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에 두고 온 시인의 모자

자작나무 숲에서….. 쉬었다 가세요.

by 고요정

자작나무 숲에 두고 온 시인의 모자


어떤 인연은 축복보다 깊은 흔적을 남기고 떠난다.

하늘 어딘가에서 예고 없이 찾아와 내 평온하던 심장을 관통해 버린 너처럼. 너는 머물지 않고 지나갔으나, 네가 뚫고 지나간 그 자리엔 메울 수 없는 바람의 길이 생겼다.

그것이 비록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이었을지라도, 나는 가슴을 열어 간절히 청했었다.

한 번만 더 내게 돌아와 달라고, 이 빈 가슴을 네 숨결로 채워달라고.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것은 모두 바람이 된다.

잡을 수 없는 것은 모두 그리움이 된다.

나는 이제 청춘의 뜨거웠던 열망이 묻은 낡은 '시인의 모자'를 만져본다.

한때는 세상을 다 담을 듯 부풀었던 그 모자 속에, 이제는 지나간 바람 한 점을 구겨 넣는다.

그리고 하얀 수의를 입은 듯 정결하게 서 있는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숲의 나무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지켜보고, 나는 그 사이를 서성이는 고독한 나그네가 된다.

열린 가슴 문에 기대어 서서 저 멀리 숲의 끝을 바라본다.

내가 이토록, 오래도록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저 하늘 끝으로 날아간 이름 없는 바람일까, 아니면 심장에 박혀 영영 뽑아낼 수 없는 잊지 못할 애증일까.

자작나무 숲은 차갑고도 따뜻한 역설의 공간이다.

상처를 하얀 껍질로 덮고 서 있는 저 나무들처럼, 나 또한 내 아픈 기억들을 시(詩)라는 이름의 하얀 종이 위에 덮어둔다.

기다림이 기어이 바람이 되고 애증이 될지라도, 나는 이 숲을 떠나지 못한다.

내 젊은 날의 모자가 이곳에 있고, 내 심장을 관통했던 너의 흔적이 여전히 이 숲의 공기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자작나무 숲에서 서성인다.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지나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나 자신을 보듬기 위하여.



자작나무 숲에서….. 쉬었다 가세요.

하늘 어딘가에서

내게 온 너는

심장을 뚫고 가버렸구나.


바람이었어도

다시 한번 내게 오라고

가슴으로 전했건만…


젊은 날의

찐했던

시인의 모자에

바람 한 점을 구겨 넣고,

자작나무 숲에서

서성이는 나그네 되었구나.


열린 가슴 문에

기대어 서서

기다리는 것이

날아간 바람인가

잊지 못할 애증인가



자작나무 숲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 끝에서 문득 찾아와 내 심장을 꿰뚫고 가버리니

다시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빌려 그대를 보고 싶어라.

낡은 시인의 모자에 청춘의 한을 구겨 넣고

자작나무 숲 홀로 거닐며 이것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묻노라.



작가의 후기: 시인이 되기 위한 습작들이 나의 한 걸음, 또 한 걸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