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NKET

오늘의 칭찬 I

by ROLLINGTEA

눈은 천천히 녹아갔다. 처음엔 아이들이 세운 눈사람이 쓰러졌다. 그 다음엔 헛간과 건물 주위 눈밭이 맥없이 스러졌다. 물러가는 눈의 군대 사이로 풀더미가 움트기 시작한다. 드문드문 남은 눈의 흔적도 이내 밭고랑 사이로 스며들고, 새로운 형상들이 생겨난다. 찔레와 잡풀을 내리누르던 눈이 사라지면서 숲을 마음껏 거닐기도 어려워졌다. 이젠 다 제각각이구나. 나무는 남쪽으로든북쪽으로든 넘어질 수 있지만 다른 데로 옮겨 가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가 불지 않는가를 살피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하고, 구름을 쳐다보다가는 거두지를 못한다. 눈 녹은 물이 홍수처럼 지붕에서 쏟아져 내려 제 스스로 도랑을 파고 자갈길을 지나 고속도로까지 넘쳐 흘러 웅덩이를 만들었다. 수업 후에 산책을 할 때면 여전히 겨울 부츠를 신어야 했다. 얼어붙은 눈 때문이 아니라, 질척한 땅을 지나기 위해. 남은 눈은 눈이 아니라 상처 딱지와도 같은 얼음덩어리일 뿐이었다.



차가운 겨울날도 이제 절정을 지나고 여전히 오늘의 아침이 내일의 낮보다 따뜻하기를 바라기엔 이르지만 입춘이라는 단어 하나로 사람들 마음속에 이미 봄에서 온 선선한 바람이 분다. 몇일 전 아침 라디오방송에서 가수 이현우씨는 오프닝 멘트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미세먼지낀 누런 하늘과 코끝이 찡할 정도로 추운 파란 하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뭘 고르시겠어요? 저는 둘 다 싫지만 그래도 고르라면 추운걸 고르겠습니다." 동감이다. 개인적으로 '무엇무엇 다운 것'을 좋아한다. 사람 다운사람, 물 다운 물, 커피 다운 커피, 책 다운 책. 물론 다양한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그건 오늘 생략하기로 한다. 하늘 다운 하늘을 보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다. 어릴 적 목련나무 위에 올라가서 하늘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항해하는 뱃사공의 꿈을 꾸곤 했는데, 하늘이라면 당연히 높아야 하고 넓어야 하며 깊이를 알 수 없어야 하니까.

그런데 하늘이 높다는 건 언제부터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봄의 하늘과 여름의 하늘, 가을의 하늘과 겨울의 하늘이 다르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게 생각하며 살고 있었던 걸까. 봄에는 화려한 꽃비가 떨어지고, 여름엔 지루한 소나기가, 가을엔 낙엽이, 겨울엔 눈송이가 떨어지는 계절의 하늘을 보며 나는 스스로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렇게 추운 날에 하늘은 왜 높게 보이는 걸까. 과학시간에 배웠던 원리로 설명하려 들지 말고, 그저 그러려니 끄덕일만 한 이유 없을까. 그건 아마도 하늘을 올려다 보는 일이 더 어려워지고, 그래서 올려다 볼 일이 더 줄어든 때문이 아닐까. 나는 무릇 하늘이라면 더 멀리, 더 높은 곳, 지금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 땅에서 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어릴적부터 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하늘을 항해하는 상상을 하며 저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으레 그렇듯이 나이가 들면서 의미는 조금씩 바뀌었다. 하늘이 곧 꿈과 상상의 바다 그 자체였다면, 평가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고 판단하는 필터가 뇌 속에 단단하게 박힌 이후부터 하늘은 일종의 심리적 도피처가 되었다. 보기 싫은 사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순간, 마음에 들지 않은 건물과 사물들의 망라 사이에서 조금만 고개들면 모두 눈 앞에서 사라지고 공허,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음을 설명하는 이 언어를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건 일종의 자기 최면과도 같은, 하지만 눈 뜨고 빠져드는 명상과 같았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은 아무래도 무더운 여름에는 잠시 수그러들 수밖에 없다. 너무 뜨거우면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도 없는데다가 눈도 아팠으니까. 대신에 가을에는 적당히 선명한 구름을 볼 수 있다. 겨울에는 하루 종일 하늘을 올려다봐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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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스티앙 비베스와 함께 세계 그래픽 노블 시장을 갈퀴질 하고 있는 젊은 작가군 중 한 명, 크레이그 톰슨의 『담요』를 칭찬하고자 한다. 온전한 픽션은 아니다. 최근 십 여년 간 꾸준하게 그래픽노블 시장에서 사랑받는 장르가 팩션faction이고 이 작품은 그 절정기에 출판되었다. 자신의 유년 시절에 적절한 이야기를 자르고 덧붙여 다듬는 이 팩션 작업은『쥐』나『페르세폴리스』최근에는『굿모닝 시리즈』등 굵직한 르포르타주 계열과 현 그래픽노블 시장을 삼등분하고 있다 보는 것이 좋다. 최근에 들어 그 기세가 많이 꺾이고 순수창작물에 더 많은 자리를 양보했지만 크레이그 톰슨은 자신의 출세작이기도 한 이 '팩션' 작품을 통해 업계에 큰 지분을 확보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이건 내 이야기야. 꾸며낸 게 아니라니까. 얼마나 슬프니? 그치? 이 대목에서 난 참 많이 아팠어. 그러니까 같이 울어주지 않을래?’라고 말하는 텍스트를 싫어한다. -활자와 비활자 모두 포함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칭찬하고자 하는 이유는 감정이란 솔직할수록 쉽게 다가오고, 그만큼 쉽게 와 닿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솔직함은 용기이고 대담함이며 동시에 감동이 될 수 있다.

자기 이야기를 하면 으레 사람들은 과잉된다. 조금의 살이 붙고, 어느 정도의 미화가 자연스럽다. 덮어 두고 나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허풍은 청자의 흥미를 돋우고, 이야기에 끝까지 귀 기울이도록 돕는다. 게다가 안 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사실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 과정에서 우리는 청자로서 어느 정도 사실 여부를 걸러서 듣게 된다. 자기 검열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니까. 또한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낱낱이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치 고백과 같은 일이 된다. 어쩌면 대단한 쪽팔림을 견뎌야만 할지도 모른다. 고백을 하기 위해 종교에 기대는 것 또한 인간이지 않은가. 주인공이자 작가인 크레이그는 누구나 지나온 어린 시절의 심리적 방황과 고민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했던 아이다. 결국엔 완벽한 신의 피조물이 되는 길보다 부족하고 숭고하지 못한 인간 나부랭이로 남길 선택하지만 개구지고 얄미운 꼬맹이 시절의 크레이그, 괴롭힘과 왕따를 당하는 크레이그, 아무 것도 얻을게 없던 겨울 성경캠프에서 만난 레이나와 사랑에 빠진 크레이그, 그리고 현재의 크레이그의 목소리를 차례로 들으며 우리는 그의 진솔한 자기고백에서 일종의 경건함을 느낀다.



blanket6.jpg 담요 속 여행


크레이그는 위스콘신 추운 시골 동네에 산다. 엄마, 아빠, 남동생 넷이서 지내는데 누구보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부모님 아래에서 아주 어릴적부터 하느님과 만나고 그를 바라보며 자랐다. 크레이그의 유년 시절을 지배하는 것은 죄책감과 유희가 빚어내는 아이러니였다. 서로 대비되는 두 가지 관념이 언제나 크레이그를 사로잡았다가 괴롭혔다 한다. 서로 장난도 많이 치지만 우애가 좋았던 두 꼬맹이 형제는 침대를 배로, 바닥을 망망대해로 상상하며 밤마다 모험을 즐겼다. 방안에 있는 인형들을 침대 위로 옮겨놓고는 거친 파도와 싸우고 때로는 상어밥이 되기도 하는 동료들을 안타까워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돛이 꺾이고 갑판이 부러질 위기가 되었을 때 형제는 가운데 공간이 비도록 담요를 동굴처럼 말아 그 속에 몸을 피했다. 그리곤 이내 잠이 들곤 했다. 그 아늑한 비밀의 공간, 휴식과 도피처, 아늑함과 위로의 세계에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크레이그와 그의 사랑하는 소녀 레이나가 함께 몸을 뉜다. 담요는 사랑에 빠져 레이나를 찾아 놀러온 크레이그에게 그녀가 손수 짜서 선물한 물건이다. 정성스레 천을 고르고, 기쁜 마음으로 한땀한땀 바느질을 하며 만든 그녀의 담요 속에서 둘은 사랑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들은 무엇을 피해서 이 담요로 도망쳤던 것일까.



97d9df42d4c810f147dc7c6b917b1cc9.png 담요 속 연인


어린 시절 학교에서 왕따였던 크레이그. 스쿨버스에서 종이에 낙서를 하고는 그대로 버리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몇 일 후 밤 엄마와 아빠는 크레이그를 조용히 불러 침대 맡에 앉힌다. 좌우로 자리잡은 엄마와 아빠의 무게감에 크레이그는 몸을 떤다. “크레이그 그 종이 뒷면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 “여자요... 홀딱 벗은 여자요...” 엄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심각한 자세를 취한다. 아빠가 말한다. “사람 몸은 아름다운 거지만, 그래선 안돼. 주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만드셨지만 죄 때문에 우리는 타락했어. 네가 이러면 우리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봤니?” “화나셨어요?” “아니. 슬퍼. 예수님은 마음이 어떠셨겠니?” 크레이그는 펑펑 운다. “그렇단다. 네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은 아파하셔.” 크레이스는 담요 안에 잠든 자신의 연인을 바라본다. 그녀는 뮤즈였고, 여신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다채로운 맛이 뒤섞인 팔레트와도 같았다. 그는 성경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이 잔으로 마시면...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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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레이나의 집에서 2주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한다. 그리고 둘은 이별한다. 크레이그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동안 그녀와 전화로 많은 얘기를 나누지만 먼 곳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을 하는 것이 힘들었던 레이나는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남긴다. 크레이그는 생각한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에 솔직해진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신에 대해서. 크레이그는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제자인 글라우콘에게 인간이 동굴 속에 사는 존재라고 상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이 어릴 때부터 갇힌 존재라는 것을. 동굴 벽을 향한 채 목과 발을 묶인 그들은 고개를 돌릴 수도 없다. 그들의 뒤편으로 사람들이 동물과 인간의 형상을 한 우상을 들고 지나간다. 그리고 통로 저편에는 동굴 속을 밝히는 불빛이 있다. 죄수의 눈으로 볼 때, 보이는 것은 벽에 비친 우상의 그림자들 뿐이다. 일종의 그림자 인형극 같은 것이지만 죄수들은 그것이 그림자라는 사실을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현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죄수를 놓아주고 주위를 둘러보게 하면 그는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던 진실을 허상으로 인정하는 대신 오히려 현실을 이단 취급할 것이다. 그 죄수를 동굴 밖 햇빛 아래로 끄집어내면 그는 그보다 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처음에는 눈이 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차차 신세계에 적응해가면서 그들은 익숙한 그림자들의 윤곽을 눈으로 쫓기 시작할테고, 그 뒤로 차츰 하늘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다만, 밤에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적응의 마지막 단계는 대낮에 하늘을 보는 것이다. 눈을 돌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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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는 비닐봉투에 둘둘 쌓아 골방에 넣어두었던 담요를 오랜만에 꺼내본다. 향기는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추억은 또렷하다. 그럼에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담요를 꺼내 몸을 덮는다. 그는 레이나가 담요를 만들던 장면을 상상한다. 그날 밤은 그 전날 밤보다 추웠고, 그녀가 준 담요는 어느 때보다 큰 위안이 되었다. 사라진 그녀의 향기 대신 크레이그는 어떤 향기를, 사라진 그녀의 온기 대신 크레이그는 어떤 온기를 느꼈던 것일까. 오늘의 칭찬. 크레이그 톰슨의『담요』였다.


p.s. 이 작품 안에서 크레이그는 참으로 많은 포옹을 한다. 가만히 껴안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크레이그에게 무엇이 진짜 담요였을런지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의 칭찬 I 끝


담요_표지.jpg #사진제공미메시스 #김미정편집자님감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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