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었다. 정확히는 9월 둘째 주 금요일. 나는 혼자 지리산 중산리에 서 있었다.
오스프리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65리터. 텐트, 침낭, 버너, 동결건조 식량 세 끼분. 모든 게 계산되어 있었다. 혼자 하는 백패킹은 그래야 한다. 계산하지 않으면 산이 가르쳐준다. 때로는 너무 혹독하게.
첫날은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 8시간. 발톱 두 개가 까맣게 변했다. 등산 부츠가 새 것이어서 그랬다. 아니면 내 발이 도시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랬거나. 장터목 대피소에서 만난 아저씨가 말했다.
"혼자 오셨네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설명하기 싫었다.
왜 서른 쯤 남자가 9월 말 산에 혼자 왔는지.
밤에 텐트 안에서 누워 있었다. 지리산은 의외로 인터넷이 잘 터졌다. 애플 뮤직으로 음악을 들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멜로디. 산 속에서 듣는 음악은 도시와 달랐다. 더 선명하거나, 아니면 더 필요했거나.
별이 많았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 하지만 그게 뭐 대단한가. 별은 원래 거기 있었고, 내가 안 보고 살았을 뿐이다. 침낭 속에서 생각했다. 이렇게 살 수도 있겠다고. 주말마다 산에 오고, 평일엔 돈을 벌고.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고, 더 높은 산을 찾아가고. 나쁘지 않은 삶이다.
둘째 날, 하산 길에 들렀다. 산 중간쯤에 자리 잡은 할머니 식당. 몇 년 전에도 왔던 곳이었다. 작은 텃밭이 보였다. 할머니는 여전히 건강해 보이셨다. 된장찌개와 나물 반찬들. 산에서 내려온 배고픔에는 이런 소박한 음식이 최고다.
하산하면서 결심했다. 더 좋은 텐트를 사야겠다고. MSR 허바허바인지 뭔지, 아무튼 그램 단위로 무게를 줄인 그런 것. 그리고 겨울 백패킹도 도전해봐야겠다고. 동계 장비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작성했다.
일주일 후, 그녀를 만났다.
회사 동료의 소개였다. 별 기대 없이 나갔다. 그녀는 진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진주요? 네, 진주요. 남강이 있는. 진주 냉명이 유명한.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등산 좋아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네, 가끔요." 일주일 전 지리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다.
대신 우리는 음악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가수, 내가 산에서 들었던 노래들. 음식 이야기도 했다.
진주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아직 잘 모르는 도시였으니까.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가 말했다. "진주 구경시켜드릴까요?"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그녀의 친구가 진주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다. 현재 내 와이프가 될 그녀의 친구. "같이 갈까요?" 내가 물었다. "제 차로요."
간식을 준비했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내 차에서 함께 그녀가 퇴근 후 진주로 향했다. 고속도로에서 다시 음악을 틀었다. 이번에는 스피커로. 함께 듣는 음악은 혼자 듣는 것과 또 달랐다.
결혼식 후, 진주 걸었다. 지금의 와이프의 가족을 뵈러 갔다. 식당을 하셔서 거하게 초대 받은 느낌이다.
그냥 우린 인사만 하고 갈 생각이였지만, 사뭇 진지한 이야기로 나를 경계하듯이 보고 계셨고, 다들 처음보는 외지인에 대해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많이 긴장한듯 보였다.
촉석루에서 남강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축제 하면 정말 예뻐."
"언제?"
"10월에요. 이미 끝났네?"
"내년에 같이 와 보자."
내년. 내가 먼저 말했다. 자연스럽게. 마치 내년에도 우리가 함께일 거라는 걸 아는 것처럼.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당근마켓을 켰다. 오스프리 배낭, 65리터, 3회 사용, 상태 최상. 30분 만에 팔렸다. MSR 텐트도 올렸다. 침낭도, 버너도, 살로몬 등산화도. 전부 다.
산 장비를 파는 건 쉬웠다. 놀라울 정도로. 마치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다시 진주를 찾았을땐 약혼반지가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있었다. 반지가 반짝였다. 아니면 내 눈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거나.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 9월에 지리산에 가지 않았다면. 더 좋은 텐트를 샀다면. 겨울 백패킹을 시작했다면. 그랬다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
모르겠다. 알 수도 없다.
다만 이것만은 안다. 진주 멀지만 그녀에게 추억이 있는 곳이라는 것. 남강의 가을 바람은 지리산만큼 시원하다는 것. 그리고 어떤 산은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려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
지금 우리는 서울에 살고 있다.
아이와 함께.
등산 장비는 이제 없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오를 산은 이미 정해졌으니까.
매일 아침 가족과 함께 오르는, 일상이라는 산.
정상은 없지만 길을 잃을 일도 없는, 그런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