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 어느 날 제법 바람이 차가워졌다. 출근길에 보이는 사람들의 두꺼워진 옷차림만큼이나 몸도 둔하게 움츠러든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러한 서늘한 정취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느낌을 준다. 낮은 온도가 불편하긴 하지만 겨울을 좋아하는 나로는 그리 나쁘지 않고, 나름 운치도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운치를 살포시 느끼는 찰나. 나의 감성은 오래가지 못하고 출근과 동시에 분위기가 깨졌다. 아침부터 한 것 분위가 상기되어 있는 앞자리 대리님이 소란스럽게 재잘거리고 있다. 달아오른 분위가 차가운 운치를 녹인다.
“과장님! 이거 보세요! 명품, 명품!”
목소리에서 나오는 부산스러운 단어들이 떨어지는 곳을 보니, 대리님이 입고 온 바지 좌측 상단에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투박하고, 날 것의 느낌이 나며, 만드는데 약간의 성의가 누락된 듯한 모습이다. 어디에서 샀냐고 묻자. 주말에 시장에서 두장에 5만 원 주고 샀다고 한다.
‘아이고.. 짝퉁을 사 왔구나.‘
원래도 조금은 순수하고 맑은 친구라 장사치에게 눈퉁이 맞고 온 것은 아닌가 괜한 걱정이 된다. 하지만 짝퉁 바지로 동료들에게 먼저 장난을 치는 것은 보니 모르고 사 온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무료한 회사생활에 아침부터 등장한 작은 가십거리로 다들 장난치기 바쁘다.
“시장에서 샀으면, 두장에 최소 4만 원으로 네고했을 텐데.”
“거기 사장이 대리님 보니 백 퍼센트 부르는 대로 살 것 같아서 붙잡은 거다.”
이번에는 알고 그랬겠지만, 장난과 함께 혹여라도 큰일 있을 때는 속으면 안 된다고 동료들이 걱정 어린 핀잔을 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기분 좋게 웃으며, 바지를 자랑하는 모습에 모두들 막냇동생 재롱 보듯 즐거워한다. 웃고 떠들다 바지 한번 만져보라며 손짓한다. 짝퉁이지만 기모로 된 소재에 제법 따듯할 것 같은 모양새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바람도 차고 추운 날씨였는데, 바지가 따듯해서 하나도 안 춥다며 좋아한다.
요즘 같이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때가 있을까. 사람들을 보면 브랜드 명품을 입고, 어떤 차를 타며, 유난스럽게도 긴 영어 이름이 덕지덕지 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 같다. SNS에나 매스컴에 노출되는 것들만 봐도 자신들의 껍데기가 이렇게나 화려하다고 잘 났다고 떠들기 바쁘다. 그러나 화려한 외면 속 어떤 알맹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유난스러운 현실에서 짝퉁이어도 따듯해서 좋다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우리 대리님의 모습을 보며, 원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 본다. 명품이든 짝퉁이든 바지라는 본질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로고가 박혀있던지 겨울철에 따듯하고 입을 때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결국 진짜라는 것은 본질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하느냐의 문제 같다.
하지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화려한 허물에 흔들려 본질을 망각하는 존재이지 않을까. 나의 모습만 봐도 보이는 것들에 수도 없이 흔들린다.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내 나이 정도면 이 정도는 이뤘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교했을 때 나는 내 삶을 얼마나 달성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가 많다. 다만, 포근한 온기로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짝퉁 바지처럼 내가 바라는 본질은 무엇일지 찾고 싶고 그것을 위해 정성을 쏟고 싶다. 어떠한 포장지에 싸여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싸여있느냐가 중요하기에. 밖에서 보이지 않아도 안에서 빛날 가치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