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Nov 07. 2017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의 에세이 29편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은 영국의 사립 명문고 이튼스쿨을 졸업하고나서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로 넘어가 경찰로 근무했는데, 버마에서의 삶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부와 가난, 민주주의와 파시즘 혹은 트로츠키 주의, 지배와 피지배, 전통과 변혁, 정치와 전쟁, 그리고 작가로서의 자부심과 명예, 다른 작가들에 대한 생각들이 특정한 규칙이나 순서없이 엮여 있으며, 옮긴이(엮은이)의 표현을 빌자면 '예리한 통찰, 특유의 유머와 통쾌한 독설'로 유명한 조지 오웰의 에세이가 29편 담겨 있다.

어렵고 두껍다. 그러나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요새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1인 미디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자신의 글을 쓰고 대중에 유통하는 것이 쉽고 간편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산다. 나 또한 이왕 다음 카카오 브런치의 작가가 된 김에, 그리고 출판을 앞둔 김에, 글을 좀 전문성있게 써볼까 하는 욕심이 스멀스멀 치고 올라 온다. 장난치듯 글을 쓸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작가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좌에서 우로 넓어졌는데, 그 깊이에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그러한 의구심을 해갈시켜주는 작가다운 작가라 할 수 있다. 때로는 개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풀어 내는 에세이를, 때로는 인간과 전쟁 사이의 참상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기록한 르포를, 떄로는 인간의 삶의 부조리를 꼬집는 풍자적 소설을 집필했으며, 경찰관으로, 빈자로, 저널리스트로, 소설가로서의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인생의 통찰력을 키워 나갔다.

그의 작품에는 철학과 예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인문이 들어 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맛은 없다. 하지만 정의와 강단이 있다.

그리고 그의 남성적이고도 힘 있는 투박한 문체를, 역자 "이한주"님이 잘 옮겨 주셨다. 각 에세이마다 꼼꼼하게 달린 각주만 보아도 조지 오웰에 대한 애정과 번역자로서의 전문성 및 이해도를 알아 챌 수 있었다.

똑똑해 지고 싶은 사람,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 싶은 사람, 사회와 정치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고 싶은 사람, 어렵고 무거운 주제들이지만 그 안에서 조지 오웰의 위트와 담백한 가치관을 덤으로 얻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저없이 그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를 권한다.
 
*


29편의 에세이를 모두 정리해 게재할 여유가 없어, 가장 인상 깊었던 <서점의 추억>과 <나는 왜 쓰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요약해 보려고 한다.



<서점의 추억>



조지 오웰이 헌책방에서 파트타임 직원으로 알바를 했을 때의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는 헌책방에서 일하면서 열악한 근무 환경과, 진상 고객들 때문에 책이 싫어질 지경이 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헌책방을 가장 많이 찾는 부류는 책을 정말로 사랑하는 문학애호가가 아니라, 초판만을 밝히는 속물, 안그래도 싼 중고 교과서 값을 더 깎으려는 동양인 학생들, 그냥 조카 생일 선물이나 건지러 막연히 들러보는 여성들이었다.

대뜸 저자명도, 제목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빨간"책 표지만을 단서로 문고 지기를 들들볶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온갖 까다로움을 부리며 귀하고 비싼 책을 주문만 해 놓고 정작 사러는 오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편집증 환자, 그리고 무가치한 책들을 이고 지고 와서는 팔겠다며 억지를 쓰는 식빵 냄새가 나는 쇠약한 사람도 빼놓을 수 없겠다.

여타 헌책방과 같이 그가 일했던 헌책방에서도 부수 상품을 판매하여 이윤을 남겼는데, 주로 중고 타자기, 소인된 우표, 점성술 운세도, 어린이 책, 성탄절 카드와 달력, 대여 문고 등 다양한 '돈 되는 것'들을 취급하기도 했다.

19세기 작가의 소설은 이미 유행이 지나 아무도 찾지 않았지만, 은근한 수요가 있어 찰스 디킨스나 셰익스피어의 책은 꾸준히 잘 팔렸다. 미국책이나 단편소설은 인기가 없다. 독자들이 편마다 등장인물이 바뀌고, 스토리를 다시 생각하며 읽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전문'서적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 직업은 어느 정도 이상은 천박해 질 수 없는 인도적인 사업이고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서적상은 창이 깨끗해야 먹고 살기 때문에 겨울에도 난방을 할 수 없는데다, 책은 고약한 먼지를 뿜어 내고, 책머리는 종종 왕파리의 무덤이 되므로 근무 환경이 그리 좋지는 않다.

그러나 한때 오웰도 책을 사랑했던 때가 있었다. 적어도 50년 이상은 된 책의 모습과 냄새와 감촉을 사랑했으며, 시골에서 경매로 1실링에 한 무더기의 책을 사서 쌓아놓고 "목욕할 때나 너무 피곤해서 잠이 오지 않는 늦은 밤이나 점심을 기다리는 15분 정도의 애매한 시간 동안", 별로 유명하지 않는 18세기 시인, 옛날 지명사전, 표지가 독특한 소설, 1860년대 여성지 같은 것을 읽는 것 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다.

그러나 '묵은 종이의 달큰한 냄새'는 더이상 그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편집증 환자같은 손님들과 죽은 왕파리들이 너무도 쉽게 연상됐기 때문이다.




<나는 왜 쓰는가>


에세이집 서명과 동일한 제목의 글이다.


조지 오웰은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자신이 어른이 되면, '차분히 앉아 책쓰는 일'을 하는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외로웠던 학창 시절, 애국시를 쓰며 문학활동에 대한 보상을 받기도 했고, 학교 잡지 편집일을 돕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가기도 했다 - 보통 조잡한 자아도취적 일기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점점 그가 겪은 일이나 본 것에 대한 단순 묘사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습성은 글쓰는 작가가 아니었을 때, 즉 경찰이었을 때도 역시 지속되어 왔다. 아마 그때 그가 책을 쓰려고 했다면 "불행한 결말, 묘사와 비유로 현란한 구절들이 가득한 자연주의 소설"을 썼을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동기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성장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한 힌트가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글의 주제는 작가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정서와 기질은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굳어지는 것이므로 미성숙한 단계에 고착되거나 비뚤어진 심기에 매몰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


조지 오웰은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다.


1. 순전한 이기심: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 중 하나는 허영심이다. 똑똑해 보이고 싶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자신을 평가절하 했던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욕구로 부터 기인한 특성은, 과학자, 예술가, 정치인, 법조인, 군인, 성공한 사업가 등 요컨대 최상층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나타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개인적 야심을 버리지만 작가들은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그대로 살아간다. 돈에 대한 욕심은 적어도 허영심 많고 자기중심적이다.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낱말과 단어의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과 기쁨. 작가는 자신이 체감한 바를 대중과 나누려는 미학적 동기로 글을 쓴다.


3.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구로 글을 쓴다.


4. 정치적 목적: 조지 오웰은 버마에서 인도제국경찰 노릇을 했고, 그 뒤로 하층민의 삶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빈곤과 좌절을 맛 보았다. 그로 인해 권위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노동 계급의 존재에 대해 인식을 하게 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등장과 스페인 내전 등의 역사ㆍ정치적 사건은 그가 무엇(전체주의)에 맞서야 하는지, 무엇(민주적 사회주의)을 지지해야 하는 지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다.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 중 마지막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 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로 부터 기인한 정치적 목적이라 할 수 있겠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 바닥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그는 작가의 개별성을 지워야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정치색이라는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예술성을 가미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잃지 않으려 했다. 때문에 그의 문장은 강하면서도 아름답다. 재치 있으면서도 예리한 비판 정신이 살아 있는 것이다.


<동물농장>은 그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려고 시도한 최초의 소설이다. 어느날 불평등을 호소하던 돼지들이 농장 주인을 내 쫓고 평등한 사회를 구축하여 이상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풍차(돈키호테의 지향점으로 유명한 풍차는 이상을 상징한다) 건립을 시발점으로 하여 돼지들 사이에서도 피지배 계층과 지배 계층으로 계급이 나뉘어 그들이 인간을 내쫓게 만든 '불평등'을 스스로 만들어 내게 된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던 그들의 구호는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욱 좋다로 바뀌어, 불평등을 인정해 버리고 기득권으로 합류하고자 하는 야망이 들끓는 사회로 퇴보해 버린다. 이 소설은 사회의 폐단을 꼬집으면서도 탄탄한 구성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으로 '딱딱하지 않은' 정치적 소설으로 유명하다.


정치적인 글을 쓰다 보면 '보도물'이 돼 버린다. 현란한 미사여구나 화려한 문장의 배열 등의 미학적 묘미가 실종된다. 쓰는 자 만큼이나 읽는 자의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므로 조지 오웰 또한 '타협'에서 멀리 가지 못했다. 그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가난과 좌절에 핑크색의 엷은 포장지를 기꺼이 두르고 나쁜 독선보다는 좋은 타협을 취한 것이다.


왜 나는 쓰는가, 나의 글쓰기 동기는 무엇인가


나의경우, 정치적 스탠스는 뚜렷하나 그걸 대중에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학적 열정만을 바탕으로 화려한 미사여구의 나열으로 글을 완성할 깜냥 역시 안되고, 딱히 후세에 남길만할 글을 쓰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 정보 전달만을 위한 글 보다는 조금 멋진 글을 쓰고 싶다. 역시나 나는 '지적 허영을 충족 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글쓰기를 이용중이다.


앞서 아들러의 성격심리학 서평에도 기재했듯이, 사람의 성격은 허영심과 과시욕에서 출발한다. 허영이 충족되지 않으면 열등감이 되어 증오, 분노, 우울, 절망, 슬픔 등으로 전이되고, 충족된다 하더라도 과시, 자기애, 타인 무시, 비하, 비방, 오만, 자만, 거만 등의 나쁜 감정으로 악화될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허영으로부터 출발하는 성격 형성의 과정에서, 어떤 것이 딸려 나올지 모르는 채, 자기 안에서 뭐가 나올 지 알아보기 위해 미끼를 계속 던져봐야 한다. 자기 안에 좋은 것이 있다면 빨리 끄집어 내야 하고, 나쁜것이 있다면 가급적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자기가 어떤 것을 가졌는지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 내면의 소통이고, 내면도 생물과 같아서 내면이 어른으로 성장해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면을 성장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독서를 하고 글을 쓴다. 이러한 노력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건강하고 건전한 '미끼'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쓰는가>를 읽다 보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훌륭한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낡은 책 파는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으로 이렇게 멋진 수필을 쓸 수 있고, 작가가 왜 글을 쓰는가 하는 본질적 질문을 풀어 내는 깊은 사고력을 바탕으로 장문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작가는 확실히 뭔가 다르구나! 작가라는 타이틀은 아무나 달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것도 깨닫게 되어 한 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매거진의 이전글 알프레드 아들러, 성격 심리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