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 주는 시간
“엄마, 나 몇 시에 태어났어?”
“개밥 주는 시간이었지.”
10시 반은 넘었고, 11시는 되지 않은 때였다.
엄마의 표현과는 달리,
부지런함 뒤에 우아한 여유가 스며드는 그때가
난 좋았다.
고양이를 피하는 나에게
굳이 고양이를 안겨주던 언니가 있다.
언니는 공룡책을 좋아했지만, 나는 가까이 가지 못했다.
평범한 그림책이었을지 몰라도
내 기억 속 티라노의 얼굴은
팝업북처럼 튀어나와 두려웠으니까.
언니가 전설의 고향을 틀면
나는 소리를 막으려 이불을 덮어쓰고
관심 없는 듯 잠든 척해야 했다.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자리에서
나 혼자만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무섭다고 말했다가,
다시 고양이가 품에 안기듯
더 큰 두려움이 돌아올까 겁이 났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정작 나는,
어린 시절의 나처럼 숨어 있었다.
“들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으로 버티는 법을 배웠다.
이유를 찾는 데서 멈추지 않으려 한다.
중요한 건, 그때 모두가 나처럼
무표정으로 버티는 방법을 선택했을 리는 없다는 사실이니까.
브런치에
이제는 말보다 글이라는 길을 통해
숨기던 나를 조금씩 꺼내고 있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의 과거 경험을 이제서라도
누군가 눈으로 읽어준다는 것이,
어떤 말보다 더 수용적이고
안전한 환경이 되어준다는 것을.
그때는 무표정으로 버티는 방법밖에 몰랐지만,
이제의 나는 다르다.
과거의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고,
그때 멈췄던 감정을 다시 느끼며,
조금씩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개밥 주는 시간 말고
나는 브런치 타임에 태어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