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면서 비우고, 채우면서 버릴 수 있도록
내가 다양한 쓰기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할 무렵을 떠올려보면, 늘 곁에서 엄마와 아빠가 무언가를 쓰고 계셨다.
아빠가 펜을 쥘 때에는 평소와 다른 손을 쓴다는 것, 그 손이 나의 손과 꼭 닮았다는 것, 목소리 크고 투박한 아빠가 글을 쓸 때만큼은 집중하느라 오리입이 되어 글씨를 꾹꾹 눌러쓴다는 사실에 나는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엄마와 다투고 나서 방문을 쾅 닫고 ‘바람 때문이야!’라고 괜히 변명을 할 때에도, 다음 날 일어나 보면 책상에 놓여있는 편지에 엄마에 대한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랑이 차오른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모두 글쓰기 덕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어른은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라는 인식을 품으며 자랐다.
연필, 색연필, 크레파스를 넘어 엄마의 빨간 만년필을 힘주어 쓰기 시작할 때였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화들짝 놀라 내게서 만년필을 가져가셨다. 그리고 놀란 내 마음이 다치지 않게 만년필 사용하는 방법을 차근차근히 알려주셨다. 어느 때고 자식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엄마의 감정이 날 것 그대로 나오게 할 정도로 아끼는 만년필의 매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20년도 더 지났지만,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걸 보면 만년필은 내게 동생 다음으로 버금가는 평생질투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였을까? 시작은 질투였지만 이제는 반려문구가 되어버린 만년필. 모닝페이지를 쓸 때, 책을 읽으며 필사나 메모를 할 때, 무언가를 기록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내 손에는 반드시 만년필이 손에 들려야 한다.
바깥에서 글을 쓰려다가 만년필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싶으면 목적지에 거의 다와도 과감하게 돌아서 집으로 간다. 다른 볼펜으로 쓰면 스스스슥 물 흐르듯 써지는 감각을 느낄 수 없어 역정이 난다. 만년필의 잉크를 따라 생각이 흐르는 게 틀림없달까. 사각거리는 닙의 촉감과 청각적 만족감도 빠질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과도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는 것이다. 모닝페이지를 a5에서 a4로 확장시킨 지 두 달 차. 30분 만에 쓰던 a5때와 달리 a4는 모닝페이지를 쓰는 데에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이것저것 더 쓰다 보면 하루에 한 번씩 만년필의 잉크를 새로 채우게 된다. 처음에는 패키지 상품으로 함께 온 검정잉크를 컨버터에 주입해서 쓰거나, 여분의 카트리지를 늘 쓰고는 버렸는데, 아마 모아두었다면 스파게티 소스통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쓰고 나서 다 쓰레기통에 버린 게 어쩐지 아쉽기까지 하다.
최근에는 글 쓰기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잉크를 새로 구입했다. 펄이 들어있다는 게 포인트. 펄이 잘 섞이도록 잉크병을 흔들어 컨버터에 주입하다 보면 어제의 낡은 정신도 반짝반짝 빛나는 새것으로 갈아 끼워지는 느낌이 들어 산뜻해진다.
밖에서 만년필을 쓰다 보면 난처해지는 때가 있다. 굵직하게 나오던 글씨가 갈수록 홀쭉해지다가, 결국에는 비밀편지 같은 음각만 남긴다. 처음에는 벌써 잉크를 다 썼나, 하는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이제는 한창 쓰기에 탄력이 붙을 때 잉크가 없어져 버리면 희열보다 난처함이 더 커져서 늘 필통에 카트리지 한 개는 여분으로 가지고 다닌다. 기록하지 않는 모든 것은 소멸하기에. 소멸을 막기 위한 나만의 부적이 되어버린 카트리지.
한 달 전, 오랜 친구가 대전에 놀러 왔다. 부산이 고향인 나는 친구가 대전에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과 마음을 쏟는지 알기에 나를 보러 와주는 것 자체가 무척 선물 같았다.
그날 문구류 쇼핑을 하러 갔다가 내가 몇 달째 고심하고 있는 한 만년필 앞에서 문득 발걸음이 멈추었는데, 그것을 본 친구가 생일 선물이라고 곧바로 만년필을 사주는 게 아닌가. 휴식기를 가지다 이제 막 직장에서 자리 잡은 친구였고, 나 또한 돈이 얼마 없는 처지였기에 큰 결심을 해주는 게 너무 고마웠고 훗날 꼭 보답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뒤이어 간 카페에서 친구는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짧은 편지를 써주었다.
필통이 없을 때 마침 선물 받은 만년필 존재가 되어줄게.
이런 문장을 선물 받은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글쓰기는 나에게 환하게 밝아지는 생동감과 무르익어가는 감정을 선사해 주었고, 평생 그것을 받은 만큼 넉넉하게 되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늘 여분의 카트리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세월이 흘러도 내 곁에 변하지 않을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노트와 만년필, 그리고 잉크일 것이다.
꾸준히 잉크를 채우는 사람이고 싶다. 쓰면서 비우고, 채우면서 버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