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톰 브래디교(敎)와 영하의 바비큐 파티
제2화. 톰 브래디교(敎)와 영하의 바비큐 파티
등장인물:
* 나 (K-마누라): 풋볼 룰은 1도 모름. 하지만 눈치는 100단. 남들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고 소리 지르는 '생존형' 관람객.
* 남편 (미국남편): 패트리어츠(Patriots) 광팬. 브래디 이야기를 할 때 눈에서 하트가 나옴.
* 아이들: 엄마와 함께 영문도 모르고 브래디 유니폼을 입은 귀여운 병정들.
* 광신도들 (팬들): 영하의 날씨에 상의 탈의도 불사하는 보스턴 사람들.
S#1. 95번 고속도로 (오전)
끝이 보이지 않는 차량 행렬. 평소엔 왕복이던 고속도로가 오늘만큼은 이상하다. 모든 차선이 한 방향, '질레트 스타디움'을 향해 흐르고 있다.
운전석의 남편, 이미 흥분 상태다. 나와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톰 브래디(12번) 유니폼을 입고 비니 모자를 쓴 채 멍하니 창밖을 본다.
나: (창밖을 가리키며) 여보, 이 사람들 다 어디 가? 피난 가? 전쟁 났어?
남편: (비장하게) 전쟁이지. 오늘 톰 브래디가 출격하잖아! 이 도로는 이제 경기장 전용이야.
나: (혼잣말) 아니, 공 하나 던지는 거 보려고 고속도로를 전세 낸다고? 미국 스케일 보소...
S#2. 경기장 가는 길 & 주차장 (오전)
차에서 내리자마자 칼바람이 뺨을 때린다. 나,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리며 몸을 떤다. 그런데 눈앞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트럭 뒤를 열어놓고(Tailgate), 그 추운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다. 연기가 자욱하다.
나: (경악) 미쳤어... 이 날씨에 밖에서 고기를 구워? 입 돌아가요, 아저씨들!
남편: 이게 바로 '테일게이팅(Tailgating)'이야! 축제의 시작이지! 소시지 먹을래?
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뭐야? 여기서부터 걸어가?
남편: 주차장이 꽉 차서 그래. 몇 마일 정도는 걸어야 진정한 팬이지.
나: (아이들을 챙기며) 얘들아, 정신 똑바로 차려라. 여긴 '겨울왕국'이 아니라 '고기왕국'이다.
군중들: (맥주캔을 들고) GO PATS! Brady! Brady!
나: (얼떨결에 주먹을 쥐고)... 브... 브래디? (작게) 근데 브래디가 누구니, 철수니?
S#3. 경기장 관중석 (낮)
수만 명의 함성으로 경기장이 떠나갈 듯하다. 나, 룰을 전혀 모른다. 그저 남들이 소리 지르면 같이 지르고, 앉으면 같이 앉는 '눈치 게임' 중이다.
나(N.A): 내 꼴 좀 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톰 브래디로 도배를 하고 앉아 있다. 누가 보면 내가 브래디 낳은 줄 알겠다.
경기장 아래, 전설의 톰 브래디가 등장한다. 사람들, 기립 박수.
남편: (감격) 봤어? 저 카리스마! 오늘 느낌이 좋아.
나: (남편 옆구리를 찌르며) 근데, 왜 자꾸 경기가 멈춰? 뛰다가 서고, 뛰다가 서고. 광고 찍는 거야? 성격 급한 한국 사람은 속 터져 죽겠다.
남편: (열심히 설명 중) 저건 '다운'이고, 저건 작전 타임이고...
나: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아하, 그렇구나. (속마음: 집에 언제 가...)
S#4. 하이라이트 (경기 후반)
중요한 순간. 팽팽한 긴장감. 나, 분위기상 지금이 중요한 것 같아 잔뜩 긴장한 표정 연기를 시전 한다.
브래디가 공을 길게 던진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
관중들: 으아아아아....!!
나: (덩달아) 으아아아아....!! (뭘 봐야 하는지 몰라 허공만 봄)
공이 리시버의 품에 쏙 안긴다. 터치다운!
관중들: 와 아아아 아!!! YEAH!!!
나: (누구보다 높이 점프하며) 꺄악!! 이겼다!! (옆 사람과 하이파이브까지 함) 나이스 샷!!... 아니, 나이스 캐치!!
남편: (나를 끌어안으며) 역시 우리 마누라가 오니까 이기네! 당신이 승리의 요정이야!
나: (땀을 닦으며) 휴... 연기하느라 힘들었다.
S#5. 돌아오는 길 (차 안)
경기는 패트리어츠의 압승. 나, 녹초가 되어 조수석에 널브러져 있다. 아이들도 곯아떨어졌다.
나(N.A): 룰도 모르고, 춥고, 다리도 아팠다. 하지만 그 수만 명의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모이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뭐, 이기는 편이 내 편이지.
남편: (싱글벙글) 톰 브래디는 정말 신이야. 그렇지?
나: 그래, 신 맞네. 고속도로도 뚫고, 영하의 날씨에 사람들을 걷게 만들고, 나 같은 아줌마도 춤추게 했으니.
남편: 다음 주에도 갈까?
나: (단호하게) 집에서 TV로 모시겠습니다. 신은 멀리서 봐야 더 아름다운 법이야.
나(N.A): 하지만 그날 우리가 함께 입었던 12번 유니폼은, 꽤 오랫동안 우리 가족의 '전투복'이자 '파티복'이 되었다. 보스턴의 겨울은 춥지만, 그들의 열정은 뜨거웠으니까.
[작가의 말]
보스턴 사람들에게 톰 브래디는 종교, 질레트 스타디움은 성지(聖地)였습니다. 95번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어도, 영하의 추위 속에 몇 마일을 걸어도 그들은 행복해 보였죠. 룰도 모르면서 남편 따라 '얼떨결에 광신도'가 되었던 그날, 저는 비로소 보스턴의 진짜 겨울을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