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해석하자면 '해설집' 정도가 되겠다. 그 시절 LP나 CD를 사면, 부클릿과 더불어 라이너 노트가 꼭 있었다. 그것은 부클릿에 면을 추가하여 인쇄되거나, 아주 얇은 재질의 종이의 삽입지로 포함되기 일쑤였다. 관련 분야의 전문가 혹은 평론가가 정식 발매 전 앨범을 먼저 듣고 여러 정보와 주관적 견해를 담은 정보지였는데. 이를 얼마나 많이 소화하느냐가 실력의 척도로 언급되기도 했다.
장르별로 유명한 평론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장르별로 유명한 레이블이 있었다. 직수입반이 거의 없던 시절. 마스터 앨범을 들여와 복제를 거듭했는데 이 과정에서 음질의 다운은 물론이거니와 부클릿 재질의 품질 저하도 빈번히 일어났다. 엄밀히 말하면 그 차이를 우리 귀가 가늠할 수준은 안됐었겠지만, 느낌적인 느낌으로 국내반보다 직수입 해외판을 더 손꼽던 시절도 있었던 것을 보면, 여전히 그 시절 시스템의 부재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열곡 남짓의 수록곡 중 단 한 곡의 제목 때문에 금지 앨범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당했었다. 빽판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도깨비시장과 세운 상가를 드나들었다. 말 그대로 앨범 한 장 손에 쥐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계절을 송두리째 그 한 장의 앨범과 보냈다. '그땐 그랬지' 감성일 따름이지만, 음악 한 곡, 앨범 한 장의 소중함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손에 쥔 앨범. 아끼고 아낀 용돈으로 구매한 앨범에 삽입된 라이너 노트는 절대적인 기준이 됐었다. 나보다 먼저 그 음악을 들었고, 나보다 더 많이 고민한 전문가의 견해는 굳이 거스를 필요가 없었다.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보의 통로가 협소하고 빈약했던 시절의 굵직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외워두고 싶을 만큼 매력 있었다. 반복해서 앨범을 듣고, 라이너 노트의 글귀들을 읽어가며 연주를 감상했다.
인연이 반복되고 거듭하여 라디오 애청자 모임에서 활동하면서 DJ가 활동한 라이너 노트 모듬집을 책자 형태로 발간하고 약소하게나마 참여하면서 다시 한번 '라이너 노트'라는 나름의 콘텐츠에 대해서 경험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음악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던 내게 거대한 산이었고, 영화 별점과 더불어 라이너 노트야말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잡지나 매체에 기고하는 글과는 달리 오랫동안 앨범과 함께 화석처럼 남게 되는 박제의 형태로 인식되었다.
우연이 이어지자 어느 날 내게 꿈만 같던 라이너 노트의 집필 기회가 주어졌다. 하물며 그 앨범은 10년 넘도록 좋아하고 즐기던 그 밴드의 7번째 앨범이었다. 무게감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앨범 발매일이 정해진 일정이라 원고 제출일도 정확하게 약속되었다. 공 CD에 네임펜으로 끼적인 타이틀이 선명했다. 3주라는 시간. 7개의 트랙. 레이블에서 나를 '콕' 집은 입장이라 거부할 수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 졸필일 테지만 죽기 전에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리라 감히 확신했다.
듣고 또 들었다. 방법이 없었다. 구글을 통해 관련 정보를 얻었고, 짧은 영어 실력에 번역을 거듭했다. 악몽은 당연했다. 마감을 1주 남겨뒀으나 작성한 원고는 A4 기준 반쪽도 안됐다. 두 번 정도 토악질도 했다. 그간 내가 본 라이너 노트의 기본적인 분량이란 게 있었는데, 난 겨우 그 5분의 1도 안되는 수준의 원고를, 그것도 정리되지 않은 자음과 모음의 엉거주춤을 만들어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결국 밤샘과 과음의 혼돈 속에 원고는 마무리했고 약속된 날짜에 맞춰 원고를 제출했다. 그 누구에게도 라이너 노트의 주인공이 나란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앨범 발매 이후 약소한 격려와 충고 그리고 조언을 듣는 것으로 부끄러운 졸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한 시간 남짓 되는 음반 한 장의 라이너 노트가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다시는 (원고료의 수준과 상관없이) 절대 수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다행히도 두 번째 기회는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뒤, 기획과 운영 등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참여하고 땀 흘린 작은 소극장 공연의 라이브 앨범의 라이너 노트에 엉거주춤 이름을 올렸다. 원래 해당 원고를 쓰고자 했던 담당자가 있었으나, 공연 실황 리뷰를 그대로 싣는 것도 참신할 것 같다고 의견을 주어 고민 없이 수락했다. 여전히 졸필이었다.
이후 영화의 개봉과 함께 볼 수 있는 다섯 개의 별점과 한 줄의 평론에 대해서 쉽게 생각했던 습관들이 모두 바뀌게 되었다. 취향에 맞든 아니든 제3자에게 전할 때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뭐든 결코 가볍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토록 어렵고 힘든 일은 없다고 지금도 여전히 감히 생각하는 바이다. 세상 모든 예술은 취향의 차이지, 좋고 나쁨이 없다.
분명한 건, 애호가의 입장에서 읽는 것과 애호가들에게 들려주는 입장은 하늘과 땅 차이란 것. 아티스트가 몇 달 몇 년에 걸쳐 만든 앨범이 어쩌면 내가 쓴 라이너 노트에 따라 흥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무게감. 그만큼의 원고료와 이름값을 조건으로 감당한 내 책임의 전부가 그 중량에 고스란히 녹아든다.
읽는 자와 쓰는 자의 온도차.
애송이라 경험하는 온도차.
아티스트의 노력의 결과물을 한 장의 지면에 담아야 하는 책임감.
라이어 노트에 담겨있는 온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