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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May 21. 2024

힘들어하던 열일곱의 나를 다시 만나며

일기, 메모, 수첩을 비우며

물건을 정리하면서 가장 버리기 곤란했던 것이 일기장, 종이에 끄적인 메모들, 작은 수첩이 담긴 상자였다. 커다란 정리용 수납 상자 하나와 신발 상자 3개 정도 분량이었다.


정리를 시작하면 뒤적거리다가 내용을 읽게 되고 옛 추억에 잠겨서 못 버리고 결국 다시 덮어두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지쳐서 다시 덮어두고를 몇십 번이나 반복했다.


정리 관련 책에도 보면 추억의 물건은 제일 나중에 정리하라고 나와있다. 일상 생활에 쓰던 물건을 거의 처분하고 나중에야 일기장 정리에 도전했지만 이 과정을 계속 무한반복하면서 버리는 게 쉽지 않았다.


나같이 물건을 못 버리는 습관이 있던 사람은 무슨 물건을 버리든 어렵고 힘든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일기는 내 생각을 기록한 그 자체가 내 인생이었다. 그래서 미니멀라이프를 알기 전에는 일기장이나 메모를 버린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 탁월한 실력으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때 일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종이 메모든 온라인 메모든 꾸준히 끄적여왔으니 나중엔 모아서 책이나 한 권 써야겠다는 생각을 남몰래 품어왔었다.




초중고 일기장과 추억의 H.O.T 사진이 담긴 노트에서부터 대학생~서른이 넘도록 메모했던 수 십여 권의 수첩... 다양한 기록의 흔적








일기장이나 메모를 정리해서 정말 최소로 남겨두고 버릴 수 있게 된 건 바로 작년 가을쯤 정리를 거의 마무리할 무렵이었다. (이 글을 쓴 시점에서는 2016년) 그동안 정리를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수많은 변화를 겪고 난 후였다.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니 다른 사람이 쓴 것만 같은 느낌도 있었고, 이제 더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바보 같은 부분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까지도 내가 한결같이 하는 생각을 적은 부분도 있었다.


변하지 않는 나만의 가치와 본질적인 생각을 발견하고 난 이후로는, 감정적으로 슬프거나 화가 나서 푸념한 부분은 그냥 찢어버리게 됐다. 찢어버리면서 ‘그 시절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감정적으로 더 단단한 내가 될 수 있었다. 과거에 힘든 일을 겪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지금은 더 이상 느끼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아니다 싶은 부분은 편하게 버릴 수 있게 됐다. 내가 진짜 되고 싶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적은 부분들만 찢어서 남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 나에 대해 잘 모르고 맹목적으로 배운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던 어린 시절에 쓴 일기는 자연스럽게 다시 읽을 가치가 없어졌고 과감하게 버렸다. 물론 중요하거나 재미있는 일을 겪었던 부분은 사진을 찍어 남겨두긴 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 적어둔 수십 개의 수첩을 버리는 건 쉽지 않았다. 그때는 어느 정도 세상에 대해서 파악하며 나만의 생각을 구축해 나가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 찬찬히 읽어보면서 감정적으로 출렁이던 때를 기록한 부분은 순간의 감정이었기 때문에, 그걸 굳이 간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버리고, 지치면 며칠 혹은 몇 달을 쉬었다가, 다시 또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꺼내서 읽어보고 처분했다.


물건을 정리하고 버리는 것도 생활 습관과 같다. 정리하고 처분하고 중요한 걸 골라서 보관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정리 근육이 생기게 되었다고나 할까. 다른 어떤 물건보다 내 존재와 동일시되던 일기장이나 메모를 버리기가 힘들었지만, 점점 단련되면서 지금은 작은 소품 상자에 들어갈 만큼만 남길 수 있게 됐다.



2016년, 정리 후 살아남은 종이 메모들 (하지만 2016년 이후 쓰던 수첩 몇 개는 미처 정리를 못하고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다... 으아... ^^;;;)



그래도 가장 버리기 어려웠던 건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쓴 일기였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던 시간, 고등학교 시절이 가장 암흑기였다. 그때 쓴 두 권의 일기장은 정리하면서 펼쳐보지도 않고 쳐다보기도 싫어서 늘 박스 안에 일순위로 다시 들어가는 물건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반에서 3~5등 안에 드는 우등생이었다. 내가 살던 지역은 고등학교 입시를 치러야 하는 비평준화 지역이라,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두 번째로 인지도가 높은 학교를 목표로 삼아 열심히 공부했다. 평소 실력이면 붙을 수 있었는데 12월에 본 연합고사에서 안타깝게 합격선을 못 넘고 떨어졌다. 두 달 뒤에 후기 시험을 치르고 나서 다른 학교로 들어가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시 16살 중학생에게는 가혹할 만한 상처였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하다는 자부심이 넘치던 내게, 순간의 실수로 원하는 학교에 못 가게 된 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부모님도 내심 큰딸이라 기대를 많이 걸고 계셨는데, 내가 너무 상심해하니까 티는 안 내고 속으로는 많이 아쉬워하셨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시절에는 한국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됐고, 학교에서 뭘 하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하기보다는 조용하게 반항을 했다. 역사나 사회 관련 과목은 열심히 듣긴 했지만 별로 흥미 없는 수학이나 다른 과목 수업 시간에는 집중하지 않고, 몰래 만화책도 읽고 책도 읽고 낙서도 하며 놀았다. 다행히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중학교 실력으로 먹고 놀았지만, 2학년 때부터는 성적이 20등대로, 3학년 때는 30등대로 떨어졌다.


그래도 수능시험은 당시 400점 만점에 310점 정도로 내신 성적보다는 훨씬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 방송반 활동을 했기 때문에 언론 쪽에 관심을 가져서 언론정보학과에 가고 싶었다. 근데 또 떨어질까 봐 두려움이 너무 컸고 재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성적에 맞춰서 지원하다 보니 경기도권에 있는 대학교로 가게 됐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가 정도는 다르지만 아픔을 겪고, 그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한다.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 가졌던 사회에 대한 불만과 내 처지에 대한 원망, 아픔,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야 하는 고통이 있었다.


겉으로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냈지만 원래 내가 갈 학교가 아니었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겉도는 관계를 유지했고, 그러면서 느꼈던 불편함이나 혼란 등 수많은 감정을 일기장 두 권에 담았다. 그래서인지 정리하면서도 감히 쳐다보거나 펼쳐보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리 근육이 탄탄해져서인지 작년 가을에 드디어 용기를 내서 열어보게 되었다. 두려움을 갖고 훑어보던 일기장에는 사실 아주 큰 분노나 화는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소소한 사건이나 감정들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더 성숙한 마음으로 읽어보니 참 별것도 아닌 일에 화내고 울고 했던 모습이 보였고, 나를 위로해 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공감해 줄 사람도 없었다는 생각에 일기장에 당시의 감정을 모두 쏟아낸 것이었다. 일기장이 유일하게 솔직한 내 진심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같은 존재였던 것…


캐런 킹스턴의 책에 나오는 ‘과거의 물건은 낡은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내용을 용기 삼아, 상처받고 힘들어하던 작은 아이를 토닥토닥 위로해 주고 놓아주기로 했다. 마음속에 꽁꽁 숨겨뒀던 낡은 에너지를 풀어주고 공간을 만들어서 새로운 나를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








메모도 종이와 디지털로 기록해 둔 내용이 많다. 디지털 메모는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했지만, 일기장이나 작은 수첩에 적었던 메모는 경험을 통해 얻은 중요한 깨달음이나 내가 지금이나 미래에 원하는 모습을 적은 내용만 남겨뒀다. 그런데 내용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스물한 살 때부터 해마다 한 번씩은 책을 쓰고 싶다, 글을 계속 쓰고 싶다고 적어온 걸 발견했다.


(낯부끄러운 내용은 살짝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예전에는 무슨 책을 쓰고 싶었는지  자신도  몰랐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짧게 짧게 다양한 일을 하다 보니,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보다는 다방면에 걸쳐 적당히 지식을 알게 되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가까웠다.


그런데 책은 어느 분야에 눈부신 성과를 거둔 전문가만이   있는 거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실제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었다.


내가  메모를 다시 읽어보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얻게  가장  수확은 책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실천으로 옮길  있게  것이 아닌가 한다.


정리를 하다 보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발견할  있다는 내용을 정리 관련 책에서 수없이 읽었다. 카페에 앉아서 노트북 키보드를 마구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순간,  구절이 정말 실감 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 - 현재 브런치에 발행 중인 물건 정리 내용을 2017 당시 전자책으로 내고자 의욕적으로 글을 적던 순간이었습니다. ㅎㅎㅎ)


정리를 다 마친 지금은 나중에 참고할 아이디어나 생각은 디지털로 메모를 해서 빠르게 검색해서 활용할 수 있게 하고, 가끔 손으로 글을 쓰고 싶을 땐 종이에 글을 적되 사진을 찍어서 바로 디지털화해서 보관한다. 디지털 자료가 아무래도 보관이나 관리가 더 편하기 때문이지만 손으로 쓰는 감성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건, 메모를 하고 나서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출간할 때, 그동안 적어왔던 메모가 분명히 큰 활약을 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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