이제 멀쩡하게 집세를 다 내고 웃돈까지 내면서도 집주인 놀부 마누라 행패에 끽소리도 못하는 불쌍한 흥부 같아요.
김군은 미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며 비난하죠. 속으로는 주인집 안방의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좋아하면서, 주인집 아들의 메이커 운동화를 부러워하면서, 주인집에 가서 TV를 얻어 보는 주제에, 겉으로는 비난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남의 집에 세 산다고 주인집 아들의 행패를 보고만 있어야 하나요? 김군이 그런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다음 세대도 그런 시대를 살아야 하나요?
다음은 보수세력이죠. HID가 진보신당에 백색테러를 가할 때, (조선일보는 실형이 선고되었을 때가 돼서야 보도하고 면피하려 했죠) HID가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국조인 꿩을 죽였을 때, 조선일보는 그 야만성에 침묵했어요. 아울러 조선일보는 보수세력이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온갖 천박한 짓거리에 침묵하고 있어요. 조선일보가 진보세력에 들이댄 엄격한 잣대를 보수세력에 들이댄다면 아마 한국의 보수세력은 씨가 마르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언론자유 문제에 대해서 말해보죠. ‘기자실 복원’같은 한가한 언론자유 문제 말고 제대로 된 언론자유 문제를 조선일보가 정면으로 다뤄 본 적이 있나요? 편집이 모두 끝난 기사를 경영진이 인쇄소에서 몰래 빼는 ‘시사저널 사태’에 끝까지 침묵했던 조선일보는 YTN에 낙하산 사장이 임명되었을 때도 역시 침묵했어요.
사장이 기자들 몰래 인쇄소에서 기사를 빼는 일과 정권이 언론사에 낙하산 사장을 앉히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나요? 추석 끝나면 후배들과 함께 ‘조선일보의 세 가지 터부(혹은 성역)’에 대해서 깊이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