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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Jan 14. 2021

물보라를 일으켜!

아빠와 함께 부르는 노래.

미국에 살 때 생존을 위해 운전을 배웠다. 마트는 너무 멀었고 멀다 보니 한번 갈 때 많이 사야 했고, 그러다 보니 항상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했다. 어떻게 말해도 공부에 방해될까 요지부동이던 부모님은 "교회에서 찬양팀을 하려는데 교회가 너무 멀다." 한마디에 중고차를 사주셨다.


한번 타면 기본이 한 시간, 지루함을 달래 보려고, 향수병을 달래려고 한국 가요를 열심히 CD로 "구워서" 듣고 다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 나는 일부러 한 땀 한 땀 아니 한곡 한곡 정성스레 노래를 미리 듣기 한 후 신중하게 골라 mp3파일로 받아서 지금은 USB에 넣어서 차에 꽂아두고 다닌다. 나의 삶은 도시와 시골을 오가는 삶이라 한국에서도 한번 타면 최소 한 시간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물었다. "그냥 멜론 신곡이나 추천곡 스트리밍 하지 왜 귀찮게 매번 그렇게 열심히 받아?"


"스트리밍으로 그냥 들으려면 블루투스 연결해야 하고, 그러면 충전기도 꽂아야 하고, 또 전화 오면 노래가 끊기잖아. 애들 자거나 할 때 통화소리도 차 안에 크게 들리고. 그리고 추천곡이나 신곡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나 가수 곡도 포함되어있기도 하고."


그러던 중 작년 12월에 우연히 듣게 된 노래 한곡이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았다. 이미 2020년 4월 27일에 발매된 그룹 "오마이걸"의 NONSTOP앨범의 수록곡 "Dolphin." 발매된지 몇 개월이나 지난 데다가, 타이틀곡도 아니었던 노래를 듣게 된 것은 정말 지금 기억하려 해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우연이었다.


*제목 "물보라를 일으켜"도 노래 Dolphin의 가사 일부분이다.




사실 가사는 별로 없다. 대충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자면 자꾸 마음에 들어오는 녀석이 있는데 하필이면 꼭 내가 지각하거나 꾸미지도 못한 몰골일 때만 마주쳐가지고는 날 놀리는 듯, 내 마음을 흔들어 놓냐는듯 약간은 따지는 듯하다가. 마지막에 남자아이의 하트에 물보라가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남자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음에 격정이 일어나서 하염없이 폭죽이 터지듯 물보라가 일어난다는 내용이다.


"물보라를 일으켜"와 Da da da  da da da da da da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후크송이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그렇게 귀엽게 토라지는 듯한 투로 물보라를 일으키냐고 따지는지, 아주 잘 살린 후렴구 덕에 입에 착착 감기고 하루 종일 흥얼거리게 된다.


가사에 단순히 "지각이야"라는 표현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12월 말부터 아이들 기상송으로 틀어주었더니 차만 타면 "아빠, 물보라를 일으켜 틀어줘." 하며 노래를 찾는다. 그래도 사내아이라고 유난히 더 좋아하는 둘째 녀석 덕분에 지난 주말에는 본가에서 집으로 오는 한 시간 동안 차 안에 물보라가 일었다.




아내가 말했다. "애들이 뭘 안다고 이 노래를 이렇게 따라 하냐."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굉장히 잘 만든 노래야. 4살짜리 아기도 따라 부를 수 있는 단순한 가사의 반복, 아기들도 지루해 하지 않는 너무 강하지 않은 비트와 빠르기, 밝은 멜로디까지. 명곡은 아닐지 몰라도 인기곡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지."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찾아보니 작곡자가  Ryan S.JhunCeline SvanbackChloe LatimerJeppe LondonLauritz Christiansen 많기도 했다. 그중에서 첫 번째 이름, "라이언 전." 한국계 미국인 작곡가인데, 2009년 이효리와의 CM송 작업부터 시작해서 국내 수많은 아이돌의 대표곡들을 작곡한 대단한 작곡가였다. 그중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곡명은 "이효리"의 "Chitty Chitty Bang Bang, " "샤이니"의 "Lucifer, " "레드벨벳"의 "Dumb Dumb, " 그리고 프로듀스 101 시즌2의 주제곡 "나야 나"였다. 원래 중독성 강한 음악을 잘 만드는 earworm (자꾸 귓전에 맴도는 곡조 - 일명 수능 금지곡) 장인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작곡자들은 함께 일하는 작곡가팀의 팀원들이라는 기사도 찾았다.


"왜 제목을 돌고래가 아니고 Dolphin이라고 지었을까?"

"돌고래라고 하면 아무도 안 들을까 봐? Dolphin이 더 귀여워서?"

"K-pop 시장을 겨냥한 네이밍?"

(지금 생각해보니 작곡자가 미국인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격랑을 물보라라고 표현했다면 왜 잔잔한 연못에 파동을 일으키는 잉어가 아니고 원래 큰 파도에 사는 돌고래였을까? 흰 수염고래도 아니고."

"여자 아이돌 노래 제목이 잉어면 누가 들어. 그리고 여자의 마음은 잔잔한 연못이 아니야 원래."

"그리고 돌고래는 물밖으로 통통 튀잖아. 걸그룹의 이미지도 통통튀는 상큼함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안무에는 돌고래를 형상화한 게 없을까?"

"이미지만 차용한 거겠지, 귀엽고, 물보라를 일으키는 친근한, 그런 이미지."


"우리 애들은 이 노래의 어떤 포인트가 좋은 걸까?"

"그냥 귀여운 목소리? 물보라가 애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인 "보라"랑 이름이 비슷해서?"

"아니면 너 닮아서 그냥 걸그룹이 좋은가 보지."


그렇게 자문자답으로 밤이 깊어갔다.




며칠 전에 눈이 펄펄 날릴 때는 이 노래를 들으며 아이들과 함께 목청껏 "눈보라를 일으켜!"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이들과 옥토넛 바다탐험대를 보거나 화면에서 누가 물에 "풍덩" 들어갈 때마다 "물보라를 일으켜!" 하며 노래를 부른다. 지난번에는 아침에 유튜브로 방송영상을 틀어놓고 따라 하며 아침체조?를 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전문 가수이다 보니 애들이 좀 어려워했다.


그래서 바꾼 게 Badanamu의 "Ponytail"이다. (EXID의 하니가 출연했던 "야놀자" 광고 CM송의 원곡이다) 가사는 더 단순하지만 영어고, 춤도 꽤 난이도가 있지만 통통한 펭귄들이 추기에 대충 묻어갈 수 있는 동작들이 많다. 무엇보다 첫째가 아주, 매우, 정말, 즐겁게 따라 부르면서 춤을 춘다. 가사도 자막으로 나와서 좋다.


노래는 약 2분 남짓으로 아이들은 뭐든지 좋아하는 것은 한 번에 끝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최소 세 번은 쳐줘야 하는데, 사실 첫째는 더 추고 싶어 하지만, 내 체력이 거기까지다. 10분 안에 하루에 필요한 운동을 모두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첫째와 내가 춤을 추고 있으면 둘째와 아내가 안쓰럽다는 듯이, 마치 클럽 앞에 죽치고 서있는 사람들을 보는 60대의 어르신들 같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둘째, 너 웃긴다 "물보라를 일으켜 da da da da da da da da"할 때 네가 춤 따라 하는 거 아빠가 다 봤거든. 이 펭귄들도 다 여자야 걸그룹이라고.


Hoo! You know~ I look good! 하는 도입부가 나오면 무슨 수를 써도 별 수없던 첫째가 미이라가 깨어나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에 기상에는 더 효과적이긴 한데 일단 틀어놓으면 최소 세 번은 춤을 쳐야 한다. 그리고 가끔 너무 신이 나서 유치원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춤이나 계속 추겠다고 떼를 쓸 때도 있지만, 어차피 내 체력이 안되므로 더 들어줄 수도 없는 부탁이다. 




사실 아이들이 이렇게 마주하는 아침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어찌 되었건 영상물을 보면서 시작하는 아침,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침에 아빠랑 춤도 신나게 추고, 영어도 배우고, 아침이 즐거웠다는 기억이 하나라도 있다면 평생 아침에 일어나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


나중에, 아주 나중에, 잠에서 깨어나 피식 웃으며 '그래.... 아빠랑 그렇게 춤도 추고 그랬는데' 하며 한 번이라도 더 날 추억해 주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서울대를 가게 해주는 것 보다도, 전문직을 얻게 해 주는 것 보다도,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아빠와의 노래, 아빠와의 즐거운 아침을 선물해주고 싶다.  




*재미있는 사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어린이 합창단을 했다.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 모두 학교 대표 합창단으로 시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부른 것은 누나의 결혼식 후 교회에서 온 가족이 "특별 찬양"을 할 때였다. 휴가 복귀 때문에 공군 외출복을 입고 상병 마크를 달고. 매형과 나는 아버지와 무대에 서본 횟수가 같다.


지금도 아버지는 트롯트를, 나는 가요를, 아버지는 찬송가를, 나는 CCM을 부른다.


Badanamu는 "영어"로 나온다는 이유로 둘째가 싫어하는데, 정작 우리 집에서 "Yes"와 "No"를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도 둘째다. 어린이집 친구 중에 다문화가정 친구가 있어서 그렇다. 자기가 친구랑 쓰는 말이 영어 인지도 모르면서 영어는 싫다고 하는 게 누굴 닮아 그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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