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감의 의학

2020년 광주인권공모전 기고글

by woohyunjeong

지난 겨울의 일이다. 살을 에는 바람 덕에 폐렴을 앓았다. 하필 설날 고향에 내려간 상황이 화근이었다. 완도는 병원이 적고 의료진 또한 열악하다. 더군다나 소수의 인원으로 운용되는 명절의 응급실은 아비규환이다. 귀가 베인 아이의 울음소리, 요통을 호소하며 앉지 못하는 할아버지, 장염에 걸린 소년의 고통이 차가운 병동에 스몄다.

이름 모를 사람이 아파하더라도 인간은 측은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숨조차 내쉬기 힘든 폐는 병동의 비명 따위야 상관없을 소음으로 들리게 만든다. 복도의 끝자락에서 대기 순번을 초조히 기다릴 때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속마음으로 생각했다.‘앞에 몇은 나보다 덜 아파 보이는데 먼저 진료를 받을 수는 없을까’라고 말이다.

미약한 약기운에 취한 선잠을 간호사가 깨웠다. 경찰 조사로 진료가 불가하여 이만 돌아가라는 것이다. 기다리다 지친 환자의 고성이 퍼졌다. 난처한 간호사 뒤로 응급실 속 한 의사의 등이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위중한 환자를 살리다 진료가 지연됐다는 것이다. 의사의 뒷모습은 환자를 살리지 못한 죄책감이 드러난 절망이었으리라.

다음날 아침 찾아간 병원은 눈의 띄게 밝았다. 순조로운 입원 수속을 밟고 누운 침상 너머로 뉴스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의료복지를 둘러싼 신년 정치기세싸움이었다. 각계 전문가의 말에 맞장구치는 주변 환자도 패널처럼 나뉘었다. 논쟁에 지쳐 통원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간호사는 의아한 듯 왜냐 물었고 ‘감사합니다.’라 되뇌었다.

‘사람은 건강하게 살아야한다’에 대한 반론은 적다. 반면 ‘국민의 삶을 위해 의료복지가 개선돼야한다’에는 반으로 나뉜다. 정치가 한정된 재화를 분배하는 선택의 문제라면 의학은 유한한 생명을 살리는 필연의 행위이다. 만약 복지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시 생명은 재화가 된다. 의학이 정치화되는 것이다.

건강은 삶의 필요조건이다. 누구든 쉽게 아프거나 어렵게 나아서는 아니 된다. 보장되지 못한 건강은 삶에 대한 위협과도 같다. 질병과 노화, 물리적 사고까지 재난은 예기치 않게 발생한다. 재난 영화의 주인공처럼 단 한사람만이 살아남지 않기 위해,‘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 인류가 연구한 것은 의학이다.

의학이 인류, 다시 말해 공동체와 사회를 위해 발전했다는 사실은 어원의 변화과정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지금의 ‘醫’(의)는 医(의원), 殳(지팡이), 酉(술)이라는 한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본래의 ‘毉’(의)는 酉(술) 대신 巫(무당)을 부수로 한다. 질병으로 인해 공동체에 생겨난 환자를 치료하는 역할을 무당이 맡았기 때문이다.

과거 원시공동체에서는 질병을 우리에게 가해진 신의 분노라 믿었다. 무당은 신과 환자의 중간에서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제의를 올렸다. 나의 고통이 아님에도 타인의 고통이 멈추길 바라는 믿음, 당시 무당의 믿음은 의학의 동기를 말해준다. 술의 복잡한 제조법은 약학의 시초가 되고 무당의 존재는 의학에서 사라졌지만 말이다.

인간은 자기보존 욕구가 강하다. 대기 순번을 기다리다 앞에 몇 환자의 고통이 자신보단 못하다고 생각하듯 욕구는 절망에 복종한다. 그러나 의학의 믿음 또한 강인하다. 타인의 고통을 멈추기 위한 의지는 인간의 욕구를 뛰어넘는다. 올해 겨울, 위중한 환자를 살리지 못한 의사의 뒷모습이 숭고한 믿음을 증언한다.

물론 믿음만으로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기술의 발전이 의학의 질을 높인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무지로 생명을 앗아가는 인재를 방지하고자 사회는 복잡한 의학의 전문화 과정은 지원한다. 의사 지망생은 젊음을 대가로 타인을 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는다. 청춘을 희생한 소명의식은 존중과 격려를 받기에 마땅하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과 더불어 의학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잡음이 인다. 사건은 일어난 후에야 자명해지듯 그동안 열악한 인프라 속에서 진료를 해오던 상처들이 곪은 것이다. 몇몇 의사가 모여 거리로 나왔다. 생명을 살리는데 조건이 붙어선 안 되므로 여건을 보장해달라는 외침은 우리 사회가 겸허히 듣고 성찰해야할 문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어딘가 꺼림직 하다. 공공의료를 위한 의료인 확충 방안에 지역출신 의사의 확대를 배제하자는 대목에서 확실해진다. 의료 기술만 의학의 덕목이라 칭송하며 지역과 중심부 의사의 구별 짓기가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생명을 볼모로 집단적 의료 거부를 자행한다. 의사 본인이 의학의 정치화에 앞장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진정 의학의 발전에 대한 고민이려면 지역과 중심부의 인프라 차이가 왜 심화되는지 논의되어야 한다. ‘누구에게 치료 받고 싶은가’라는 슬로건에는 은폐된 권위와 미묘한 엘리트주의가 도사린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생명을 살려야한다는 막중함보다 직에 대한 사회적 위신이 떨어짐을 염려하듯이 행동하여서다.

은퇴한 광주의 한 간호사는 코로나 의료 봉사 현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5‧18 때나 지금이나 사람을 살리는데 이유는 없다.” 복지와 교육 제도로 의료 기술의 간극은 커졌을지언정 여전히 그는 신념을 발산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료진의 잘못이 아님에도 아직까지 모두를 살리지 못한 죄책감을 떠안고 현장에 나오는 의료진이 아직 있다.

의학이 정치화될 수 있을 찰나는 단 한 순간이다. 대의 결정체인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방종하려 들 때 부조리한 결정에 맞서 누구나 살리려는 행위만이 의료의 정치적 투쟁일 수 있다. 과거 ‘毉’에서부터 내려오는 믿음이자, 타인의 고통에 대한 통감이요, 의료 기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의지이다.

진료를 거부한 채 거리로 나온 몇몇 의사의 한탄에는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절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참 같은 거짓이 매체에 나와 혼란을 조성한다. 생명을 가진 우리가 할 일은 의료의 정치화란 늪에 빠지기보다 등을 보인 의료진의 절망을 다독이며 나아가기이지 않을까. 왜 입원치료를 거부하냐는 그 간호사의 질문에 이제야 육성으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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