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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May 27. 2024

어쩌다 꾸준함

1.


난 '어쩌다'라는 말을 두 가지 이유로 싫어한다. 


첫 번째 이유는 '어쩌다'라는 단어에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라는 의미가 있고, '나의 의지대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또는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무책임에 대한 욕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안'어쩌다 태어난 사람, '안'어쩌다 어른이 된 사람이 어디 있는가. 특히 어쩌다 임원, 어쩌다 사장 등 사회적으로 힘이 더 많은 사람들이 힘이 없는 사람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이런 표현을 하는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느낀다. 


두 번째 이유는 나 자신이 어디 내로라할 정도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표현이 무책임하다며, 괜히 혼자 스트레스받는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어쩌다'라는 단어가 싫다. 나는 왜 그냥 그러려니 하지 못 할까. 사람들은 그저 위로를 받고 싶을 뿐인데, 정말 무책임한 지 안 한지 알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어쩌다를 싫어할까. 왜 그렇게 모 났을까.


2.


난 '꾸준함'이라는 말을 두 가지 이유로 싫어한다.


첫 번째 이유는 '꾸준하다'는 무능력, 실패, 목표의 미달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꾸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능력이 있거나, 이미 성공했거나, 목표를 달성한 사람은 꾸준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성공, 실패 그런 걸 떠나서 '꾸준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고 의미 있다는 걸 알고, 특별히 타고난 사람을 제외한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꾸준히' 각자의 싸움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면서 굳이 '꾸준함은 실패를 전제로 한다'라는 생각을 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싫다.


3. 


난 2018년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블로그 등 글을 쓰기 시작한 건 2017년부터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온/오프라인에서 많은 글쓰기 동지들을 만났다. 글을 교환하고, 서로의 브런치나 블로그를 구독하고, 댓글을 달아주며 서로를 응원하고 다독여줬다. 며칠 전에 '어쩌다' 그 사람들의 브런치와 블로그를 쭈욱 둘러봤다. 그 많던 사람들 중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도, 책을 낸 사람들도, 구독자 수가 더 많은 사람들(글쓰기 관둔 지 오래됐는데 나보다 구독자가 더 많은 사람들..)도 더 이상 브런치나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지 않았다. 


난 '어쩌다 보니' 제일 '꾸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4.


왜 그 많던 사람들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을까. 그들은 브런치에서 얻고 싶었던 것, 또는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은 걸까. 아니면 그런 것들을 얻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떠났을까.   


난 애 아직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가. 원하는 게 이곳에 있는가. 아니, 애초에 내가 원하는 게 있는가. 


불현듯 같이 글쓰기를 시작해서, 서로 구독도 해주고 댓글도 달아주던 그 사람들보다 꾸준한 내 모습이 싫어졌다. 난 꾸준한 게 아니라 이곳에서 무엇이라도 하고 있다는 자위를 하고 있던 게 아닐까.


5. 


라는 생각을 하는 내가 싫다. 


왜 그냥 '우쮸쮸. 잘했어.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야. 8년 동안 끈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의미 있고 대단한 거야. 꼭 뭔가 이룰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너라는 사람의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라고 너 입으로 말했던 거잖아.'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주지 못하는 걸까. 


왜 굳이 '글을 쓴다고 할 때 사람들이 와~ 해주면 네가 뭐라도 되는 거 같니? 네가 쓴 글이 이 세상은 물론 네 인생을 바꾼 건 하나도 없어~ 네가 글 써서 돈을 벌었니, 자아실현을 했니.'라고 자학을 할까.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자'라는 억지결론을 내릴 생각은 없다. 내 생각이 어떠한들 난 앞으로도 글을 쓸 확률이 높다. 어떤 확신을 갖고 쓰기보다는 '난 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서 말이다. 


뭐 어쩌겠나. 내가 원해서 이런 성격을 갖게 된 것도 아닌데. 말 그대로 '어쩌다'다. 


4-1.


글이 올라온 지 오래된 것이지 그분들이 반드시 글쓰기를 관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간에 공백기가 있어도 완전히 관두지 않는 이상, 지금이든 내일이든 언제든 계속한다면 꾸준함은 이어진다. '꾸준하다'는 그 자체가 결과가 아니라 결과를 향한 과정을 표현하는 단어이지만, 포기하지만 않으면 과정이 어쨌든 꾸준하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결과론적인 단어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뜬금없지만, 다시 글을 쓰든 안 쓰든 모두 건강히, 안녕히, 행복히 잘 지내시길(쓰고 보니 억지결론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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