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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May 09. 2024

고재열 여행감독 셀프 인터뷰


간만에 라디오 출연을 하고 왔다. 덕분에 겸사겸사 ‘여행감독’에 대한 내 생각을 재정리해 보았다. 처음 여행감독을 자처하기 시작한 것이 2019년 가을이니, 벌써 5년 차에 접어들었다. 2년 반 정도의 시간은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고 2022년 여름부터 2년여 시간 동안은 정신없이 여행을 진행했다. 여행감독으로 살아온 지난 5년을 되돌아보았다(셀프 인터뷰).  



- 여행감독이란 무엇인가?

영화감독이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이라면 여행감독은 여행을 연출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여행철학이나 주제의식을 넣어 여행을 기획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여행 기획은 크게 큐레이션과 솔루션으로 구성된다. 어디를 갈까? 어떤 방식으로 갈까? 어떤 사람들과 갈까에 대해 고르고 해결한다.


- 그럼 여행작가와의 차이는?

영화에 시나리오가 있듯이 여행에도 대본이 있다. 여행작가의 여행기는 일종의 여행 대본인 셈이다. 여행감독은 이 여행의 시나리오를 구현해 주는 사람이다. 개인이 하는 자유여행이 있고 여행사가 하는 패키지여행이 있다면 일종의 ‘수제 패키지여행’을 만드는 사람이다.


- 여행 가이드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행 가이드는 약속된 여행을 구현하는 사람이다. 여행감독의 일 중에는 이 역할도 포함되지만 여행을 기획하는 일부터 함께 여행할 사람을 짜는 일과 현지 전문가를 섭외하는 일 등 총체적이다.



- ‘여행감독 1호’를 자처하는데, 어떻게 여행감독이라는 말을 붙이게 되었는가?

김준기 광주시립미술관 관장님이 붙여준 말이다. 여행클럽을 구축해서 내 스타일의 여행을 기획했다고 했더니 전시회에서의 ‘예술감독’ 개념을 빌어서 만들어주었다. 여행감독을 자처하니 사람들이 좀 의아한 상황에서 ‘여행감독이 어떤 의도로 이렇게 했을까’ 한 템포 기다려주는 효과가 있다.


- 여행감독으로 활동하기 전에 기자를 오래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계기로 여행감독을 시작하게 되었나?

기자일을 하면서 소규모 여행클럽을 운영했다. 사람들을 남도의 섬에 데려갔는데 너무나 좋아했다.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얘기할 순서가 되어서 이렇게 농담을 했다. ‘여러분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예수인 것 같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왔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는 세상의 문제를 발견하는 사람인데, 나의 50대도 그런 가파른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여행감독은 사람들의 행복을 설계하는 일이다. 매력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기자일과 비교하면 어떤가?

큰 공통점으로는 제너럴리스트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전문직은 스페셜리스트인데, 기자와 여행감독은 제너럴리스트다. 좀 수식한다면 스페셜한 제너럴리스트다. 전문가가 아니면서 세상 모든 일에 전문적으로 관여하는 기자처럼, 현지 전문가가 아니면서 여행에 전문적으로 관여한다.


- 기자 경험이 도움이 되는가?

기자나 여행감독이나 관건은 ‘섭외’다. 좋은 취재원을 섭외하면 기사가 보장되듯이, 좋은 여행지를 고르고 그 여행지를 잘 풀어줄 사람을 섭외하면 여행기획은 거의 완성된다. 진실을 추구하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이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진실을 알리려는 의지가 좋은 여행지를 소개하려는 의지로 바뀌면 의미 있는 여행기획을 할 수 있다.


- 차이점은 무엇인가?

기자는 비판적인 시각이 중요하다. 기자의 일은 문제점을 발견하는 일이다. 반면 여행감독은 장점을 발견하는 능력과 단점을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그 반대면 여행이 괴로워진다). 기자의 일은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여행감독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차이다.


- 기자일 때와 무엇이 변한 것 같나?

‘의연함’이 생기는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 의연함도 필요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불합리에 대해서 한국이라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서 해결할 수 있지만 현지에서는 그것이 그냥 문화인 곳들이 많다. 인프라가 안 되어 있어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여행을 연출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밸런스다. 여행 일정은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일정이 줄줄이 눈깔사탕이 되지 않도록 신경 쓴다. 유럽 소도시기행을 하는데 계속 성당을 보게 되면 사나흘 째 되어서는 슬슬 지겨워져서 아무도 성당에 안 들어가려고 한다. 여행에 나름 기승전결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 여행을 구성할 때는 몇 가지 여행공학이 필요하다.


- ‘여행공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여행에서 보면 사람들의 심리는 비슷한 곡선을 그린다. 여행체력이 좋은 초반부의 여행의 숙제를 미리 풀어내는 게 좋다. 숙소는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것이 좋고. 주제의식은 여행의 좋은 핑계로 삼고 실제 여행에서는 잡스러운 것이 좋다, 이런 것들이다.


- 여행을 짤 때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최고도 아니고, 최선도 아니고, 최적을 추구한다. 여행은 늘 딜레마다. 좋은 조건으로 가고 싶지만 돈은 아끼고 싶고, 한정된 시간에 가지만 좋다는 것은 다 보고 싶다. 그런 딜레마에 기준점이 필요한데, 바로 ‘최적’이다. 돈이 충분하면 최고를 추구할 수 있고, 체력이 충분하면 최선을 추구할 수 있지만, 어른의 여행의 키워드로는 ‘최적’이 최적이라고 생각한다.


- 여행감독에게 중요한 능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크게 두 가지 능력이다. 큐레이션과 솔루션 능력. 좋은 것을 알아보는 능력과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스페셜한 제너럴리스트였던 기자 경험이 도움이 된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위기관리 능력과 한정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을 하는 능력도 그렇고.



- 여행감독이 기획하는 여행은 기존 여행사의 패키지여행과 무엇이 다른가?

대형 여행사들이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들이 있다. 일단 잘하는 것에 대해 얘기를 해보면, 여행의 컨베이어벨트를 잘 깔아 두었다. 흔히 말하는 가성비가 좋다. 효율에 있어서는 대형 여행사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런데 대형 여행사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컴플레인이 걸릴 것 같아서 안 하는 것들이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해야만 수익이 나니 특정 소수만 좋아하는 스타일은 안 한다. 우리 여행클럽에는 그런 여행을 기꺼이 해보려는 사람들이 가입해 있다.  


- 여행사와 콜라보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여행사와 협업하는가?

현지의 전문 여행사나 현지 전문가들과 협업한다. 그동안은 그들에게 가는 여행주문서가 너무나 천편일률적이었다. 우리 여행클럽을 대표해서 그들에게 새로운 주문서를 주고 우리에게 맞춤한 여행을 기획한다.


- ‘사람이 여행이다’라는 여행 철학을 제시했다. 어떤 얘기인가?

여행기획은 좋은 곳에 데려다 놓는 일이면서 좋은 사람과 연결해 주는 일이다. 기자 시절부터 섭외에 공을 들이곤 했다. 여행클럽도 관계 맺기를 통한 가치 창출이 관건이다. 좋은 사람과 연결해 주는 것이 절반이다. 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원로 산악인 임덕용 대장님에게 돌로미테와 알프스 트레킹을 부탁하고, 여행업 베테랑인 이기영 쌤에게 동유럽을, 정연일 쌤에게 지중해를 부탁하고, 중앙아시아 신실크로드를 알리려는 김상욱 교수에게 천산산맥을 부탁하고, 여러 몽골이 있지만 우리는 ‘진짜 몽골을 보여주겠다’는 솜야를 연결해 주는 일로 여행 숙제의 절반을 해결한다.



- 여행클럽에 좋은 여행친구들을 어떻게 모으는가?  

지금은 사람을 모으는 단계라 좋은 사람을 모으는 고민이 아니라, ‘좋게 행동하는 구조’를 고민하고 있다. 여행에서 진상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 자기주장을 다소 거칠게 표현하다 보면 우리들 중 누구라도 그런 진상이 될 수 있다. 여행감독으로서 ‘좋게 행동하는 구조’를 고민한다.


- ‘좋게 행동하는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일단 일반 패키지여행은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과 가는 여행이지만 여행클럽의 여행은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과 가는 일이다. 새롭게 인연을 맺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로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리고 여행감독인 나와의 관계가 있어서 나를 보고 한 템포 참아준다. 그리고 이미 내가 좋은 사람을 많이 모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좋은 분위기를 형성해 낸다.


- 여행클럽 멤버들에게 요구하는 원칙 같은 것이 있나?

이 세 가지다. ‘간섭하지 않는 결속력’ ‘불편한 사치’ ‘선을 넘지 않는 배려’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대부분 여기에 맞게 행동하신다.


- 어떤 사람이 이 여행클럽에 적합한 사람일까?

외롭지 않게 여행하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클럽이다. 농경사회의 유구한 전통이 우리 안에 새겨놓은 공동체 DNA가 있다. 함께 여행을 하면 마음의 마을이 만들어진다. 인맥이 되지는 않지만 인연을 맺어주는 일이 여행 기획이다. 어른의 여행은 인생 중간정산이 되고, 인간관계 중간급유가 된다.



- 여행클럽 이름이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이다. 대상이 한정적이다.

원래는 또래인 2차 베이비붐 세대 겨냥해 여행클럽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바쁜 현대 도시인을 위한 어른의 여행’을 기획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그런데 실제 내 여행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1차 베이비붐 세대였다. ‘바빴던 현대 도시인을 위한 어른의 여행’으로 시험범위가 바뀌었다. 어찌 되었건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의 여행 정보는 대부분 2030이 만드는데 MZ 세대의 취향이 과잉 대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506070 세대를 위한 여행을 고민하는 주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 1차 베이비붐 세대의 여행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명확한 특징이 있다. 그분들이 나에게 어디가 여행지로 좋냐고 물으면 나는 그분들에게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 어떤 여행지를 좋아하는지를 되묻는다. 그분들은 취향의 자기화가 부족하다. 남들이 좋다는 곳을 가고 남들이 좋다는 것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신을 콤파스의 중심에 놓고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 ‘어른의 여행’은 젊은이의 여행과 무엇이 다른가?

엑셀레이터가 아니라 브레이크다. 어른의 여행을 기획할 때 핵심은 어떻게 쉼표를 찍느냐다. 어른을 위한 여행 기획은 ‘뺄셈의 미학’이다. 일정을 더 뺄수록 좋은 여행이 된다. 개인적으로 더 긴 쉼표를 찍으려고 노력한다. 젊은 사람들은 여행지가 마음에 들면 ‘또 오고 싶다’고 말한다. 중장년 층은 다음에 다시 오면 ‘천천히 머물러 보고 싶다’고 말을 한다.



- 여행은 즐겁지만 일로 하면 지겹지 않나?

여행이란 결국 파티를 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룻밤에 끝나는 파티가 아니라 매일밤 지속되는 길 위의 파티를 여는 일이다.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다. 그 파티의 주관자가 되는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 이것 역시 기자일과 비슷한데, 관찰자의 위치를 즐길 수 있다. 특히나 내가 깐 판에서 사람들이 즐기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다.

 

- 몇몇 여행은 적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취소하지 않고 강행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마중물이 필요한 여행이 있다. 여행의 로망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지역에 대한 여행이다. ‘그런 나라에 왜 가?’라고 묻는 여행들이다. 직전에 진행한 루마니아기행이 대표적이다. 트래블러스랩의 레퍼토리가 될만한 여행이라 생각하면 스토리를 이어간다. 투자라는 생각으로. 나중에 고재열 여행감독의 여행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온다,라는 추종자가 충분히 생겼을 때, 이런 여행이 재평가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여행을 마친 뒤에 이 여행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있는가?

간단하다. 내 안의 소년 소녀를 끄집어내는 여행이 성공적인 여행이다. 여행에 참가한 사람에게서 소년과 소녀가 보일 때 그 여행은 성공적인 여행이라고 확신한다. 흔히 여행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들 하는데,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찾는 일에 더 가깝다고 본다. 여기서 전제는 나는 하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분신’ 개념을 가져와서 설명한다면 ‘개인’보다 더 나뉘는 나의 다중 자아가 있을 수 있다. 요즘 말로 본캐와 부캐가 있다면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형성한 본캐와 다른 나의 다른 부캐를 끄집어내는 일일 수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만나는 인간을 바꾸면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다.


- 여행감독으로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나? 3년 후에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은 어떻게 변해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어른의 여행 & 스테이 클럽, 트래블러스랩’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멈춤이 있는 여행’을 늘 고민한다. 지금은 다들 안 가본 곳들을 두루 가보려고 하지만, 어느 정도 다니고 나면 머물고 싶은 곳을 찾을 것이다. 트래블러스랩 멤버들이 머물 고 싶은 곳에 머물 수 있는 조건, 우리들만의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있다. 3년 후에는 그런 베이스캠프에서 머물면서 여행 시즌제를 진행하려고 한다.


- 베이스캠프를 구축해서 스테이 하면서 무엇을 하게 하려는가?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합리적 소비를 위해 합리적 소비를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끼는 것은 단순히 아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아낌이어야 한다. 그 가치를 허비에서 발견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그런 맥락에서 ‘동유럽 허비학교’와 ‘지중해 허비학교’를 풀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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