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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 여긴 어디

미국 대학 수업 적응하기

by 남선우

나는 걱정과 불안이 많은 성격이다. 백업플랜이 꼭 있어야 하고 준비 없이 시작하는 것을 싫어한다. 초등학생 때 영어권 사람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몇 번 있기는 했지만, 영어 유치원이나 국제학교 출신도 아니고, 어학연수나 해외생활 경험도 없는 내가 미국 대학교 수업을 들으려니 긴장이 엄청 되었다. 듣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말하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 첫날 자기소개는 미리 대본을 써보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준비했는데 첫 수업에서 ‘What’s your pronouns?’이라고 질문을 받으니 말문이 막혔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번역하면 ‘너의 대명사가 무엇이니?’인데 무슨 뜻인지 유추가 안 됐다. 솔직히 처음 화상 수업에서 들었을 때는 무슨 단어인지도 안 들렸다. 대명사라는 뜻의 그 단어일 거라고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다행히도 다른 친구가 먼저 대답해서 맥락 상 성정체성(?)을 물어본다는 것을 알았다. 인칭대명사 he/she/they 중에서 무엇을 사용하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위의 경우는 귀여운 수준이었고 역시나 언어가 초반에는 최대 난관이었다. 대학교 수업을 영어로 듣는 것은 몇 명의 외국인과의 사적인 대화나 영어 영화 감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1학년은 미술사와 영어 수업을 제외하고는 전부 실기였지만, 실기 수업에서도 읽기와 듣기 자료가 나갔다. 글이야 모르는 단어는 검색하면 되는데, 자막도 뜨지 않는 시청각 자료는 기절할 맛이었다.


어렸을 때 듣기 연습을 했던 방법으로 한 덩어리씩 끊어 듣고 받아 적기를 해야 했다. 안 들리면 들릴 때까지 그 부분만 계속 돌려 들었다. 정말 울고 싶었다. 이 과제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해서 대체 언제 다 끝내느냐고. 그래서 각 과제에 할당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하고 과제 양을 그것으로 나눠 일일 공부 몫을 구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훈련해 온 매일 계획표 세우기와 집중 듣고 받아쓰기가 여기에 쓰이게 될 줄이야...


입학하기 전, 운이 좋게도 학교 선배를 한국에서 만날 기회가 있어 밥 한 끼를 같이 했다. 다른 조언은 지금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이 있다. 뉴욕에 가면 생각보다 사람들이 비영어권 유학생들을 우쭈쭈(?)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미국인들 참 거만하고 참 걱정된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실제로 경험해 보니 그 선배 설명과는 조금 달랐다. 우쭈쭈 해주지 않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거만함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이상한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한국인들은 발음이 이상할까, 문법이 틀릴까, 표현이 틀릴까 자꾸 자기 검열하느라 말을 못 하는 경향이 있는데, 막상 원어민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문화 국가에서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언어적 곤경 외에도 유학 생활 중 겪은 고난들은 아무리 커 보여도 작게 쪼개서 보면 답이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사실을 더 어렸을 때는 모르고 큰 산이 보이면 앞에 앉아 우느라 바빴던 것 같다. 산의 지형을 파악하고 길을 찾아나갔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시작이 두려웠다. 울 시간에 첫 발을 내딛였으면 종국에는 그 거대하던 산이 내 발 밑에 있는 경관을 봤을 텐데.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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