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부자 될지도 모르는데 궁상맞게 아꼈다가 후회할 수도 있으니, 우리 저축은 하지 말고 버는 만큼 그냥 다 쓰자’고 아내를 설득했다가, 거짓말처럼 진짜 부자가 된 지인이 있다. 철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미래에서 가불해서 쓴 덕분에 그의 과거는 궁상의 기억을 피할 수 있었다.
재운을 당겨 쓴 지인의 부자가 된 이후 관찰기도 흥미로웠다. 부자가 되어보니 먼저 부자가 된 선배 혹은 자기보다 나중에 부자가 된 후배와 마주치게 되는 곳이 세 군데였다고 했다. 고급 룸살롱, 비싼 수입차 판매점 그리고 회원권이 비싼 골프장이 바로 그곳. 성실했던 사업가들이 여유가 생긴 뒤에는 예측 가능한 졸부의 길을 걷게 된다고.
계속 부자였던 사람과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의 소비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 소비의 방향성을 보면 ‘쭉 부자’는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잘 찾아가고 ‘급부자’는 남들이 좋다는 것을 구비해 놓는데 정신이 없다. ‘쭉 부자’는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지만 ‘급부자’는 부자로 알아봐 주어야 하기 때문에 열심히 힌트를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 '제대로 된 부자가 아님'을 들키게 만드는 경우가 왕왕 있다. 지방의 한 한옥은 궁궐에나 있을 법한 회랑을 설치하고 솟을대문을 3개나 가지고 있었다. 왜 3개냐고 물었더니 누가 와서 솟을 대문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하나 더 만들었고, 또 누가 와서 저쪽이 비어 있는 느낌이라고 해서 하나 더 만들었더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별채 방은 쓸모를 찾지 못해 술독을 들여다 놓고 있었다. 이 한옥을 짓기 위해 돈을 얼마나 들였냐고 물었더니 "묻지 마소, 마음만 아프요~"라고 답했다.
‘급부자’에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죄다 모아들인다는 것이다. 허비의 맥락이 없다. 홈바를 만들면 술집보다 더 많은 술을 구비해 두고 손님을 맞이한다. 내가 좋아하는 술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술자리를 주최들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불러들인다. 불러들이는 대상이 무한 확장되어 모임에 가보면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고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한국에 부자는 많은데 취향 부자는 드물다. 바꿔 말하면 부자가 되어서 저렇게 누리고 살 수 있구나,라고 부러워할 만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서구 귀족 사회가 대를 이어 가꿔온 취향의 맥락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취향의 세계에는 돈 외에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한국의 부자들은 단시간에 돈으로 따라잡으려 한다. 하지만 취향 부자는 하루아침에 될 수 없기 때문에 어설픈 따라하기의 티가 난다.
‘나중에 부자 될지도 모르니 지금 당겨 쓰자’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부자인 것처럼 ‘전략적 과소비’를 하고 있다. 기자생활 20년 동안 평범한 월급쟁이였고, 퇴직 후에 여행감독을 시작한 뒤로는 코로나19 때문에 고전하고 있지만, 부자 연습을 시작했다. 레스토랑 투자자로, 한옥과 레지던시 투자자로, 심지어 요트 투자자로 나섰다. 사람들이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미리 경험해보기 위해서다.
선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여행감독의 의무 중에는 ‘부자 연습’도 들어 있다. 남미여행을 기획할 때 내 상황과 내 또래 사람들의 상황을 중심으로 고민하면 2주 안에 돌아볼 수 있는 최적의 루트와 가성비를 중심으로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남미여행에 참여할 수 있는 돈과 시간과 에너지가 있는 1차 베이비붐 세대다. 그들은 가서 충분히 보고 오고 싶어하고 여행 인프라가 안 좋은 남미에서 가성비보다 가심비를 추구한다. 내 시선을 이들에게 옮길 필요가 있다.
북유럽은 물가가 비싸다. 그래서 가볍게 한끼를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 2만원에 육박한다. 보통 내 또래는 여기서 더 싼 음식점을 물색한다. 그런데 사치를 즐겨 하지 않는 북유럽에선 무겁게 식사를 해도 3만원 안팎이면 가능하다. 가벼운 식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행자가 더 나은 체험을 위해서는 무거운 식사를 도모하는 것이 낫다.
단골손님 대접을 받으며 서비스 안주를 더 받는 것 정도가 부의 상징이었는데, 투자한 레스토랑에 여행에서 접했던 특정 메뉴를 개발해 달라고 부탁하니 개발해 주었다. 모임을 위해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 주니 함께 간 사람들에게 생색을 내기에도 좋았다. 코로나19로 해외로 신혼여행을 못 가고 제주로 간 후배들에게는 투자한 제주 레스토랑에서 특별한 저녁을 부탁해 대접했다.
투자한 한옥과 레지던시에서는 '어른의 여행클럽/트래블러스랩'을 위한 모임을 도모한다. 우리와 관계가 있는 곳에서 모임을 하니 멤버들이 편하게 생각하고 모임의 밀도도 높아졌다. 요트 투자는 코로나 시기에 지인들이 관심을 보이기에 함께 시작해 보았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해양 레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데 스킨스쿠버나 서핑에 관심을 갖는 35-45세대와 달리 45-55세대는 요트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지인들에게 ‘이 정도 소비를 하려면 어느 정도 벌어야 가능할 것 같냐’고 물었더니, 수십억 자산가도 누리기 쉽지 않을 경지라고 한다.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부자 연습’을 해볼 생각이다. 해외의 별장을 한 달 정도 빌려서 함께 이용할 사람을 조직하고, 크루즈선도 한 블록을 통째로 빌려서 우리들만의 행사를 기획해 보려고 한다. 이런 허비에 나서는 이유는 여행이 경험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를 제안하기 위해 열심히 부자 연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