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일, 고단한 간병 속에서 발견한 사랑의 실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매일 소리 없는 지우개가 움직입니다. 어제는 당신이 아끼던 보라색 스카프를 낯설어하시더니, 오늘은 30년을 불러온 제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다 끝내 뱉지 못하셨습니다. ‘기억’이 빠져나간 자리는 거칠고 메마른 빈칸으로 남습니다. 그 빈칸을 마주할 때마다 며느리인 저의 마음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여백을 그대로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담아, 저만의 문장으로 그 자리를 꾹꾹 눌러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돌보는 기록이자, 동시에 나 자신을 지켜내는 의식입니다.
“누구... 더라?” 어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릴 때, 저는 서운함보다 먼저 펜을 듭니다. 작년 이맘때 베란다에서 함께 분갈이를 했던 화초 이야기, 처음 고부의 인연을 맺던 날 어머니가 건네주셨던 따뜻한 금가락지의 촉감 같은 것들을 기록합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희미해질 때, 저는 기록을 통해 ‘우리’를 다시 복원합니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제의 웃음은 이제 제 글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쉽니다. 비록 어머니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있지만, 제 노트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다정한 고부 사이로 머물러 있습니다.
간병은 결코 우아한 예술이 아닙니다.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하다 목이 쉬고, 밤새 뒤척이는 어머니의 기척에 잠을 설치는 날들이 일상이 됩니다. 몸이 고단해지면 마음에도 가시가 돋습니다. ‘왜 하필 나일까’라는 원망이 불쑥 고개를 들 때마다 저는 다시 문장을 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힘겨운 순간에 가장 눈부신 문장이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거친 손마디를 닦아드리며 느낀 생의 경외감, 정신이 맑은 찰나에 건네주신 “고맙다”는 그 한마디의 무게. 기록하지 않았다면 휘발되었을 그 찰나의 진심들이 모여 저를 버티게 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지워지는 기억은 슬프지만, 그 결핍 덕분에 역설적으로 삶의 소중함을 매일 새롭게 배웁니다.
어떤 이들은 묻습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잊으실 텐데, 무엇하러 그렇게 정성을 들이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기억은 사라져도 그 순간 우리가 나누었던 온기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것을요.
기억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이제 흉터 대신 꽃 같은 문장들이 피어납니다. 어머니의 세계가 점점 좁아질수록, 제 글의 세계는 그만큼 넓고 깊어집니다. 훗날 어머니가 모든 것을 지우고 아주 먼 길을 떠나시는 날, 제가 채워 넣은 이 문장들이 남겨진 이들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어머니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배웅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