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 2022년 40대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처자식을 둔 몸이라 더 참고 견뎌야 했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이 이어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사의 폭언과 신경질적인 인신공격을 이겨낼 방법은 없었다. 서둘러 제출한 사표라 이직 준비는 허술했다. 얼마간 아내의 따가운 눈치를 뒤로 맘에 드는 곳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작은 규모의 키즈 엔터테인먼트로 어린이 배우와 모델을 양성하고 있었다. 규모를 확장하는 시점에 합류, 챙겨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두 달 정도가 지나서야 제법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계획한 모든 것들이 일정에 맞춰 순항하고 있었다.
즈음하여 대표는 이쪽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부장을 외부에서 데려왔다. 이 바닥을 꿰뚫는 인물이라고 했다. 업무 열정은 넘쳤으나 융통성은 다소 부족한 편이라며 그를 소개했다. 첫 단추를 잘 꿰고 싶었는지 부장은 제법 바른 자세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렇게 보였다.
“실장님, 우리 어떻게 하죠...?”
3명의 여직원으로 구성된 CS팀 대리가 나를 찾아왔다. 너무 의아한 상황이라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부장이 합류한 지 한 달 정도 된 시점,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물며 그것은 멈추지 않고 점점 더 포악해지고 집요하게 이어져나갔다.
40대 중반으로 미혼이었던 부장은 애인도 있었다. CS팀과는 스무 살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삼촌뻘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희롱을 일삼는 예비 성 범죄자였다.
‘대리 네가 팀에서 제일 예쁘더라. 세컨드 할래?’
‘퇴근하고 뭐 하냐? 다 애인 없잖아. 같이 술 마시자’
‘넌 가슴이 크니까 가슴이 돋보이는 옷을 입고 출근해라’
처음엔 그냥 나이 많은 아저씨의 유치한 농담처럼 듣고 넘기려고 했었다고, 하지만 성희롱 발언이 수위를 점차 높여나갔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이어졌고 불필요한 스킨십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몸도 맘도 몹시 지친 팀원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나라고 뾰족한 수가 바로 떠오르진 않았다.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행동하기엔 조심스러운 사안이었다. 정확한 상황파악을 위해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며칠 뒤 이어진 카메라 테스트 시간. 4~9살 사이의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그전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던 부장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선입견일수도 있겠지만,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는 행동들에서 의심은 확신으로 굳었다. 남자아이들은 방치에 가깝게 멀리 두고 유독 여자 아이들에게 과한 스킨십을 자주 시도했다. 급기야 모든 여자 아이들을 번쩍 들어 품에 안기를 반복했다.
쏟아진 구정물을 닦아내야 했다. 부장과 면담을 준비했다. 질문과 예상 답변, 그에 대한 반박 논리들을 정리했다. 단 둘만의 자리에서 부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 같은 남자끼리 왜 이러냐면서 오히려 나를 포섭하려고도 했다.
그저 동생 같아서 챙겨주었을 뿐이라고도 했다. 사과는커녕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애들 얘기만 듣고 경력 많은 본인을 모함한다고 역정도 냈다. 추측과 의심이 전혀 배제된, 사실에 기반을 둔 정리된 자료를 내밀었다. 짧은 분량이지만 녹음된 내용도 언급했다. 부장의 성희롱에도 현명하게 대처하고 준비해 준 여직원들을 대신해 상황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면담으로 상황을 정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장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대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부장의 역할이 분명했기에 쉽게 그를 내치지 않았다. 긴 싸움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물며 면담 이후 부장의 성희롱 행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조직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더는 방치할 수 없었다. 최종 통보의 의미를 담아 부장의 행동수칙을 정리 통보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말. 그리고 이를 위반했을 경우에 대해서도 문서에 고지를 하였고 서명 또한 요구했다. 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그가 아니었다. 대표의 신임을 배경 삼아 사태의 심각성을 가볍게 폄하시키기 바빴다.
어린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키워주는 키즈 엔터의 현장에 부장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 그 어떤 사업을 추진해도 결국은 썩은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농담처럼 성희롱을 일삼는 사람이지만, 머지않아 성범죄를 저지를 예비 범죄자였다. 결단이 필요했다. 무리한 총대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해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지 않는 이상, 조직에 미래는 없다고 확신했다.
나와 부장 둘 중 한 명의 정리를 조건으로 대표에게 뜻을 전했다. 부장을 정리하지 못하면 내가 퇴사하고, 나를 잡겠다면 부장을 정리하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CS팀원 모두 나와 함께 뜻을 같이 할 것을 은근히 내비쳤다. 대표도 더 이상 관망할 수 없었다.
며칠 뒤 부장은 짐을 정리했다. 대표의 뜻을 전달받고 더는 발악하지 않았다. 그렇게 차분하게 사라지나 싶었으나, 이후 수차례 내게 전화를 걸어 협박에 가까운 폭언을 남발했다. 그럴수록 차분하게 대응했다.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법의 심판을 받게끔 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CS팀원들은 예전의 활력을 되찾았다.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불편하고 힘든 긴 터널을 잘 견뎌준 팀원들, 좋은 결과로 맺게 되어 그야말로 참 다행이었다.
다시 사표를 내야 할지도 몰랐다.
처자식을 둔 몸이라 더 참고 견뎌야 했겠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반복적으로 불합리한 상황들을 묵과할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