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는, '정규화'된 삶을 바란 적이 있다
군주가 인자함 하나로 그 자리와 신민의 안보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만큼, 한 가지 예시와 제재로 본인의 머릿속에 있는 개념을 상대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생각 또한 환상이다. 그렇다면 필자로서 나는 뭘 해야 할까? 내게 그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 즉 그것이 누군가에겐 가능하다는 생각이 환상임을 이해하고, 미소 지으며 다른 예시를 준비하는 것일 테다.
이처럼 이번 글에서는 먼저, 내가 겪었던 일을 통해 이전 글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며 글의 맥락과 이해를 연결하겠다. 그 후, 「군주론」에 마키아벨리가 이미 자신에게 스며든 환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난 이 글에서 '환상 자체를 최소화하는 삶'이라는 주제를 꺼내보겠다.
「군주론」을 읽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군복무 중에, 그것도 분대장 임기 중에 있었다. 그중에 있었던 한 사건이, 「군주론」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환상과 실제'의 개념을 실제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회상으로 옮겨보겠다.
내 부대엔 어떤 상급자가 있었다. 그는 내가 근무했던 사무실 내에서 부서장으로 활동했고, '군대'의 모 부서장이라는 직책이 주는 이미지에 걸맞게 굉장히 엄격하고 깐깐했다.
어느 날, 내 분대원 중 누군가 (이하 후임) "OO장 (해당 상급자) 님은 성격이 상남자 같은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라는 식의 말을 했다. ...오만 트집 다 잡고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상남자'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말일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소위 말하는 '상남자'를 구현해 내는 핵심이었다.
후임이 언급한 '상남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고민해 보면, 그것은 적어도 대인배와 비슷한 의미에서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단순하게나마 정의해 본다면, 아마 무엇인가 아쉬운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재량으로 봐주고, 부서 바깥에서 구성원에 대해 갈굼이 들어오면 어느 정도 막아주는 사람일 것이다. 요컨대 부서 내에서의 예외 인정과 부서 외에서의 '쉴드'이다.
하지만 평소에 인상 좋게 행동하며 부서원에게 크게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아쉬운 일에 대해 자신의 재량으로 봐줄 수 있을까?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이다. 이런 일이 처음이거나, 애초에 봐주지 않는 일이 없거나. 전자라면 곧 후자로 바뀔 것이고, 곧 아무것도 재량으로 봐주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다른 이들이 모두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고, 인상 좋게 행동했던 부서장은 쉽게 거절하지 못할 것이기에.
타 부서에서 갈구는 것을 막아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매번 문제가 생기는 부서원을 어떻게 매번 쉴드쳐줄 수 있을까? 그것을 막으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자주 생기면 안 되고, 그러려면 평소에 내부를 철저하게 단속해야 한다.
그저 부서원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으면서 동시에 좋은 상사, 당시 내 후임이 사용한 용어 대로 '상남자' 같은 상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나는 이 일이 있기 전까지 꽤나 많이 힘들어했었다. 나는 분대장이었고, 흔히 말하는 악역을 맡았다. 실수를 잡아내고 즉석에서 피드백하며, 잘못을 상관에게 보고하고 그것이 큰 잘못이라면 경위를 상세히 진술하는 사람, 자신을 싫어할 이유를 만드는 사람. 뭐 군대가 아니라도 어느 조직에나 꼭 있는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내가 힘들어했던 이유는 단순히 분대원이 나를 꺼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고도 분대를 통제하는 좋은 방법이 있을 텐데 내가 무능해서 이렇게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주론」을 읽으며 내 생각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내가 유능했더라면 후임들에게 크게 뭐라고 하지 않고도 분대장의 책임을 완전히 다 할 수 있으며, 모두가 좋아하는 좋은 분대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환상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몇 주 지나지 않아 다른 분대장이 생기며 악역이 위임되어 이후 난 큰 간섭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지만, 이는 내게 큰 배움이었다.
나는 이렇게 「군주론」을 읽었고, 환상과 실제의 개념을 비로소 이해하고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내 안에 단단하게 굳어져 있음에도 인지조차 못하던 하나의 환상을 발견해 낸 후, 다른 이들이 환상이라고 지적해 준 부분에 대해서도 '그것이 환상이었구나, 그것이 이렇게 내게 고통을 주고 있었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 우리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통찰을 만날 때면, 으레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마련이다. 조그만 배움을 확대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다. 그에 대해, 난 이때 얻은 생각들을 기반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보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환상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무엇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상인지 알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어렵다. 앞선 글에서, 현자들을 참모로 둔 군주들조차 자신의 이상적 군주상에 대한 크고 작은 환상을 가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신이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을 계속해서 상기하고, 그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관점에서 외부와 상호작용한다면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환상을 더 이상 가지지 않도록 환경을 마련하고 그렇게 의사결정해야 한다.
언젠가 나는 이렇게 환상을 최소화하는 삶을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단순히 환상을 최소화하는 데 자신의 모든 여력을 쏟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렇게 '환상을 최소화해야 하지만 그것에 모든 힘을 다 써야 하는 것은 또 아니다. 적당히 해야 한다.' 따위의 애매모호한 말은 내 인생의 지론이나 앞날의 지침으로써 뭔가 액션 플랜을 뽑아낼 수 있는 것으로 삼을 수 없기에, 난 이 생각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때 따로 공부하던 것이 기계학습이었다. 그래서 기계학습에 나오는 이론적 배경들을 이용해 나름대로 그것을 명확히 정의했는데, 그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래에 해설을 첨부했다.)
우리는 인생을 최적화하려는 사람을 자주 본다.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평가받는 길을 찾아가려는 사람을 자주 본다. 좋다. 그런 왕도는 존재할 거라 믿는다. 그러나 정신적 행복과 고통의 관점에서의 그 왕도와 사회적 명성과 성공의 관점에서의 그 왕도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에는 여러 길이 있고, 사람들이 엘리트 코스라 부르는 한 길만 우직하게 뚫는 것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환상을 키우고 잠재적 고통을 뿌리내리는 일 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최적화해야 한다는 발상은 좋으나, 우리들의 손실 함수(Loss Function)가 잘못 설정된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의 손실 함수에는 금전과 단순 쾌락에 관한 항 밖에는 없다. 나는 이 '환상'의 크기도 손실 함수에 항으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기계학습에서도 손실 함수는 데이터 손실(Data Loss)과 정규화 손실(Regularization Loss)의 합으로 표현되지 않던가. 정규화, 그렇다. 우리의 삶에는 정규화가 필요한 것이다.
<해설>
기계학습은 '특정한 문제의 해결 방법(이하 해결법)을 부분적인 데이터를 이용해 기계(=컴퓨터)가 스스로 개선하는 것'이라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데, 손실 함수에는 기계가 해결법을 개선할 때 고려할 것들이 담겨 있고, 기계는 이를 이용해, 손실 함수의 값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해결법을 개선해 나간다.
여기에서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우리가 손실 함수를 정의할 때, 개선 대상인 해결법이 문제를 얼마나 잘/못 풀었는지 뿐만 아니라, 이 해결법 자체가 얼마나 단순한지를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해결법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기계가 자신에게 주어진 부분적인 데이터에 과몰입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환상의 기계학습적 은유'이다. 기계가 자신에게 주어진 부분적인 데이터에 과몰입해 있다는 것은 곧 자신이 정말로 해결해야 할 일반적인 문제를 풀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자기 스스로 주변 상황과 문제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고, 인간의 환상도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기계학습에서 정규화(손실 함수에 '해결법'이 얼마나 단순한지를 포함하는 것)로 이 문제를 해결하듯, 우리 삶도 일종의 정규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었다고 느꼈고, 이 사실 자체에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내게 닥쳐오는 많은 시련에, 많은 상황에 이를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현듯, 나는 진부하게도 공허해졌다. 공허 다음은 짙은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은 인간관계 안에서의 외로움과는 달랐고, 흔히 말하는 군중 속의 고독과도 달랐다.
교실에서 무엇인가를 이해한 사람들의 기립을 요구받았는데 그렇게 일어난 사람이 나 혼자라면, 이해했다는 나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나는 외로움을 느끼고, 얼마 안 가 스스로를 의심하며, 결국엔 주장을 번복하고 다시 착석하기에 이르는 것이었다. 나는 안다고 말했지만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모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한 때 인생을 전부 깨달았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던 사람들과 같은 후일담을 말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살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