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이름이 뭐예요?” 라는 질문은
“몸무게가 몇이에요?”라는 질문과 똑같은 무게의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몸무게를 물어보는 것에 당황하는 건 누구라도 당연하지만
이름을 묻는 것에서도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대답을 피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닌지라
티 나지 않게 흡! 하고 숨을 삼키고는 천천히 이름을 말한다.
그냥 딱, 이름 그 자체만 말해준다.
성까지 붙여서 말하는 건 더 부끄러워서 회피하려고 그런 것이지만
상대방은 되물어온다.
“아, 이름이 외자인가 봐요?”
차라리 외자였으면 좋으련만..
마지못해 성까지 붙여서 다시 말한다.
“…제 이름은 OOO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인터넷에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유사한 질문은 없었고
그렇다고 내가 질문을 올리자니 대답해 줄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에 대한 고민이라
주변 사람에게 진지하게 상담을 하지도 못한 채 꽤 오랜 시간을 살았다.
그동안에도 부지런히 이름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면서.
이름은 평생을 듣고 자랐음에도 가끔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 불러주면,
‘내 이름은 왜 OO이지?’
‘내가 OO이가 맞던가?’
‘OO이라 부르는 것에 내가 대답해도 되나?’
‘나는 왜 OO이지?’ 하며
게슈탈트 붕괴 현상 같은 것을 겪기도 한다.
또한 이름은 모든 관계의 시작점이다.
스쳐 지나갈 사람이더라도
첫 번째로 하는 질문은 이름을 묻는 것이다.
사는 곳 등의 자잘한 질문은 항상 바로 다음에 바짝 붙어서 대기하며
절대 먼저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저 '관계를 어려워하는 나는,
관계의 시작점부터 어려운가 보다.'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렇듯 이름에 관해 때때로 드는 생경함과 불편을 해소해 준 건
고등학생 때부터 친했던 한 친구의 말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마침내 이름이라는 주제에까지 닿았고
친구는 본인도 어릴 적에 그랬다며 예상하지 못한 공감을 해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누군가 이름을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건,
자존감이 바닥이라 그런 걸지도 몰라.”
긴 시간을 찾아 헤매던 답을 드디어 만난 것 같았다.
친구는 자존감이 낮았던 어린 시절에는 나처럼 이름 말하는 걸 어려워했지만
서서히 자존감이 자라난 후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는 일순간 내가 가여워졌다.
그놈의 자존감이 대체 뭐라고,
또 왜 하필 그게 그렇게나 낮아서
바보처럼 이름 하나 말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건지
도저히 나를 자책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런 자책이 문제였던 걸까.
살면서 겪은 고난들을 견딜 수 있던 원동력은,
온전했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상관없으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만은 평범했으면..’이 소원이었던 어린 날의 나는,
자꾸만 겹치는 고난 앞에
수많은 것 중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 몰라 자신을 원망하기로 했다.
내가 태어나서, 그다음은 내가 못나서,
또 그다음은 그냥 내가 나라서.
그렇게 마침내 닿아서는 안 될 곳까지 닿게 되었고,
그곳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나는 어느덧 꽤 높은 숫자를 나이로 가진 어른이지만
세 살 무렵에나 했을 이름 말하기를 다시 연습해야 한다.
마음도 목소리도 떨지 않고 또박또박 이름을 말하는 것부터가
쓰러진 자존감을 일으켜 세우는 일인 건지,
아니면 자존감을 세워야 이름을 말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지는 건지
그 순서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남은 생에서 이름을 말하게 될 일은 수천 번이 넘을지도 모르는데
그때마다 두려워하게 될 걸 생각하면
수백 명이 이름을 물어오는 상황 앞에 놓인 듯 공포감이 밀려온다.
쓰러져있는 자존감을 그대로 두고
내가 제일 앞장서서 짓밟으며 사는 건
나의 종말을 앞당기는 일이 될 것이기에.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 가장 쉬웠던
상처투성이의 어린아이는 마음에 품어 보살피고
이제는 어른의 나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