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새 노트, 그리고 레몬케이크
모닝페이지를 쓰다가 정말이지 서럽게 울어버렸다.
잘 자고 일어나서 글 쓰다가 울다니... 나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울면서도 왜 우는지 납득이 안 되는 게 더 슬퍼서 눈물이 자꾸 흘렀다.
모닝페이지에 특별한 내용을 쓴 것도 아니지만 눈물이 맺히다가 저항 없이 흘러내리면서 콧잔등을 넘어 볼을 지나 턱을 괴던 팔뚝을 타고 탁자에 번졌다. 정말 왜 이러지? 싶다가 달력을 보고 깨달았다. 아, 생리 일주일 전이구나.
칼 같은 주기로 찾아오는 대자연의 시기. 나는 생리통이 없지만 PMS가 정말 심하다.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해서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된달까. 그런 의미에서 모닝페이지를 쓸 때 감정의 널뛰기가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쓰던 페이지를 마무리하면서 PMS를 발견했고,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면서 탁한 마음이 조금은 뽀얘진 것 같으니까.
생활반경이 좁은 나는 주에 한 번은 아티스트 데이트처럼 먼 곳이 아니더라도 굳이 나가며 일상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오늘은 그동안 미루던 건강에 대해 신경 쓰기로 한다. 느지막이 병원에 갔는데 대기환자가 많아 30분은 넘게 기다렸다.
나는 기다리는 시간에는 무조건 책을 보는데, 오늘은 박참새 시인의 시집 "정신머리"를 펼쳤다. 소설과 에세이, 자기 계발서 위주로만 보다가 정말 다채롭게 옷을 갈아입는 시인 덕분에 시 세계에 오랜만에 흥미로움을 느꼈고, 긴장이 풀려 까무룩 잠들 뻔했다.
어떻게 푼 긴장인데,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다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모닝페이지를 쓸 때 울었던 이유는 갑자기 생긴 종기의 고름을 짜러 여성병원에 가야 하는 게 수치스럽고 공포스러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너무 아파서 이를 꽉 깨물다 보니 턱이 얼얼할 지경이니까.
일상생활에서 걷기 비중을 늘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 발을 보니 동그란 기포가 생겼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무좀이었고... 좁은 약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을 뚫고 "무좀약 주세요." 말하는 건 어딘가 모르게 조금 멋쩍기도 했다. 남들이 괜히 내 샌들 안쪽의 발을 보는 것 같은 건... 자의식 과잉이겠지.
약국을 다녀온 뒤 오랜만에 문구쇼핑을 했다. 그동안 써오던 기록법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마침 최근에 끝난 프로젝트 보상으로 나에게 질 좋은 노트를 선물하기로 했다. 겸사겸사 간 문구숍에서 신중하게 노트를 고르고 골랐는데 바로 옆에서 미도리 노트 팝업스토어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평소에 오는 길과는 다른 길로 돌아오느라 팝업스토어를 보지 못했는데, 이미 5만 원 이상 노트를 사버렸지만 오늘이 날이다, 싶어 화끈하게 질렀고 내 가방에는 노트가 3권, 해빗트래커 1팩으로 가득 찼다. 과소비를 했지만 빈 노트를 차곡차곡 채울 생각에 너무 행복해!
집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일부러 걸어가려고 했지만 가방의 무게를 보니 글렀구나, 싶어서 계획을 변경하고 오고 싶던 카페에 왔다.
마침 내가 갔을 때 딱 한 조각 남아있던 레몬케이크. 사이즈 업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레몬케이크를 곁에 두고, 모처럼 유월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 달을 알차게 보내고 싶은 습관을 정리하면서 기분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PMS는 정말 피하고 싶은 몸의 신호지만, 어쩌면 내 몸의 소리에 집중하면서 나를 더욱 잘 돌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겠다. 시와 새 노트, 그리고 레몬케이크 덕분에 여유를 가지고 여름의 싱그러움을 만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