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마누라, 미국남편

제1화. 보스턴 입성 작전과 레이스 냅킨

by 고요정


등장인물:

* 나 (K-마누라): 재혼과 함께 미국 생활 2막을 시작함. 겁도 많지만 깡도 있는 한국 아줌마.

* 남편 (미국남편): 긍정의 아이콘. U-Haul 트럭에 이삿짐 싣고 보스톤으로 운전한다. 아내를 'Sweetheart'라 부르며 녹임.

* 시어머니 (Memories): 우아한 금발(백발), 홍차와 레이스를 사랑하심.

* 시아버지 (Memories): 아이스크림 같은 마음씨의 소유자. 스킨십 대마왕.

* 스팽키: 꼬리콥터 비글.

* 이웃들: 말(Horse), 옆집 할아버지.

S#1. 고속도로 위 (낮)

이삿짐 트럭(U-Haul)이 앞서 달리고, 그 뒤를 세 아이의 미래를 싣고 나는 맹추격 중이다. 미니밴 운전석의 나, 눈 밑에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기세다. 뒷좌석엔 세 아이가 엉겨 붙어 자고 있다.

나(N.A): (비장하게) 남자는 사랑을 믿고 앞만 보고 달린다. 하지만 여자는... 현실을 싣고 달린다. 무려 15시간째. 버지니아에서 보스턴까지. 내 사랑이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다.

앞서가는 트럭 운전석의 남편, 백미러를 보며 손을 흔든다. 세상 해맑다.

나: (한숨 쉬며) 손 흔들 힘 있으면 엑셀이나 더 밟지... 보스턴, 거긴 대체 어떤 곳인 거야?




S#2. 보스턴 집 앞 (오후)

뉴잉글랜드 특유의 뾰족 지붕이 예쁜 2층 집. 앞마당엔 여름 꽃들이 화려하다.

차에서 내린 나, 허리를 펴며 집을 올려다본다.

나: 와... 집은 예쁘네. 동화책 같다.

남편: (다가와 어깨를 감싸며) Welcome Home, Sweetheart.

나: 낭만적이네. 근데 저기 뒤에서 무슨 소리가...

효과음: 히이이이잉~!!! 푸르르르!

나: (소스라치게 놀라며) 꺄악! 뭐야? 여기 쥐라기 공원이야?

남편: (태연하게) 아, 뒷집 말이야. 인사성이 밝네.

나:... 뉴잉글랜드는 말도 텃세를 부리니?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비글 스팽키가 총알처럼 튀어나온다.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며 나의 다리에 매달린다.

나: (쓰다듬으며) 그래, 너라도 날 반겨주니 고맙다. 너, 눈치가 한국 강아지급이구나?



S#3. 집 내부 / 거실 (회상)

나(N.A): 낯선 땅, 낯선 집. 하지만 그곳을 '우리 집'으로 만들어 준 건, 두 분의 따뜻한 환대였다.

우아한 찻잔을 들고 계신 시어머니. 식탁 위엔 빨간 배추김치가 락앤락 통에 담겨 있다. 나, 기대에 찬 눈빛이다.

나: 어머니, 이거 'Kimchi'예요. 코리안 슈퍼푸드!

시어머니: (안경을 고쳐 쓰며 김치를 뚫어져라 본다) Oh... 색깔이 아주... 강렬하구나(Intense).

나: 한번 드셔보세요. 소화에 최고예요.

시어머니: (부드럽게 웃으며 서랍을 연다) Sweetheart, 마음만 받을게. 대신 이걸 주마.

어머니가 건넨 건 하얀색 레이스 냅킨.

시어머니: 그 붉은 국물이 튀면 이걸로 닦으렴. 우아하게.

나: (냅킨을 받아 들며) 아... 네. (독백) 김치 국물 닦기엔 너무 고퀄리티인데요, 어머니.

나(N.A):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김치를 한 번도 드시지 않았다. 하지만 저 하얀 냅킨은 김치보다 더 진한 사랑으로 내게 남았다.


S#4. 공항 입국장 (과거 회상)

나(N.A): 그리고 또 한 분, 아이스크림 같았던 우리 시아버지.

한국에서 오신 친정엄마,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다. 시아버지, 꽃다발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온다.

시아버지: (활짝 웃으며) Welcome to America!

친정엄마: (한국식으로 공손히 고개 숙이며) 헬로, 땡큐...

순간, 시아버지가 친정엄마의 양 볼에 쪽! 쪽! 가볍게 키스한다.

친정엄마, 얼음 상태. 눈동자만 지진 난 듯 흔들린다.

친정엄마: (사투리로 작게) 옴마야... 이게 뭔 일이여. 사돈어른 입술이...

나: (당황) 아, 아빠! 미국식 인사예요!

시아버지: (눈치 없이 해맑게) 아이스크림 드시러 가시죠!

나(N.A): 한국에선 상상도 못 할 '사돈 간 볼 키스'. 그날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드시며 얼굴을 붉히셨다. "미국 양반이라 그런가, 참... 따뜻하네."라고.



S#5. 뒷마당 (다시 현재, 저녁)

연기가 자욱하다. 나, 작은 체구로 거대한 바비큐 그릴 앞을 장악했다. 석쇠 위에서 불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간다. 간장과 마늘이 타는 달콤 짭짤한 냄새가 보스턴의 공기를 가른다.

나: (집게를 흔들며) 좋아, 이 동네의 기강을 잡아주지. K-불고기 출격!

울타리 너머, 옆집 할아버지가 코를 킁킁거리며 나타난다.

옆집 할아버지: Excuse me? 지금 천국 요리 중인가요? 냄새가... Incredible!

나: (씩 웃으며) It's Bulgogi! 할아버지, 접시 들고 오세요!

옆집 할아버지: (이미 울타리 쪽으로 뛰어오고 있다)

나(N.A): 왜소한 동양 여자 하나가 피워 올린 불고기 연기에, 도도한 보스턴 이웃들이 무장 해제된다. 사랑은 주고받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그들을 담아 맛있는 냄새로 유혹하는 것. 그게 나의 방식이다.



S#6. 거실 (밤)

벽난로 위, 환하게 웃고 계신 시부모님의 사진.

이제는 중년이 된 남편과 나가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나: (사진을 쓰다듬으며) 보고 싶네요. 어머니, 아버지.

남편: (내 어깨를 감싸며) 나도.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거겠지?

나: 그럼. 당신한테서 아버님 냄새나는 거 알아?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냄새.

남편: (웃으며) 당신한테선 불고기 냄새나.

나: 뭐?

둘, 마주 보고 웃는다. 창밖으로 보스턴의 밤하늘이 보이고,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나(N.A): 아이 셋을 데리고 온 아들의 아내. 뭐가 그리 예뻤을까. 하지만 두 분은 자식을 믿어주셨고, 나를 딸처럼 안아주셨다. 마지막 한 분까지 떠나보낸 지금... 이젠 우리 차례다. 받은 사랑만큼, 아니 그보다 더 뜨겁게 불고기를 굽고 사랑을 나눌 차례.

(화면 페이드 아웃 되며)

(자막: 보스턴 불고기 대작전은 이제 시작이다.)

[작가의 말]

15시간을 달려 도착한 낯선 땅 보스턴. 그곳엔 말 울음소리와 하얀 레이스 냅킨, 그리고 볼 키스가 있었습니다. 문화도 언어도 달랐지만, 우린 그렇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섞여 들어갔습니다. 불고기 냄새 폴폴 풍기는 저의 보스턴 정착기, 이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