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가면 한두 장 책을 읽을 순 있지만, 음반 매장을 가서 해당 음반을 들어보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땐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CD에 한하여 청음기가 음반 매장에 구비되어 있었다. 이제는 놀러 갈 음반 매장 자체가 거의 없음이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뭐 어떤가. 추억이라도 곱씹으며 버텨야지 않겠는가.
인생 최초의 음반 매장은 동네에 있던 보리수 레코드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매장은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만 봐도 배가 불렀다. 그곳에서는 공테이프를 많이 샀었다. 정규 앨범을 살 만큼 용돈이란 게 없던 시절이었다. 공테이프 120분짜리 하나를 사면 몇 달을 갖고 놀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음악을 실컷 녹음하고 듣고 또 들었다. 녹음 타이밍을 잘못 맞춰서 기존 노래의 중간쯤이 끊기고 다른 노래가 새로 시작하면 정말 엄청난 자괴감이 밀려왔다.
교복을 입으면서부터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황학동 도깨비시장에 빽판을 구경했고, 세운 상가를 거쳐 남대문과 종로 광화문, 신혼 홍대 등으로 다녔다. 동네마다 특색이 있었다. 냄새도 분위기도 귓가를 적시는 음악의 장르도 모두 달랐다. 형편상 한 달에 한 장 앨범 사는 게 최선이었다. 시작은 카세트테이프였고 이후 잠시 LP를 거쳐 CD에 안착했다.
대형 서점에 있던 음반 매장도 종종 들렀지만, 독립된 매장의 매력을 따라올 수 없었다. 신 나라 레코드와 타워 레코드가 종로에 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뮤직랜드만큼은 선명하다. 시사영어사 건물 지하에 있었던 뮤직랜드는 내게 있어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앨범들, 청음 시설, 널찍한 실내 공간, 무엇보다 아무리 오래 있어도 얼마든지 좋았다.
뮤직랜드를 나와 종로 3가로 향하면 음미사가 있었다. 의료기기를 취급하는 곳에 생뚱맞게 있던 그곳은 여러 의미에서 내게 고마운 매장이었다. 좁기는 무지 좁았다. 알바 형과는 너무 잘 알고 지내서 궁금해하던 음반이 있으면 비닐 커버를 바로 뜯어 듣게도 해주었다. 고딕 메탈을 비롯하여 익스트림 장르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구입했다. 오죽하면 폐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끼고 아낀 돈을 챙겨가 내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무려 32만 원어치 음반을 사기도 했다. 나름의 보답이었다.
음미사를 시작으로 세일 음향과 서울 레코드가 세운 상가까지 이어졌다. 신촌의 향뮤직과 목마 레코드, 홍대의 미화당과 창고 뮤직, 명동의 부루의 뜨락 등이 떠오른다. 이 밖에도 여러 매장들이 있었다. 명동 미도파에 있던 파워 스테이션도 갑자기 생각났다! 백화점 지하 1층에 음반 매장이라니! 어디서든 놀면 무조건 그 근처 음반 매장을 찾아 들쑤셨다. 사진 않아도 구경은 공짜니까, 그 마음으로 실컷 음악을 누렸다.
앞서 얘기한 거의 모든 음반 매장은 지금 없다. 시대가 바뀌고 소비 패턴이 달라지니 그게 맞다. 더욱이 앨범을 사지 않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현실에서 음반 매장이 버틸 수 있는 자양분은 생각만큼 굳건하지 못하다. OTT 서비스가 있어도 극장이 운영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꼬집을 이야기가 많아 그건 따로 풀어야겠다.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와 CD, 그리고 LP로 음악을 듣는다. 비록 취향의 스펙트럼은 20대에 머물러 있어 새로 구매하는 앨범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가끔 반가운 신보 소식이 들리면 예약 구매하고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 앨범은 그때 어디서 샀었지. 이거 사는 날 헌혈했었지. 앨범마다 고유의 추억들이 서려있다.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