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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Apr 18. 2023

트레킹의 여왕 돌로미테를 소개해준 임덕용 대장

돌로미테는 우리가 트레킹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을 보여준다


창밖으로 북한산과 도봉산 봉우리 수십 개가 지나갔다. 하지만 차는 멈추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사진으로 찍으려는 나에게 임덕용 대장은 가볍게 속삭였다. '아직 사진 찍을 때가 아닌데...' 그렇게 차는 한참을 더 달려서 금강산 설악산 봉우리 수십 개가 나올 때쯤 겨우 멈췄다. 그렇다. 여기는 트레킹의 여왕, 돌로미테다.  


돌로미테와 파타고니아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친 사람들이 다음 목적지로 꼽는 곳이다. 처음 돌로미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히말라야 다음이 있을 수 있지?' 생각했다. 있을 수 있었다. 히말라야는 분명 장엄하다. 하지만 마치 엄한 아버지처럼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히말라야는 그저 히말라야다.


돌로미테는 다채롭다. 산이 보여줄 수 있는 것, 혹은 우리가 산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구현해 준다. 돌로미테를 경험한 후, 돌로미테가 히말라야 다음인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높이로는 히말라야의 중턱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산이 가질 수 있는 매력으로 충만한 곳이었다.  



‘살아 있는 전설’ 매스너의 겸허함을 만나다


돌로미테 밑에서 30년을 산 원로산악인 임덕용 대장을 내게 소개해 준 사람은 시사IN에서 함께 일했던 백승기 선배였다. 두 원로 산악인 덕분에 ‘장밋빛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두 산악인은 돌로미테에 오르기 전 라인홀트 매스너가 구축한 볼자노의 산악박물관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볼자노의 고성을 리모델링한 산악박물관에서 가장 이채로웠던 점은 매스너가 '살이 있는 전설'인 자신을 감춘 점이었다. 히말라야 14좌로 무산소 등정한 매스너는 모두가 동의하는 산악계의 전설이다. 모든 산악인은 그에게 경의를 표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데 그는 고비사막에서 힘겹게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원경으로 찍은 사진 말고는 아무것도 산악사에 끼워 넣지 않았다. 산에서 스러져 간 수많은 이름과 그들이 산에서 지은 아름다운 미소를 옮겨 놓았다. 그 겸허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산악박물관을 임덕용과 백승기 두 원로 산악인의 안내를 받고 관람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번갈아 가며 설명하던 둘은 때때로 목이 메인 듯 말이 막히기도,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둘은 입시학원에서 만나 50년 가까이 ‘자일 파트너’로 지내온 사이다. 자일 파트너란 암벽 등반 때 자일을 공유하는 사이로, ‘서로 목숨을 책임지는 사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돌로미테 대자연 산책’도 목숨까지 나누는 그들의 끈끈한 인연을 바탕으로 성사될 수 있었다.


돌로미테 여행 상품은 대부분 알타비아(하늘길) 1코스를 종주하는 코스로 구성된다. 한국의 여행사들이 히말라야 트레킹처럼 돌로미테 트레킹도 종주 방식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여행사의 편의에 따른 것일 뿐 그리 권장할만한 방식이 아니다. 돌로미테의 극히 일부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와 돌로미테는 조건이 다르다. 히말라야는 워낙 고산이고 오지라 탈출로가 없어 단일코스를 종주 방식으로 다녀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돌로미테는 수많은 산책로가 도로와 곤돌라, 케이블카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굳이 한 길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알타비아는 총 12코스가 있는데 산군별로 권장 등산로를 설정한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제주올레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종주하는 길도 아니다.



성취 지향의 한국 트레커들은 알타비아1 종주를 돌로미테의 유일한 여행법처럼 알고 있다. 수직의 돌로미테를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비아 페라타'도 그냥 지나칠 뿐이다. 비유하자면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샐러드와 수프와 파스타와 디저트를 생략하고 그냥 메인 요리만 먹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0년 넘게 돌로미테 지역에서 전문 알파인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는 임덕용 선생은 이를 ‘코끼리를 보러 와서 코만 만지고 가는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임덕용 대장은 돌로미테라는 코끼리를 우리에게 구석구석 만질 수 있게 이끌었다. 드넓은 시르미아노 호수 뒤로 아련하게 상상하게 만들고,라고 디 까렛자에서 돌로미테의 강렬한 첫인상을 느끼게 한 다음, 로젠가르텐/ 셀라 초원/ 오르티세이 세체다/ 마르몰라다/ 라가주오이 친꿰또리/ 뜨레치메/ 세스토 등 돌로미테 최고의 트레킹 코스를 두루 경험하게 해 주었다.    



1> 부드러운 시작, 시르미아노 호수

큰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임덕용 대장은 오랜 비행을 마치고 온 여행자들을 바로 산으로 몰고 가지 않고 시르미아노 호수에서 재충전시켰다.  



2> 메스너 산악박물관

일종의 시산제라 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전설'을 만나는 것으로 트레킹을 시작한다. 메스너 산악박물관에서 스러져간 산악인들의 유품을 보는 것으로 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된다.   


3> 라고 디 까렛자

라고 디 까렛자 호수는 아름드리나무로 둘러싸인 호수로 그림 같은 반영을 볼 수 있다. 이 호수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돌로미테 트레킹을 위한 기분 좋은 워밍업을 하게 된다.  



4> 로젠 가르텐

돌로미테 트레킹의 힘찬 시작이다. 돌로미테라는 암산군의 꼴을 강렬하게 경험하게 해 준다. 푸른 초원에서 시작해 위태로운 협곡을 지나 뾰족한 암산을 만나는 날카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5> 셀라 초원

셀라 초원은 돌로미테의 중앙에 있는 고원 지대다. 이날은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비아 페라타를 도전해 볼 수도 있고 이곳에 자리 잡은 주봉을 다양한 방식으로 걸어볼 수 있다.  



6> 오르티세이 세체다

축구장 600개 넓이의 거대한 초지로, 6월이면 야생화로 눈호갈을 누릴 수 있는 코스다. 작년에 이 길을 걸을 때 비바람을 만나 고생했는데 원래는 별장으로 쓰는 롯지가 두루 위치한 전원적인 곳이다.



7> 마르몰라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 중 하나다. 설산을 옆에 두고 산 중턱을 따라 난 길을 내내 걷게 되는데 웅장함과 장엄함 사이에서도 경쾌한 리듬을 느낄 수 있어 지루한 줄 모르고 걷게 된다.


 

8> 라가주오이 친꿰또리

라가주오이 봉 내부에 뚫린 수직 갱도를 내려온다. 바위산의 내부에 암굴을 뚫어 저격수를 배치하고 포대를 설치했던 봉우리다. 전쟁의 참상을 날것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밖으로 연결된 곳에는 비아 페라타로 이어진 곳도 있다. 갱도 안팎을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내려오는데 이것 또한 수직의 산을 경험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로미테 수직의 풍경이 완성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9> 뜨레치메

알타비아 1코스의 핵심 봉우리다. 세 개의 봉우리가 줄지어 있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뒤쪽으로 가면 세 개의 호수가 있는데 이 호수에 비치는 반영을 보며 걷는 것도 일품이다.



10> 세스토   

오스트리아 국경에 있는 세스토는 돌로미테의 특성인 암군이 가장 화려하게 형성된 곳으로 공룡 수십 마리가 용트림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곳이다.


최고의 위치에 있는 숙소, 포르도이호텔


돌로미테 트레킹의 장점 중 하나는 트레킹을 둘러싼 인프라(숙소/식사)가 좋다는 점이다. 그 만족도의 대부분은 포르도이호텔에서 나왔다. 포르도이 호텔은 입지가 절묘하다. 돌로미테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어디든 쉽게 갈 수 있다. 또한 스키 리프트가 시작되는 지점인데, 호텔에서 바로 트레킹을 시작해서 언덕에 올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풍광을 볼 수 있다.



이런 천혜의 입지도 입지지만, 포르도이호텔은 다른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아들 딸 엄마 아빠, 4인 가족이 운영하는데 자기 역할에 소홀함이 없었다. 룸 관리나 음식 그리고 고객 접대 등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밤 우리를 위해 캠프파이어를 해준 것도 기억에 남는다.  


수직의 돌로미테를 경험하다


돌로미테를 제대로 경험하는 방법 중 하나는 수직의 돌로미테를 도전하는 것이다. 돌로미테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려면 수평이 아니라 수직의 산을 경험해야 하고, 비아 페라타는 아마추어들에게도 이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런데 돌로미테를 찾는 한국의 트레커들은 오직 수평으로 가로지를 뿐이다.



돌로미테에서 알타비아1을 종주하는 것이 코스 하나를 성취하는 일이라면 수직의 비아 페라타를 경험하는 것은 새로운 차원에 들어서는 일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과 에베레스트 트레킹에서 베이스캠프 위로 발걸음을 디뎌보는 일이다. 인간계가 아닌 신계로 들어서는 길이다. 비록 ‘비아 페라타’라는 셰르파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말이다.


티롤알프스를 만끽하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은 돌로미테의 주인인 ‘티롤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알타비아1이 있는 동부 돌로미테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옛 티롤 왕국의 후예인 이들은 이탈리아인도 아니고 오스트리아인도 아닌 ‘티롤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독특한 산악 문화를 일궈냈다. 이들과 만나기 위해서라도 돌로미테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수직의 돌로미테와 만나야 한다.



비아 페라타를 마치고 카나제이 마을에 내려왔을 때 마을은 가을 맥주축제로 분주했다. 산의 아들딸인 티롤인들 사이로 바이스비어(밀맥주)를 마시면서 티롤의 낭만을 한껏 만끽했다. 산악온천도 지친 우리의 근육을 달래주었다. 노천탕에서는 저 멀리 우리가 수직으로 가로지른 돌로미테의 봉우리들이 보였다. 수직의 돌로미테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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