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세상에서.

by 고순

노트북 화면 속,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흰 종이를 마주 본다. 아름다운 백색의 세계에 선뜻 다가가기가 어렵다. 경직된 손가락의 감각과 손끝에 스치는 냉랭한 키보드 윗면이 느껴진다. 몇 초인지 모를 시간이 흐른다.


복잡한 내 마음을 대변하듯 거친 음악이 등 뒤에서 휘몰아친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다. 저번 주말, 종로 3가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린 음반가게에서 산 CD다. 생소한 이름과 처음 듣는 음악이지만 한 번 느낌대로 사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져 샀다. 격정적인 건반 소리에 몸은 예열된 자동차 엔진처럼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글이 <차가운 몸, 따뜻한 마음 사이>의 마지막을 장식할 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전에 쓴 <기쁨은 어디에 있는 걸까>는 30편이 끝인 줄 모르고 마지막 글을 썼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면, 조금은 다르게 썼을 텐데. 그런데 조금 다르다는 게 무엇이고, 마지막이라면 어떻게 써야 할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첫사랑, 호밀밭의 파수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상실의 시대, 19호실로 가다의 마지막 페이지가 불현듯 떠오른다. 수려한 문장들. 거장들의 문장 앞에서 내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책상에 놓인 애플펜슬을 무심히 쳐다본다. 최근에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흰 종이 위로 선이 가는 대로 빙빙 형태를 만들고 있다. 엉망이면 어때. 이상하면 어때. 그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그리는 순간에, 그려진 그림에 감사한 마음으로 사람, 동물, 자연, 건물, 사물까지 그리고 싶은 것들로 매일매일 채우고 있다. 이제 보니 나는 백지에서 그림을 그리며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 흰색인 것처럼 흰색을 사랑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차가운 몸은 이제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 가슴에 손을 올려보니 따뜻한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기만 하다. 그런 내 마음처럼 내 글도 따뜻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래나 저래나 글은 써졌고, 이 브런치북에 쓰인 흑색의 문장들은 그때의 나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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