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 2022년 40대
4학년 첫날. 고작 11살이었지만 그전과는 다른 설렘으로 잔뜩 부푼 기대로 가득 찬 하루였다.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나는 자아라는 것을 지각한 것으로 보였다. 여전히 키는 작아 교실 맨 앞줄에 앉고는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꽃을 한창 피우는 아침이었다.
잠시 뒤 교실 문이 열렸고 그 아이가 나타났다. 화기애애하던 교실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적막으로 바뀌었다. 처음 그 아이를 봤을 때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온몸에 퍼지는 경련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감을 나는 분명 느꼈다.
키는 나보다 약간 더 컸다. 왼쪽 다리를 많이 절룩거려서 어깨 높이는 늘 비스듬했다. 웅얼웅얼 조금도 쉬지 않고 이상한 소리를 냈고, 어디가 아픈지 늘 잔뜩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아빠로 보이는 아저씨가 곁에서 부축을 해주었는데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어렵게 교실에 들어와 인사도 없이 교실 맨 뒤 책상에 혼자 앉았다. 그날은 교실 뒷문으로 다니지 않았다.
경직된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다. 형남이 아빠는 학교 근처에서 쌀집을 운영했다. 배달할 때 쓰는 커다란 자전거 짐 싣는 곳에 형남이를 태우고 매일 아침 학교에 오셨다. 수업이 모두 끝나면 장사를 하던 중에 오시기 때문에 늘 허둥지둥 분주해 보였다. 당시 나는 우리 반에서 제일 먼저 등교를 했기 때문에 형남이가 학교 오는 모습을 거의 본 적 없었다.
다만, 수업이 끝나고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있었다. 3층 교실에서 2층까지 가는 일조차 형남이에겐 무척 큰일이었다. 그래도 수업시간에는 집중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던 형남이는 가끔 힘에 버거워 지칠 때면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고통으로 인해 자주 인상을 찡그렸지만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내지는 않았다. 고통이 사라지면 언제나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날도 형남이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교실에서 아저씨를 기다렸다. 혼자 두고 나올 수가 없어서 운동장에 가서 기다리자고 부축하면서 1층까지 함께 내려왔다. 그전까지 누군가를 부축해 본 적이 전혀 없던 나는 고작 두 개 층을 내려왔을 뿐인데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운동장에 도착하자 형남이 표정이 밝아졌다. 함께 뛰어놀면 더 좋았겠지만, 애먼 흙바닥에 먼지만 일으키며 시간을 보냈다.
조금 뒤 형남이 아빠가 오셨고 형남이는 마치 쌀 한 가마니가 되어 자전거에 실렸다. 자전거는 교문 밖으로 사라졌고, 형남이는 나를 보고 활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형남이의 등하교를 자주 도왔다. 5분 정도 걸리는 시간, 다른 학년들의 낯선 눈빛이 따가울 때도 있었지만 형남이는 우리 친구니까 전혀 부끄럽거나 귀찮지 않았다.
가끔 이유 없이 결석하거나 늦은 등교 혹은 조퇴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형남이는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다. 책을 읽는 속도는 느리고 발음은 부정확했어도 자리에서 일어나 몇 줄이라도 책을 읽을 땐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형남이의 모습을 오래 볼 수 없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남이가 떠나가고 말았다. 그날 형남이의 발작은 평소와 다른 격렬하고 몹시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온몸에 드러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부리나케 달려온 아저씨는 형남이와 오랜 시간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며 형남이를 데려갔다.
이후 한참 동안 형남이를 볼 수 없었다. 우리는 형남이가 왜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형남이에게 어떤 병이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선생님께서는 형남이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갈 수도 있다고 알려주셨다. 특수학교로 전학은 순전히 형남이 부모님의 의견이었다.
형남이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자 특수학교에서의 생활이 형남이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나머지반이라고 해서 정규수업 이후 학습 진도가 더딘 친구들이 1~2시간 더 공부하는 반으로의 배정도 검토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특수학교와 나머지 반 모두 형남이가 많이 싫어했다고 했다. 학급회의 시간에도 주제로 다뤘지만, 단 한 명도 형남이의 전학이나 나머지 반 배정을 찬성하는 친구는 없었다.
조금 불편했고 가끔 놀라는 일도 있었지만, 우리 모두는 형남이를 친구로서 무척 좋아했다. 내일이면 형남이가 등교하겠지... 하는 바람은 늘 품었다. 하지만, 형남이가 없는 학교생활이 차츰 더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바람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형남이는 결국 특수학교 전학을 결정했고 가을 운동회 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체육복을 입고 자전거에 앉은 채로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함께 공 굴리기, 줄다리기, 달리기도 하고 싶었을 형남이는 체육복을 입고 마음으로나마 함께 운동회에 참여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녹내장으로 오른쪽 눈에 시력이 전혀 없이 태어난 나 역시 장애인이다. 단 한 번도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적 없는 장애인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불편함이나 외형적으로 장애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따라서 차별이나 비교 혹은 불합리한 상황을 경험해 본 적 또한 거의 없었다.
내게 있어 형남이의 존재는 다른 친구가 형남이를 바라볼 때의 느낌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장애를 지닌 공통점이 있지만 학교에서의 생활과 공부, 운동회, 모든 일상에서의 차이점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형남이를 처음 마주한 날에 느꼈던 긴장은 본능적인 미안함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형남이를 동정하거나 측은하게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가끔 나를 골려 주려고 복도 반대편 계단으로도 올라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릴 때의 표정은 형남이를 추억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씨앗과도 같다.
그저 30년도 더 된 추억에서 형남이는 내 친구로 그곳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장애를 지닌 나와 내가 바라보는 친구의 장애 사이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준 친구. 어떤 고마움이나 미안함, 죄책감의 감정은 아니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괜히 웃음 짓게 하는 친구. 찡그린 미간이 사라지면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던 형남이.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웃는 모습으로 잘 살아가고 있길 바란다.
보고 싶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