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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Dec 27. 2020

징기스칸에게 멋지게 복수한 제주 여성

칭기즈 칸은 정복의 길을, 칭기즈 퀸은 평화의 길을


‘오피스 허즈밴드’니 ‘오피스 와이프’니 하는 말이 있다는데 나에게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오피스 마더’에 해당한다. (오피스 파더는 누구일까? 김훈? 박원순? 백선배?) 시사저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 담배 심부름을 시키던 데스크였고 파업 때는 소송 동기였다.


서명숙 선배가 규슈올레에 이어 몽골올레를 놓았을 때 나는 ,칭기즈 퀸’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칸의 고향에 평화의 길을 놓았기 때문이다. 평소 서명숙 선배를 보았을 때 ‘아무래도 몽골 묵호의 후손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멋진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몽골올레 개장식에도 따라갔는데 당시 서 선배는 “제주인이 태어나 마을과 사회로 나가기 위해 처음 걷는 올레길이 제주와 세계를 잇는 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주의 장거리 도보여행길 이름을 ‘제주올레’로 지었다. 몽골올레 개장으로 ‘세상을 향해 열린 길’이라는 꿈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몽골을 위해 말을 기르던 제주 출신이라 소회가 더욱 깊었던 것 같다.



# 동아시아에서 일반명사가 된 '올레'

몽골에 올레가 놓이게 된 과정은 이랬다. ‘몽골을 사랑하는 제주인들의 모임’인 제몽포럼은 오랫동안 몽골 현지 학자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현지답사를 하던 제몽포럼 회원들은 초원의 나라 몽골에 제대로 된 트레킹 코스가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제주올레와 같은 길을 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제안을 제주올레에 했는데 제주관광공사가 길 탐사비용을 지불하기로 하면서 구상이 현실화 되었다.

사실 ‘올레’ 브랜드를 수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제주가 아닌 몽골에 길을 내는 일에 제주관광공사가 지원을 한다는 것은 논란이 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큰 비용이 드는 일은 아니었다. 제주올레 방식이 새로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길을 찾아내서 맵시 있게 잇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탐사 작업을 하는 동안의 항공료나 숙박비 정도는 필요했다. 이런 비용을 제주관광공사가 맡았다.

'제주관광공사가 제주관광을 하는 데 돈을 써야지 왜 몽골에 돈을 쓰고 오느냐'라는 의문은 현지에서 길을 걸어보고 말끔히 해소할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진 길에 올레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래서 길의 프랜차이즈를 구축한다면 충분히 해볼만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트레킹 코스를 보통 트레일이라고 부르는데 올레가 또 하나의 일반명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길이 있어야 할 곳에 길의 이름을 불러주다

트레킹코스로서 몽골올레는 탁월했다. 산악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트레일 코스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알프스산맥의 체르마트 코스, 코카서스산맥의 카즈베기 코스, 히말라야산맥 안나푸르나 트레일의 푼힐 코스 그리고 일본의 야쿠시마 코스와 비교해도 그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으로 멋진 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코스였다. 특히 초원과 구릉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모습은 걷는 사람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이렇게 좋은 길에 올레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특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에 트레일 코스가 없어 그동안 많은 여행자들이 아쉬워했다. 역시 시사저널 선배인 안은주 제주올레재단 이사는 “몽골올레 탐사팀이 길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은 외국 여성 트레커들을 만났다. 언덕이 너무 많아 헷갈리는데 아무런 표식이 없어 방향을 잡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그들을 게르(몽골식 텐트)에 데려다주며 몽골올레의 필요성을 확신했다”라고 말했다. 그 여행자들이 걸었던 곳은 칭기즈칸 어워(둥그렇게 쌓아 올린 돌탑)가 있는 곳으로 이번에 몽골올레 2코스가 놓인 곳이다.

제주올레재단은 올해 몽골올레를 출범시키며 두 코스를 열었다. 첫 번째는 복드항산 코스(14.5㎞), 두 번째는 칭기즈산 코스(11㎞)다. 복드항산은 시베리아 숲의 남쪽 마지노선으로 몽골에서는 신성한 산으로 여겨진다.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가까워 차를 타고 30분 정도만 가면 출발점에 도착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복드항산 남쪽 구릉지대의 마을 두 곳으로 올레길이 조성되었다. 멋진 자연환경만이 아니라 마을길을 걸으며 사람 사는 풍경을 보라는 제주올레의 원칙은 몽골올레에도 적용되었다.

#사람이 다닐수록 단단해지는 올레 표식

복드항산 코스를 조성할 때 제주올레 팀은 길 표식에 애를 먹었다고 했다. 제주올레는 간세(제주올레의 상징인 조랑말 모양)·화살표·리본 등으로 길을 표시하는데, 몽골 초원에는 리본을 묶을 나무, 화살표를 그릴 담벼락, 바위 등이 없었다. 그래서 수를 낸 것이 몽골의 어워처럼 조그만 돌탑을 쌓고 거기에 깃발을 꽂는 방식이다. 길을 걷는 사람이 돌을 보태면 표식이 더 단단해진다.

복드항산 코스는 하늘 맛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하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제주에서 오름을 올라본 사람들은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제주의 오름에서 포토샵으로 나무를 지우고 푸른색을 황갈색으로 바꾸면 바로 복드항산 코스가 된다. 초반부에 제주의 오름과 같은 언덕 4개를 연속해서 오르는데 다양한 각도에서 땅과 하늘이 맞닿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자갈과 짧은 풀밖에 없어 황량해 보였는데 걸어보니 메뚜기 천지였다. 발을 디딜 때마다 수십 마리가 팔짝 뛰었다.

4개 언덕을 지나면 게르 숙영지로 향하는 초원길이 나온다. 게르 10여 채가 있는 숙영지에서는 용변을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후반부 코스는 예전 군부대 자리 옆으로 지나가는데 군 훈련장 잔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조금 황폐해 보이기도 하지만 몽골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도착 지점에 다다르면 마을 하나를 가로지르게 되어 있어서 몽골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맑은 얼굴의 몽골 아이들이 여행자들에게 밝은 인사를 하며 피로를 씻어준다.




# 전쟁 어워 위에 평화의 어워가

몽골올레 2코스인 칭기즈산 코스에서는 압도적인 풍광을 경험할 수 있다. 두 코스 중에 한 코스만 고르라면 단연 이쪽이다. 몽골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칭기즈산은 테를지 국립공원 안에 있다. 이곳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이기도 하다. 칭기즈산 코스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테를지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툴 강을 따라 평원을 걷는 길이다. 후반부는 칭기즈칸 어워가 있는 칭기즈산 기슭을 넘는 코스다. 칭기즈산도 복드항산과 마찬가지로 나무가 별로 없는데 툴 강을 따라서는 자작나무와 버들나무 등 다양한 나무를 볼 수 있다.

칭기즈산 코스의 전반부 풍경은 툴 강이 좌우한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바닥이 몽돌이라 물이 맑다. 시원한 물줄기를 볼 수 있어 길이 지루하지 않다. 강 건너편에서 고삐 없는 말들이 물을 마시고 있는데 말들의 모습이 그대로 강에 비쳤다. 더할 수 없이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양, 염소, 소, 야크 등 다양한 동물의 방목장도 지나게 된다. 평원을 지나는 동안 몽골 유목민의 전형적인 생활 모습도 볼 수 있다. 휴양 온 몽골인들이 게르에서 야크치즈나 마유주를 구입해 가는 모습도 보았다.



# 언덕을 넘어야 언덕이 보인다

점심 도시락을 먹기 좋은 툴 강의 징검다리 휴식터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언덕이 나오기 시작한다. 칭기즈산 코스의 언덕은 복드항산 코스의 언덕과 다르다. 비슷한 높이의 언덕이 반복되었던 복드항산과 달리 이곳은 언덕을 넘으면 더 높은 언덕이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낮은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높은 언덕이 언덕을 넘으면 나온다는 것이었다. 더 높은 언덕에 오르면 조망도 좋아져서 낮은 언덕에서는 낮은 언덕밖에 보이지 않던 풍경이 더 높은 언덕과 웅장한 산을 허락했다. 이렇게 네 번 언덕을 넘게 된다.

칭기즈산 언덕에는 두 개의 어워가 있다. 세 번째 언덕 위의 어워에는 검은 말총으로 장식한 깃대가 꽂혀 있다. 이 어워는 전쟁을 상징한다. 전쟁에 나가기 전 몽골의 장수들은 이 어워에 제사 지내며 승리를 기원했다. 네 번째 언덕 위의 어워는 흰 말총으로 꾸민 깃대로 장식되어 있다. 이 어워는 평화를 상징한다. 호전적이었던 몽골인들이 전쟁보다 평화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칭기즈산은 네 번째 언덕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올레꾼들은 이 언덕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하고 내려가게 된다. 지대가 높아 상승기류를 탈 수 있는 이곳에서 매를 훈련하는 몽골인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간 날은 없었다. 언덕을 넘어가면 독특한 모양의 남근석이 나오는데 여기를 돌아 내려오면 칭기즈산 코스의 종점이 나온다.

몽골올레 개장 이후 칭기즈산 코스는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몽골에 봉사단체들도 많이 가는데 귀국 전 꼭 들르는 곳이 테를지 공원이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잦아들면 꼭 다시 찾고 싶다. 그때는 텐트를 가져가서 캠핑을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몽골 밤하늘을 마음껏 만끽하고 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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