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레몬

이방인의 레몬

by 고요정

이방인의 레몬

이방인으로 살았다.


서러움이 살아 꿈틀거린다

해가 중천에 걸려 따가운데도

비지땀 사이로 서러움이 흐른다.


풀 사이사이로 손가락 집어넣고

서릿서릿한 그놈을 집어 올리건만

뿌리는 끝내 끊어지고 만다.


한 자락 발길만 멈춰도

그새 또 자란 어제가 서 있다.


뒷마당에 심은 레몬에서

상큼한 서러움이 날린다.


그 노란 빛깔이 낯선 얼굴을

내 안에 구겨 넣는다.


[에세이] 뿌리 끝에 남은 어제와 노란 레몬의 역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낯선 거울 속에 나를 구겨 넣는 일과 같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세상이 온통 환하고 따가운 빛으로 가득 차도, 내 안의 서러움은 식을 줄 모른다. 오히려 그 뜨거운 볕 아래서 비지땀을 흘릴 때, 땀방울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것은 고단함보다 짙은 소외감이다. 나는 이 낯선 땅의 질서 속에 편입되기 위해 매일 뒷마당의 잡초를 뽑듯 내 안의 이질감을 솎아내려 애쓴다.


풀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어, 서릿서릿하게 엉킨 그놈들을 움켜쥐어 본다. 이 척박한 마음의 잡초만 뽑아내면 온전한 이곳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하지만 힘껏 잡아 올린 손끝에 남는 것은 허망하게 끊어진 줄기뿐이다. 서러움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질겨서, 도저히 뽑히지 않은 채 땅속 깊은 곳에 '어제'라는 이름으로 박혀 있다.


잠시 숨을 돌리려 발길을 멈추면, 어느새 발치에는 뽑아낸 자리보다 더 무성하게 자라난 어제의 흔적들이 서 있다. 이방인에게 땅은 오늘의 터전이지만, 마음은 늘 지나간 시간의 흔적에 매여 있다. 오늘을 살고 싶어 발버둥 칠수록, 어제의 나는 잡초처럼 무성해져 현재의 나를 가로막는다.


뒷마당 한편에는 레몬 나무가 서 있다. 이 낯선 땅이 내게 준 오늘의 결과물이다. 가지마다 매달린 노란 레몬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하고 상큼한 향기를 날린다. 남들은 그 빛깔에서 희망과 활력을 읽겠지만, 이방인의 눈에 비친 레몬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속한 열매다.


그 상큼한 향기는 오늘의 평화를 노래하는 듯하다가도, 한입 베어 물면 미처 준비되지 않은 혀끝을 사정없이 찔러댄다. 너무나 강렬한 그 시큼함에 낯선 타국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고, 나의 표정은 속수무책으로 일그러진다. 레몬의 노란 빛깔은 오늘의 성취를 축하하는 화사한 포장지 같지만, 사실은 그 안에 적응하지 못한 나의 고독을, 어제의 서러움을 강제로 구겨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방인의 삶은 결국 그 구겨진 표정을 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뽑히지 않는 어제의 뿌리를 인정하고, 레몬의 시큼함이 주는 생소한 통증을 오늘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 비록 오늘도 내 표정은 레몬의 산미 앞에 사정없이 일그러지겠지만, 그 구겨진 틈새마다 이방인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삶의 무늬가 새겨지고 있음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