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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항복절’에 올라간 후지산

후지산에 올라가면 바보가 되는 이유

by 고재열 여행감독


뿌옇게 물태웠다, 후지산에서


‘잠존감’의 극치를 경험했다. 나는 빗속에서도 졸 수 있구나! 걷는데 자꾸 졸음이 왔다. 그러다 9합목 산장에서 오뎅을 먹다 졸았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라는 듯한 산장 주인의 터치에 산장 밖 벤치로 가서 우비를 입고 계속 졸았다.


지난 며칠 동안의 피로가 그 순간 떼로 몰려왔다. 노르웨이 로포텐 트레킹 마치고 돌아온 게 8/7, 그 이후의 시차. 8/11-8/14(풍랑으로 하루 더 지체) 백령도/대청도 섬여행의 누적 피로, 플러스 돌아오는 배에서의 뱃멀미. 배 타느라, 비행기 타느라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데, 그 모든 피로가 한순간에 나를 덮쳤다.


마치 몸의 부분 부분이 단체 파업에 들어간 듯, 몸이 움직이려 하질 않았다. 한참을 우비를 둘러쓴 송장처럼 앉아서 자다 일어났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몸이 개운했다,라는 착각이 들었다. 다시 꾸역꾸역 후지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몸이 무거웠다. 두통, 메스꺼움, 거센 심장박동… 고산증이구나! 두 달에 한 번 꼴로 3000m 이상을 다녀서 고산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는데, 누적된 피로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고산증을 품고 고산을 향했다.


계속 올라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중도 포기하고 내려오는 일행을 마주쳤다 허리 통증을 호소하시던 분이었다. 인사를 나누던 그 순간 ‘그럼 나는 올라가 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9합목(9부능선)에서 정상부를 보니 구름에 가려 있었다. 오늘 후지산 일정은 꽝! 맵스미 지도를 보니 일출 보는 신사 쪽이 아닌 정상으로 바로 가는 길이 있었다. 거리를 줄일 수 있어 그 길로 가기로 하고 천근만근인 몸을 재촉했다.



9.5부 능선 산장 뒤에 갈림길이 나왔는데 통행금지 푯말이 보였다. 사람들은 전부 일출 보는 신사 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일본 ‘항복절’에 와서 허점을 남길 수 없다는 생각에 나도 신사 쪽으로 올랐다. 정상까지 안 가도 정상 다녀오는 일행을 만나면 같이 내려오기로 마음먹고.


정상부 신사 쪽으로 오르다 내려오는 일행을 만났다. 후발대랑 15분 정도 격차가 있다고 해서, 그럼 15분 정도 더 올라도 되겠다는 생각에 계속 올랐다. 신사에 오르니 역시나 곰탕이었다. 맑은 나주곰탕 아니라 소뼈를 같이 우려낸 탁한 곰탕.


나에게는 5분의 시간이 더 있다는 생각에 최고봉을 조망하고 오기로 했다(최고봉까지는 20분이라 다녀올 수는 없고). 희뿌연 구름 속에 후지산 최고봉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우리의 광복절, 일본의 ‘항복절’에 맞춰 후지산 산행을 기획했는데, 일단 여기서 나는 항복!



전날 7합목 숙소 산장까지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고 바람도 습도도 적당했다. 서향이 아니어서 아쉬었지만 저녁에는 제법 분위기 있는 석양도 만끽할 수 있었다. 후지산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녁식사로 나온 산장 카레가 조금 부실하고(멤버 중 한 분이 왜 건더기가 없냐고 물으니 종업원은 ‘다 녹아서’라고 답했다) 화장실 냄새가 좀 나는 것하고 군대 내무반처럼 다닥다닥 붙어 자는 것하고 씻을 수 없는 것하고 일찍 소등하는 것하고 물가가 비싼 것 빼곤 다 좋았다(좋은 건 뭐지?).


밤비가 내릴 때에도 여유가 있었다. 비는 자정 전에 그치기로 되어 있었다. 예보에는. 마이크 타이슨이 그랬던가? “누구나 계획이 있다. 나한테 처맞기 전까지는!‘ 후지산 가랑비에 속옷 젖으면서 절감했다. 폭우도 아닌데 그토록 비에 시달리기는 처음이다.



하산길도 험난했다. 9.5합목 산장에서 후발대와 합류했다. 다리가 풀린 분이 한 분 계셨다. 해발 3500m에서… 이번에 에베레스트 등정 경험이 있는 곽정혜 대장님을 특별히 모셨는데, 그분을 데리고 내려가는데 큰 도움을 주셨다. 일본인 알파인 가이드와 둘이서 번갈아가며 그의 걸음을 유도했다.


몸이 불편한 사람까지 있었지만 산장 안에서 쉴 수는 없었다. 일본의 산장은 투숙객 이외에는 출입을 시키지 않는다. 유료 화장실만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라면 이런 폭우에 등산객을 못 들어오게 하면 당장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겠지만 시스템 순종주의 일본에서는 당연한 일인 듯했다. 다들 밖에서 묵묵히 비를 맞고 있었다. (비를 얼마나 맞았는지 내려와서 호텔에서 구겨 넣은 옷들을 꺼내니 청국장 냄새가 났다. 그대로 끓이면 속을 만큼. ㅋㅋ)


하산 길이 매우 더뎠다. 후지산 너덜길은 발걸음을 더 지체시켰다. 7합목에 있는, 우리가 묵은 산장에 도착하니 다른 일행은 대부분 내려간 상황이었다. 남은 두 분에게 물어보니 내려간 시간이 한참 전이라고 했다. 쉬어야 하는데,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0시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처음 예정엔 7합목 산장이 아니라 5합목 주차장에 도착하기로 했던 시간이다. 내려가서 차를 타고 점심 식당으로 이동할 예정이어서 아침식사를 생략하고 가자고 했는데 다들 눈동자가 흔들렸다.


생각해 보니 부실한 저녁을 먹고 자정에 산행을 시작해서 행동식 말고는 먹은 것이 없었다. 산장 주인에게 우리 아침식사를 내어주라고 했다. 역시나 부실한 규동과 추가 주문한 오뎅이 나왔다. 오뎅 국물만 좀 마시고 먼저 길을 나섰다.


5합목 주차장에 내려오니 먼저 내려온 본진은 버스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립된 오지라 다른 산행 말고는 대체 아이템을 제공할 수 없었다. 정상까지 다녀오느라 지친 일행이 더 걸을 생각은 없었고. 식당까지 차로 한 시간이라 먼저 보낼 수도 없었다. 다행히 일행이 양해해 주었다. 일본인 기사만 좀 짜증을 내고.



12시반이 넘어서야 몸이 불편한 분이 일본인 알파인 가이드와 함께 나타났다. 일정보다 두 시간 지체된 상황이었다. 속히 점심식당으로 향했다. 내가 나마비루 한 잔씩 쏘기로 하고!(돈은 늦게 내려오신 분이 내서, 나는 저녁에 맥주 한 잔씩을 돌렸다).


지칠 대로 지쳐 후지산을 내려오는데 올라오는 사람들의 표정들이 다들 밝았다. ‘니들도 당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길을 양보했다. 이 비에 이런 산에 오른다고? 일본인에게는 신성한 산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남의 ‘항복절’에 와서 고생 제대로 하고 가는 듯.


(정신이 혼미해서 제대로 기억한 것인지 모르겠다.)



주) ’바쁜 현대 도시인을 위한 어른의 여행클럽‘ 트래블러스랩의 일본 트레킹은 계절에 한 번씩 진행 됩니다.


봄 : 일본 북알프스 트레킹 오마카세

여름 : 후지산 트레킹

가을 : 단풍 트레킹

겨울 : 설국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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