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화요일 오후였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소나기려니 생각했는데,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회색 벨벳 커튼처럼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장마란 참 이상한 계절이다.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의 틈새에 끼어 있는 축축한 괄호 같은 존재. 매일 아침 우산을 챙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애매한 날들의 연속.
오늘 아침, 커피를 끓이며 창문 너머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봤다. 물방울들이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열두 살 때의 여름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끊임없이 비가 내렸었다. 어머니는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셨고, 나는 방 안에서 만화책을 읽으며 빗소리를 BGM 삼아 오후를 보냈다.
장마 기간의 빗소리는 다른 계절의 비와는 확실히 다르다. 봄비는 부드럽고, 가을비는 쓸쓸하다면, 장마비는 끈질기다. 마치 무언가를 씻어내려는 듯한, 아니면 세상을 다시 만들어보려는 듯한 집요함이 있다.
집 앞 골목의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평소 같으면 담벼락 위에서 느긋하게 털을 핥고 있을 텐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어딘가 따뜻하고 마른 곳에서, 나처럼 이 긴 비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책상 위의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흘러나온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 선율이 빗소리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이런 날엔 왜인지 모르게 혼자 있는 것이 좋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안심감, 그리고 어디로도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장마는 시간을 다르게 흐르게 만든다. 평소보다 느리고, 더 깊이 있게. 마치 물속에서 걷는 것처럼, 모든 것이 조금씩 늘어진다. 생각도, 움직임도, 심지어 숨쉬는 것조차.
창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언제 그칠지 알 수 없는 비. 하지만 그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때로는 이런 축축하고 애매한 시간들이 필요한 법이니까. 무언가를 정리하고,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는.
나는 커피 잔을 다시 채우고, 책상으로 돌아간다. 오늘도 빗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낼 예정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