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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Oct 30. 2020

처음.

나는 왜 그리고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유선경 작가님은 <어른들의 어휘력>에서 "모든 최초는 강렬하다. 강렬하기 때문에 '최초'가 됐을 것이다. 실제로 최초가 아닐지 모르는데 강렬함이 기억을 비끄러맨 덕에 최초가 되었다." 고 했다. 수많은 발명품이나 역사, 우리의 삶의 기억들도 강렬함이 자리한 것들만이 살아남아 최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 그 글을 연필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아주 오랜만에 연필로 몇 번의 글짓기를 하고 난 후 노트에 적은 문장도 "어릴 적 처음 연필을 쥐었을 때는 기억도 없으나 다시 처음 연필을 잡은 느낌은 강렬하게 남아있다"였다. 모든 최초가 강렬하듯 모두에게 처음, 그리고 처음 경험하는 것은 강렬하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글이 쓰고 싶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문장 몇 줄 끄적이고 나서도 마음에 들은 것은 꼭 가족들 앞에서 큰소리로 읽고는 하는데 영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무엇을 쓸까 몇 번을, 그리고 몇 개월은 망설인 것 같았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정말 태풍처럼 몰아쳤던 지난 10여 년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강렬하게 관통하는 첫 번째 성장통인 것 같아서 쓰고 싶어 졌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어디에다가 쓰는지였다.




나는 원래 쓰는 행위를 좋아했다. 쓰는 행위를 좋아한 것은 필기구를 사는 행위를 좋아했기 때문인데 사고 난 필기구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고 필사를 하던지, 그림을 그리던지, 손편지를 쓰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중에서도 손편지를 가장 좋아했다. 딱히 명필도 아니면서 굳이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를 편지지에 적어서 연애편지도 주고 부모님께도 드리고, 지금까지도 모든 가족들의 생일카드를 직접 손글씨로 적어서 준다. 펜으로 쓸 때는 글자가 틀리면 종이 자체를 바꿔야 하니 정말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정리해서 잘 적어야 한다는 것도 손편지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예의상 빈말이었는지 그런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내용에도 만족한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는데 꼭 글을 써보라는 조언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마침 하던 일을 정리하고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무엇을 해볼까 하다가 집안일을 했다. 당연히 서툴렀고 집안일은 나 같은 게으른 사람이 하기에는 매우 복잡하고 바쁜 일이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40년이나 해오셨던 전업주부라는 직업도 사실 전문직이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도대체 먹은 거에 비해 설거지 거리는 왜 그렇게 넘쳐나고, 빨래는 왜 그렇게 많아서 매일 돌려서 매일 널어야 하는 건지, 게다가 아이들은 왜 거실을 항상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지르는 건지, 그럼 대체 얘네들은 어디로 어떻게 다니는 건지. 온통 미스터리하고 내가 따라가기 힘든 벅찬 일이었다. 그나마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군필자답게 다 말린 빨랫감을 잘 개어놓는 것과 아이들 등원과 하원을 책임지는 것뿐이었다. 세 살 터울의 남매 아이들은 집에서 항상 싸우기 일쑤고 코로나 19로 등원까지 못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집에서 꿈같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되니 그동안 항상 출근하기 싫었는데 이제는 정말 출근하고 싶었다. 무기력하게 빈둥거리며 확찐자가 되어가는 나를 보며 답답해하던 아내가 "차라리 글이나 쓰던지!"라고 한 그 말이 여태껏 내가 들어본 글을 써보란 조언 중에 가장 강렬했고 그날부터 난 종이와 연필을 들고 생각나는 대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체 뭘 적어야 한다는 말이지? 에세이? 그런데 나는 그런 거는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에세이를 읽어보았더니 여전히 모르겠다. 그럼 소설을 써볼까? 소설도 별로 읽어 본 적도 없는데. 그래서 소설을 읽어 보았더니 추리는 머리가 좋아야겠고, 무협은 상상력이 좋아야겠으며 연애는 아내가 "그 소설에 나오는 그 여자 누구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보지 않고도 보는 것 같은, 맡지 않고도 그 냄새를 맡는 것 같으며, 만지지 않고도 만져지는 것 같은 표현력이 중요할 것 같았다. 그럼 자기 계발서? 아니 내가 뭐라고 누구한테 뭘 이러면 좋겠다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하지? 내가 해 놓은 게 뭐 있다고? 아 그래 내가 뭘 했지?


난 농부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축산인이었다.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하거나 설문조사 직업란에 늘 "농업인"이나 "축산인" 따위의 항목은 없기에 그나마 "기타"란이라도 있으면 감지덕지하면서 체크하던 게 도대체 몇 번이었던지.

그런데 그게 이야깃거리가 되나? 지금은 청년 농부도 많은데. 난 미국의 100년도 더 된 한 사립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돌아와서 오리농장을 운영했다. 그래서 그런 건 이야깃거리가 되나?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스마트팜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서 그냥 다 써보기로 했다.

마치, 무엇을 듣고 싶을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같은 느낌이랄까. 난 대학 졸업 후에 군입대를 했기 때문에 전역과 함께 취업을 했고, 해고와 함께 창업을 했으며 창업과 함께 결혼을 했고, 정확히 일 년 뒤 아빠가 되었다. 그렇게 6년, 또 농장 매각과 함께 코로나 19로 인해 전업 육아와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으니 아까 폭풍처럼 몰아쳤던 10년이란 바로 이런 삶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귀국했던 20대의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두 아이를 양쪽에 끌어안고 싸움을 뜯어말리며 그날그날 판사가 되어 첫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장난감 양보의 형량을 내리거나, 티라노사우르스가 되어 용감하고 장렬한 둘째의 파키케팔로사우르스 박치기 공격에 죽어 나자빠져야 하고, 출동 슈퍼윙스에서 재롬은 왜 시즌 3부터 말도 없이 하차하게 되었는지 아이들과 토론해야 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모든 뚱뚱함의 기준이 아빠가 되어버린 딸아이 때문에 아주 혹독한 다이어트까지 병행하느라 정말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서 하필 오리였는지, 인턴쉽과 오리농장 경영까지 8년의 사회생활에서의 에피소드와 느낀 점 그리고 만 6년의 결혼생활 그리고 만 5년의 육아 생활, 어떻게 보면 아직도 초짜에 이제 막 걸음마 떼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청년 농부의 이야기를 차차 써보려고 한다.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고 나면 도대체 걷는 법을 모른다. 그저 달려 나간다. 그래서 내 이야기도 그냥 달려 나갈지도 모른다. 너무 강렬해서 마치 청년 농부의 글쓰기는 내 이야기가 최초로 기억될지도 모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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