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싸고 좋은 건 없다. 좋은 건 비싸고, 싼 건 좋은 것보단 확실히 품질이 떨어진다. 하지만, 싸고 좋은 게 전혀 없진 않다. 있긴 있는데 그건 바로 중고제품이다. 누군가 쓰고 필요가 없어져 팔면, 또 누군가 필요해서 그걸 산다. 제품의 종류에 따라 중고에 대한 가치는 각기 달라진다. 유독 중고 제품이라 해서 새것과 큰 차이가 없는 몇 개의 제품 중 하나를 꼽자면 그것은 바로 책이다.
밑줄 긋고, 접고, 찢고, 커피나 김치 국물에 젖지만 않았다면 중고 책은 새것과 다를 바 없다. 제본 부분, 표지 등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주 약간의 헐거움과 생활 흔적을 제한다면 그 안에 빽빽하게 포개진 책의 결은 언제나 신선한 새것과 같다. 더욱이 책이란 오래전에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웬만해선 유행이나 시류를 크게 타지 않기 때문에 언제 읽더라도 늘 새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설령 그것이 고전이라 할지라도, 고전만큼은 영원불멸하기에 의심할 바 없다.
동네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황학동과 동대문 헌책방이 있었다. 책을 펼치기가 무섭게 살 건지 아닐지를 묻는, 그래서 너무 장사꾼 냄새가 심하게 났었다. 어린 내가 그리 느낄 정도니 굳이 억지로 갈 필요 있을까. 반면 집에서 가까운 곳에 헌책방이 딱 하나 있었다. 허름해도 그렇게 허름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다 무너져가는 꼴이었다. 좁기는 또 어찌나 좁았던가. 청소가 깨끗이 될 리 없었다. 늘 문이 열려 있었다. 나이가 엄청 많은 할아버지가 수시로 헌책방에 있거나 또 없었다.
헌책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코가 찡긋거렸다. 그 눅눅한 종이 냄새! 제습에 신경 쓰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지금도 눈 감고 떠올려보면 금방 그 냄새가 피어오를 정도다. 종이 냄새는 때때로 너무 향긋하나 가끔은 너무 퀴퀴해서 비린내에 가깝기도 하다. 책도 엄청 많았다. 바닥과 천장까지 책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어린 내가 걸을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어떤 주제로 정리될리 없었다. 온갖 종류의 책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정리정돈 전혀 안된, 그야말로 장사할 마음이라곤 내가 보기에도 느껴지지 않는 헌책방이었다. 그곳을 가끔 가면 아무 책이나 손에 들고 읽었다. 대부분 오래된 책이라 인쇄 품질도 낮았고, 책의 보존 상태도 엉망이었다. 그냥 읽었다. 그 와중에 글자보다 그림이 많은 책을 찾기도 했다. 아주 가끔 어린 내가 읽으면 안 될 책을 발견하면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할아버지는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드나든 헌책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마땅히 살 책도 없었지만 괜히 그러고 싶은 날에는 찾아가곤 했다. 할아버지가 있던 자리엔 할머니가 있었다. 책방 안은 내가 그곳을 처음 갔던 그때와 눈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되려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헌책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멀쩡히 운영되는 줄 알았던 동네 서점들이 2~3년에 하나씩 사라지는 세월의 변화에 맞물려 헌책방도 어느 틈에 사라졌다. 작별의 시간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바쁜 일상이 미웠다. 어둡고 눅눅하고 먼지만 가득했던 공간의 기억이 다행히 아직 기억네 남아 있다. 그 많던 책들은 어디로 갔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좋은 곳으로 가셨으리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