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열 여행감독 Jul 21. 2022

바람이 키운 여행가, 라스트라다 정

트래블러스랩의 여행감독, 정연일편


여행감독을 시작하고 관광업 종사자들을 밀착해서 지켜보게 되었다. 의외의 특징이 있었다. 관광업 종사자들이 생각보다 여행을 잘 가지 않았다. 자기 돈으로 여행하는 경우도 적었다. 초대하는 곳이 많으니. 주변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여행을 기획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돈벌이로 하는 일을 취미로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무튼 관광업 종사자 중 여행을 진짜 즐기는 사람은 드물었다.


20년 이상의 가이드 경력을 가지고 있는 베테랑 여행가 정연일은 내가 알고 있는 관광업 종사자 중에서 가장 여행을 즐기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닉네임이 ‘라 스트라다 정’인 그를 우리는 라정님이라고 부른다. ‘라 스트라다’는 길이라는 의미의 이태리어인데 그는 자신의 닉네임처럼 언제나 길 위에 있다. 그를 키운 건 팔할이 길이었다. 


코로나19가 잦아들 무렵 스페인과 시칠리아 여행을 인솔하고 온 그는 여행이 끝나고도 현지에 남았다. 자신만의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다. '돈을 벌면서 하는 여행'이 끝나고 '돈을 쓰면서 하는 여행' 시기가 되면 그의 페이스북 글이 길어지는데 읽는 맛이 있었다. 아직 여행서를 낸 적은 없지만 라정님은 어떤 여행작가 못지않은 탁월한 여행작가다. 여행은 그를 길 위의 인문학자로 만들었다. 



여행감독으로서 여행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자신만의 관점이 있는가'하는 점이다. 여행은 여행가의 취향을 반영하기 때문에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시선이 모여서 입체적인 여행이 형성되기에 자기 관점을 지닌 여행가가 중요하다. 라정님은 확실하게 자신의 관점으로 여행지를 바라본다. 또한 자신의 언어로 기억한다. 페이스북에 남기는 글만으로는 성에 안 찬다. 어서 빨리 그가 여행 에세이를 썼으면 좋겠다.


뼛속까지 여행자인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여행을 할수록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라정님은 진정한 '뼈행자'다. 남들보다 가본 곳이 월등하게 많지만 그는 간 곳을 얘기하는 것보다 가보고 싶은 곳 얘기를 좋아한다. 그의 여행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지는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다. 호기심은 여행력의 원천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여행에서 지치지 않는다. 라정님은 진정한 '호기심 천국'이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접하면 검색을 통해 추가 지식을 얻고 나중에 글로 정리하면서 자신의 취향 백화점에 아카이빙한다. 술이면 술, 그림이면 그림, 음악이면 음악, 문학이면 문학, 여행을 할 때마다 그의 취향은 전방위로 확장된다. 특정 장르에 속박되지도 않는다. 우리 장단도 재즈의 선율도, 두루 즐긴다. 



라정님의 여행법 중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여행법을 계속 갱신한다는 점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애플리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여행가다. 새로운 문물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고 이를 자신의 여행에 끌어들인다. 자신의 경험만이 최고고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꼰대가 아니라 세상의 가변성을 받아들이고 이 흐름을 흡수하는 자신만의 채널을 구축하고 있다.


여행자에게는 일상도 여행이다, 라는 수사학이 있지만 일상은 일상일 뿐이다. 그런데 라정님은 일상을 여행화 하는 공정에도 부지런한 편이다. 얼마 전 그는 부산사람을 위한 영도 여행을 조용히 실행했다. 여행의 대상이 외지인이 아니라 부산사람들이다. 그의 여행에 동참했던 지인은 그 덕분에 '영도의 속살'을 보았다고 감사해했다.


라정님과 함께 많은 곳을 여행했다. 캄차카 답사를 갔을 때는 조용한 조력자로 옆에서 도와주었다. 덕분에 날 것의 러시아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이후 그 부분을 보완해서 '캄차카 원시 대자연기행'을 멋지게 구성할 수 있었다. 시사IN에 재직할 때 그와 함께 '인생에 한 번은 쿠바' 여행을 기획한 적이 있다. 쿠바 기행을 기획할 때 주문한 것은 단순했다. '쿠바를 쿠바답게' 여행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쿠바 여행 때 그가 고른 방문지 중 가장 이례적인 곳은 하바나의 공동묘지였다. 위인들의 묘비가 있는 예쁘장한 공원이 아니라 정말 하바나 사람들이 이용하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큰 공동묘지였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보컬 이브라힘 페레르가 묻힌 곳이었기 때문이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이름을 이어받아 공연하는 밴드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묘역을 찾아 참배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인생 전반기에는 나를 위해 조언을 해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면 인생 후반기에는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여행친구가 유용한 친구다. 라정님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여행친구다. 그와 같이 간 여행에서는 늘 다음 여행에 대한 상상을 나누었다. 앞으로 그와 함께 포르투갈, 북유럽 크루즈, 시칠리아기행 등을 만들 계획이다. 그 여행이 기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교사 양현모는 어떻게 여행하는 화가가 되었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