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과 성착취 이미지의 계보

by woohyunjeong

철학과 인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한 번쯤은 들었을 테다. 자연스레 ‘프로이트’가 뒤따르고 몇몇은 ‘최면술’을 떠올릴 것이다. 메타 담론으로 그의 이론이 남발되는 경향(mbti에 대한 관심까지도)을 감안하더라도 ‘인간’과 ‘나’에 대한 관심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탐구의 합목적성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 사이가 그렇다. 인간 정신에 대한 탐구는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근대의 경향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에 영향을 끼친 ‘샤르코’ 박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1887년의 회화 한 점을 들여다보자.


중앙에 서서 여성을 껴안고 있는 사람이 샤르코 박사이다. 그를 기점으로 왼편에 남성들이 여성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오른편에는 쓰러진 여성을 부축하려는 사람들이 보인다. 샤르코는 ‘간질’과 같은 발작에 관심이 있었다. 그 발작에는 일정한 패턴과 경향성이 있어 최면술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쓰러진 여성은 발작을 보이다 샤르코의 최면에 진정됐고, 위 그림은 ‘치료’를 보여주는 학회를 담았다.

환자가 발작을 일으켰고, 의사는 최면술로 치료를, 지역의 의사들은 다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공부를 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단어를 조금 수정해보자. ‘여성’이 발작을 일으켰고, ‘남성’은 최면술로 치료를 했고, 지역의 의사들은 다른 ‘여성’을 치료하기 위해 ‘관음’한다로 말이다.


샤르코는 ‘남성보다 결함을 가진 여성’이 발작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도시의 가난한 여성들을 모아 실험을 강행했다. 수많은 여성이 병동에 수감되어 특정 시간에 일렬로 섰다. ‘발작’의 증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그가 원하는 특정 포즈의 발작을 보여준다. 샤르코가 원하는 포즈를 보여준 여성은 좋은 대우를 받고, 그렇지 못한 여성은 침대에 묶여 죽어갔다. 왼편의 여성은 샤르코가 원하는 포즈를 보여주었고, 오른편의 여성은 선택받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속칭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여성 혐오 단어를 사용한다. ‘나이가 들어 제때 결혼하지 못하는 여성은 신체의 노화와 맞물려 스트레스가 많다’ 정도로 정의가 가능하다. ‘히스테리’의 어원은 자궁이고, 그 히스테리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샤르코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애초에 발작의 증상이 없었고 경제•사회•정치적 차별로 인해 병동에 들어가 샤르코가 마음에 들어하는 포즈를 취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발하는 ‘히스테릭’은 발견이 아니라 남성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샤르코의 이러한 만행은 ‘디디-위베르만’이라는 학자에 의해 철저히 까발려진다. 그러나 이미지는 무서울 정도로 전염이 빨라 자를 수 없다. 근대의 성착취 이미지는 퍼져나가 위와 같은 포즈를 취하게 만든다. 어떤 인간도 오르가슴과 같은 황홀경에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나’를 보이는 대상의 욕망 덩어리로 만드는 객체로 내려앉은 패티시슴이다. 혹자는 ‘자발적’으로 취한 것이라 반박할 수 있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남성중심사회의 성착취 또한 그랬으며 굳이 계보를 탐색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


위와 같은 포즈들은 현대의 영화, 포르노, 잡지, 애니메이션, 웹툰, 광고 등의 광범위한 방식으로 퍼져나간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미지가 사유를, 나아가 신체와 행동양식(포즈)까지 결정짓게 된다.



물론 이에 대항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또한 있다. 신디 셔먼. 보통의 포르노그래피와 다를 바 없어보이나 자신이 직접 포즈를 취해 혼자 작업함이 특징이다. '남성' 혹은 이런 포즈를 취하는 여성을 '에로틱'하다 믿는 여성들이 좋아하는 자세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기괴하다. 실제로 이런 포즈를 취하는 '여성'은 없다. 그러한 포즈들은 사회가 규정지은 '환상'과 '이미지'속에만 존재하는 망상이다. 내게 신디 셔먼의 고전적인 작품의 이미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포즈를 취했어요. 몸이 비정상적으로 어긋나고 불편한 모습이지요. 남자들은 이런 포즈를 좋아한다는데 현실에서 가능한 포즈인가요? 그걸 왜 현실의 제게 강요하는 것이지요"하고 말이다.


다시 처음의 회화로 돌아와 보자. 왼편의 남성들을 ‘N번방에 가담한 남성 시청자’, 샤르코 박사는 ‘N번방 운영자’들, 쓰러진 여성은 ‘피해자’들로 치환 가능하지 않은가. ‘샤르코 박사’와 'N번방의 박사‘는 자신이 원하는 포즈를 취할 때까지 여성에게 가학적인 포즈를 가하고 이미지를 남겼다.


망치로도, 멋들어진 글로도, 과학적인 방법으로도 ‘이미지’는 파괴할 수 없다. 이미지는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 결말을 대신하여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의 무의식을 구조화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계보를 뚫고 새로운 이미지를 상상해낼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여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던져야 할 필연적인 질문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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