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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Feb 09. 2023

비장과 춘몽의 이미지 사이를 부유하는 밀정

신촌. 메가박스. 유령.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23년 첫 1000만 영화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이해영 감독의 <유령>은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1월 18일 개봉하기 전부터 예고편을 통해 관객들은 최근에 개봉한 두 영화와 비교해 <유령>을 색다른 영화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을까 싶다. 절벽 위 외딴 호텔에 갇힌 5명의 용의자. 그들 중 한 명은 항일 투쟁 단체인 흑색단의 일원. 찾지 못하면 총독부 경호대에 의해 죽게 되는 상황.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이나 김지운 감독의 <밀정>(2016)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했으되 항일 투쟁이라는 소재를 밀실추리로 풀어내는 영화가 나온 적이 있던가? 밀실추리라는 소재만으로도 <유령>은 이전의 두 영화와 비교해 분명 색다르게 매력적인 영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전작 <독전>에서 특유의 암울하면서도 광기어린 인물들과 이미지들의 조합해 대중의 관심을 받은 이해영 감독의 역량을 고려했을 때 절벽 위 외딴 호텔을 배경으로 한 밀실추리와 화려한 프랙탈이 조합된 예고편에서 알 수 있듯 암울한 일제강점기와 밀실추리라는 소재는 이해영 감독을 통해 더욱 매력적인 결과물로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기대와 달리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나 김지운 감독의 <밀정>과 비교하면 <유령>은 제목처럼 두 영화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유령과 다름없다. 춘몽(春夢)처럼 보일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존재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항일 투쟁을 한다는 안옥윤(전지현 분)의 <암살>. 일본제국민과 조선식민인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다 비장하게 정체성을 깨닫고 항일 투쟁을 시작하는 이정출(송강호 분)의 <밀정>. 짧고 거칠게 말하면 두 영화는 춘몽과 비장이라는 두 키워드로 일제강점기를 풀어내 영화적인 완성도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현재를 연결하는 것에 성공한 영화라 할 것이다. 하지만 <유령>의 박차경(이하늬 분)과 무라야마 쥰지(설경구 분)는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함께 춘몽을 헤맨 동료들을 기억하는 안옥윤도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하다 비장하게 정체성을 깨닫는 이정출도 아니다. 제목처럼 그저 그 언저리 어딘가를 배회하는 유령으로 등장해 끝날 뿐이다. 왜 밀실추리였는가? 이 영화가 바라보는 일제강점기와 현 시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영화 스스로가 자신의 매력과, 현 시대와 자신의 이야기의 관계성에 대해서 명확히 고찰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객과는 소통하지 못한 모양새이다.     


1. 이미지의 연쇄 : 밀실추리와 일제강점기

우선 <유령>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는 밀실추리와 일제강점기의 이미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1933년. 무라야마 쥰지가 강당에 모인 조선인들에게 말했듯 조선은 망한지 20년이 넘어 제삿밥이나 챙겨주면 그만인 나라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전향한 시기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이 시기는 여전히 항일 투쟁을 하는 독립 운동가들에게 희망도 없이 오로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억겁의 시기이다. 독립을 위해 암약해 인내하고 있으나 식민지 현실에 자신들의 힘이 부족하다는 현실, 영원히 일제 치하에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등에 죽음을 바라되 죽지 못해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이들이 이 시기의 독립 운동가들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숭고한 이상만으로는 끊임없이 차오르는 전향의 유혹을 견디는 것이 어려운 시기에서 영화의 흑색단은 허덕이며 항일 투쟁을 하고 있다. 흑색단의 활동은 비구름이 껴 어두운 하늘, 비가 추적추적 내려 더러운 흙과 물로 질척거리는 거리, 특히 담배 연기가 낀 듯 뿌연 막이 얇게 발린 듯, 영화 내내 채도는 선명하되 명도는 낮은 영화의 색감처럼 희망을 좇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처럼 우울을 짊어진 채 희망을 좇는 흑색단의 이미지는 총독부 통신과에서 힘없는 눈으로 암약한 채 첩보에 따라 성공 확률이 희박한 다음 미션을 동료들에게 전달하는 박차경으로 수렴한다. 자신의 자리를 제외하면 공간에 어둠이 내려앉아 있으며 타자기 소리만 들릴 뿐 어떠한 인간적인 교류도 없는 통신과 사무실은 식민지 현실에 힘겨워하면서도 독립의 꿈을 놓지 못하는 박차경에게 외로움의 이미지를 덧입힌다. 애초에 박차경이 항일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거룩하거나 고결하지 않다. 그저 자신이 사랑했던 이의 원(願)이자 의지였기에 따랐을 뿐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절 혹은 사랑에서 항일 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서 다른 이와의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시작한 항일 운동이기에 박차경은 우울을 짊어진 채 희망을 좇고 있는 항일 투쟁에 대한 회의와 맞서야 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외로움과도 맞서는 인물인 것이다. 이처럼 흑색단의 이미지와 외로운 개인의 이미지가 수렴하는 박차경은 흑색단의 동료인 난영(이솜 분)이 총독 암살에 실패해 죽으면서 더욱 회의와 외로움에 맞서야 하는 인물이 된다. <유령>에서 1930년대라는 시대와 흑색단이라는 가상의 항일 단체는 박차경이라는 개인으로 수렴되어 암울, 우울, 고립, 외로움이 뒤섞인 일제강점기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이미지는 밀실추리는 찰떡처럼 연결되기 쉽다. 도심 어느 건물의 밀실이 아니다.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을 벗어나 절벽 위에 있어 나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인 고풍스러운 호텔이라는 밀실이다. 첫째로 경성이라는 도시를 떠나 있는 것은 항일 투쟁 중인 흑색단의 유령에게 있어 목표와 목표를 위한 수단 모두를 상실한 것과 같다. 경복궁 앞에 거대하게 서 일제의 지배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총독부 건물이 있는 경성은 흑색단에게 있어 불가능할지도 모를 독립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지속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인 총독과 총독부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경성은 익명을 기반으로 한 대도시이기에 암약하기 쉬운 공간이기도 하다. 흑색단에게 암약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수단이자 상태이다. 암약을 하지 못하면 일제라는 거대한 권력에 저항할 수 없기에 경성이 아닌 호텔이라는 밀실로 공간이 이동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흑색단의 유령에게 고립감을 가중하게 된다. 공간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의해서도 고립감은 더욱 가중된다. 총독부 경호대의 감시 아래 누가 흑색단의 유령인지를 추리해야 하는 5명의 용의자에게 갇혀있다는 감각은 그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해방감을 좇게 한다. <유령>은 특성상 추리 서사의 탐정과 용의자의 역할이 5명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기에 암울, 우울, 고립, 외로움의 도가니인 일제강점기의 이미지는 인간관계를 통해서도 강화된다.      


2. 이미지의 분리 : 소모되는 밀실추리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밀실추리는 영화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호텔 이후 경성 부분으로 넘어가기 위해 소모되는 이미지일 뿐이다. 밀실추리가 허무하게 소모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소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밀실추리라는 소재를 허무하게 휘발시키면서 <유령>은 <암살>, <밀정>과 비교해 독보적일 수 있는 자신만의 일제강점기 이미지의 중요한 맥을 놓친다. 이는 곧 호텔 부분과 호텔 이후 경성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귀결은 영화의 시작에서 박차경이 흑색단의 유령이라는 사실을 관객이 알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즉, 영화는 경호대의 카이토(박해수 분)가 박차경을 찾는 과정이 되기에 관객에게는 <유령>은 누가 유령인지를 밝히는 밀실추리가 아니라 박차경이 카이토의 수사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를 즐기는 밀실스릴러가 되어 버린다. 관객은 더이상 누가 유령인지를 추리할 필요없이 박차경이 밀실과 다름없는 호텔을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만 신경쓰면 된다. 물론 밀실스릴러가 된다고 해도 추리는 서로를 의심해야 하는 박차경, 무라야마 지, 유리코(박소담 분), 천 계장(서현우 분), 이백호(김동희 분)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유령을 밝혀내지 못할 경우 경호대의 고문을 받아 결국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의심을 통한 추리는 인물들 사이의 긴장감을 형성해 박차경의 탈출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범인을 알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 <유령>의 호텔 장면은 어떤 목적 하에 호텔이라는 밀실을 배경으로 추리가 진행되는지 알 수 없는, 즉 목적을 상실한 추리가 진행되는 것이다.     


목적을 상실한 추리에 관객이 다시 집중하게 하려면 박차경이 카이토와 대결하며 박차경이 호텔을 안전하게 탈출하는 것처럼 추리의 목적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유령>은 의심할 수 없는, 혹은 의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인물들, 단편적인 의심과 추리의 과정, 갈등을 종결하기 위한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 추리의 요소를 쉽게 휘발시킨다. 신임 총독의 암살 미수 사건에서 박차경에게 묻은 피를 보고 그가 유령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던 이백호는 박차경을 흠모하고 있기에 박차경을 의심하지도 혹은 이용하지도 못하는 인물이다. 천 계장은 암호 해독에 뛰어나다는 점에서 상황에 대한 분석력과 추리력이 좋은 인물일 수 있음에도 그저 고양이 하나짱을 그리워하며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만 되뇌이고 유리코를 향한 변태적 성욕만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이렇게 인물을 설정하고 재현할 수 있다. 문제는 설정 이상의 다른 행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반부의 경성 부분으로 발 빠르게 나아가는 과정에서 5명의 의심과 추리를 풀어내야 하는 전반부의 호텔 부분은 지나치게 축약되어 있어 이백호와 천 계장이 주체적으로 의심과 추리의 과정에 나서는 행동은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특히 실제 배우의 사건‧사고로 인해 편집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백호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천 계장도 나머지 세 인물을 의심하고 관찰하며 추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에서 자신만의 주술(?)을 하며 다른 인물들이 다가오길 기다리며 하나짱을 보고 싶어 할 뿐이다.      

이백호와 천 계장의 경우만이 아니라 애초에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고 의심하는 장면 자체가 굉장히 단편적이다. 5명 중 2명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남은 세 인물들조차 물리적‧심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장소에서 거의 교차하지 않는다. 좁은 호텔에서 서로를 거의 마주하지 않으니 물리적 증거의 발견과 논리적 유추에 따른 긴장감 넘치는 추리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박차경의 경우엔 의심과 추리의 주체가 아니라 탈출해야 하는 유령이기에 오히려 다른 이들의 추리를 방해해야 한다. 하지만 박차경은 관찰을 하지만 탈출을 위한 도주로를 계획하는 정도일 뿐이다. 애초에 다른 인물들과 교차하지를 않아 상대를 알 수 없으니 사보타주를 할 수도 없다. 쥰지와 유리코 역시 마찬가지이다. 쥰지가 박차경이 유령이라는 물증을 발견하는 과정이나 유리코가 쥰지를 유령으로 모함하는 과정은 다른 갈등과 연결되어 누가 유령인지 점점 더 알 수 없다는 긴장감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작은 호텔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방에서 가만히 있거나 상대의 방에 몰래 침입하거나 겨우 2명 정도가 작당모의 하는 정도로 서로를 단편적으로 의심할 뿐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의심과 추리의 과정은 쥰지와 카이토의 갈등과 유리코와 박차경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조선인의 피에 열등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정체화 하려는 쥰지와 본토인임에도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쥰지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으로 어떻게든 그를 처내려는 카이토는 의심과 추리의 과정를 통해 상대를 몰락시키려 한다.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나 박차경이 해야 하는 사보타주를 유리코가 대신하게 되는 방식을 통해 유리코와 박차경은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즉, <유령>의 호텔은 추리를 위한 밀실이 아니라 쥰지가 카이토와 대결하며 도달할 수 없는 일본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정해 성장하고자 하는 시간과 공간의 방이다. 자기 혼자만 유령인 줄 알았던 박차경이 동료인 유리코 아니 안강옥을 만나 자신이 고립된 외로운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우울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함께 미래로 나아가게 되는 만남의 장이다. 박차경이라는 인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쥰지, 박차경-안강옥 각각에게 퍼져 버리는 밀실추리 혹은 밀실스릴러의 서사에서 호텔이라는 공간은 아무런 목적을 지니지 못하고 완전히 의미를 상실해 고립, 우울, 외로움 등의 일제강점기 이미지와는 무관한 개별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가 중첩되며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개별 이미지가 되는 순간 <유령>은 호텔의 서사와 호텔 이후 경성의 서사가 의미의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출처. 왓챠피디아

두 서사가 의미의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 인해 추리에서 액션으로 순식간에 영화의 주요 장르가 변하기 때문이다. 5명의 용의자들이 서로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서로를 얼마나 깊이 의심하고 있는지가 표면적인 상황에서 박차경을 대신해 사보타주를 한 유리코가 사실은 암약해 있던 또 다른 유령인 안강옥이란 점이 밝혀지면서 총격전이 시작된다. 이 순간은 밀실추리와 일제강점기가 아무런 연관이 없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의심과 추리로 인해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아야 하는 호텔은 폭탄이 터지고 총탄이 난무하는, 뜨거운 액션의 현장이 된다. 추리와 액션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장르라는 것이 아니다. 유리코가 또 다른 유령이라는 점이 밝혀지는 것 자체도 문제라는 의미가 아니다. 유리코가 안강옥으로 바뀌고 추리가 액션으로 바뀌는 도약의 과정은 의심과 추리의 과정이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확고하게 형성되어야 안정적이면서 유기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유령>의 추리는 박차경을 중심으로 밀도 있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지, 박차경-안강옥 각각에게 퍼진 상태에서 표면적으로만 진행된다. 애초에 누가 유령인지를 추리하거나 박차경이 호텔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보타주 하거나와 같이 목적이 명확한 추리 서사가 아니기에 유리코가 안강옥이라는 반전은 추리 장르를 순식간에 불태워 액션 장르로 영화를 전환하는 불안한 발판이 되어 버린다. <유령>의 시작점이자 허리라 할 수 있는 밀실추리가 허망하게 소모되면서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가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영화의 의미마저도 흔들린다.      


3. 이미지의 분리로 부유하는 <유령>

밀실추리라는 소재를 이미지로 구체화한 호텔이라는 공간은 <유령>이 <암살>, <밀정>과 비교해 일제강점기를 전혀 다른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앞의 두 영화와 다른 지점을 취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호텔이라는 공간이 완전히 휘발되어 밀실추리가 허망하게 소모된 가운데 <유령>은 <암살>과 <밀정>이 선취한 지점 사이를 부유하게 된다. <암살>, <밀정>, <유령>은 공통적으로 조선이 망하고 식민지가 된지 약 20년 정도가 된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는 언급했듯 독립이 요원하게 보이는 시기이자 비정한 현실에 좌절해 전향을 고뇌하는 고통스러운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를 배경으로 <암살>은 춘몽처럼 덧없어 보이는 일제에 대한 항일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끝내는 독립된 이후에까지 자신의 임무를 마치는 안옥윤을 통해 덧없음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존재를 보이는 이들의 비애를 전달한다. <밀정>은 지와 마찬가지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정체성을 정하지 못한 채 총독부와 의열단의 이중스파이로 활동하다 결국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이정출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해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을 비장하게 보여준다. 춘몽의 비애과 비장한 정체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 두 영화는 <유령>과 다르게 활극이라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암살>은 뜨겁고 유머러스한 활극으로, <밀정>은 차갑고 날이 선 활극으로 거칠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와 달리 <유령>은 애초에 활극이 아니라 정적인 추리극을 경유해 활극으로 나아간다. 즉, 추리극과 활극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영화이다. 하지만 추리극 자체가 허무하게 소모돼 활극을 위한 적절한 발판도 되지 못한 상황에서 <유령>은 <암살>도 <밀정>도 아닌 애매한 활극에 위치하게 된다. 1930년대의 흑색단의 이미지가 수렴되는 박차경은 고립과 우울로 타성에 젖은 항일 투쟁의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다. 그가 변화할 수 있던 것은 안강옥이라는 동료가 자신의 바로 곁에서 함께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유령>은 <밀정>처럼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혼란해하는 박차경이 안강옥의 존재를 통해 비장하게 자신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바로 세우는 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유령>은 총탄에 맞아 추운 겨울의 산비탈에 몸을 구르고 끝내는 싸늘하게 죽는 윤난영과 이를 목격하는 박차경, 망한지 20년이 넘은 나라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비웃는 무라야마 쥰지 등을 통해 독립과 항일 투쟁에 춘몽의 이미지를 덧입힌다. 여기에 쥰지의 어미가 자살하기 전 쥰지를 바라보며 남기는 논어의 어구,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를 통해 그럼에도 여전히 춘몽을 좇아야 함이 옳다고 말한다. <유령>에는 <암살>의 서사 요소도 존재하는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두 영화의 서사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전반부 서사의 의미가 사라진 상황에서 두 요소를 배합해 어떤 활극으로 현재의 관객과 어떤 이야기로 소통을 하고 싶으냐는 것이다. 그리고 <유령>은 두 요소를 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하기 보다는 두 요소를 반반씩 어설프게 엮은 듯하다. 아직 때가 아니기에 살아남아야 한다고 외치는 우당(김종수 분). 흑색단이 몰살당할 위기에 분연히 일어나 노래를 부르는 소년 흑색단원 동우(박상훈 분). 쥰지에게 총을 맞아 죽은 동우를 좁고 어두운 지하에 수많은 동지들과 함께 묻으며 흐느껴 우는 누나 이영주(이주영 분). 춘몽을 좇는 독립 운동가들의 비애는 <유령>의 경성 서사 전반에서 느껴진다. <유령>은 이러한 비애를 가지고 살아남은 흑색단의 단원들이 요원 개인이 임무를 진행하던 처음과 달리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며 함께 총독 암살을 감행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은 무언가를 급하게 봉합하는 느낌이다. 추리극에서 활극으로의 도약이 불안했듯이 춘몽의 비애와 비장한 정체성도 불안하게 봉합된 것이다.


이렇게 춘몽의 비애와 비장한 정체성이 불안하게 봉합된 것은 <암살>, <밀정>과 달리 <유령>은 두 소재를 한 인물에게 집중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비애의 경우를 살펴보자. <유령>에서 <암살>의 안옥윤에 해당하는 인물은 박차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차경은 안옥윤만큼의 비애를 보여주지 못한다. <암살>에서 안옥윤은 속사포, 황덕삼과 함께 암살 작전을 수행하다 동료들의 희생과 죽음으로 홀로 살아남아 광복을 맞이한다. 함께 꾸던 춘몽에서 결말에 홀로 도달한 안옥윤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살 작전 직전 동료들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술을 마시며 춤을 추던 밤을 되돌아보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박차경은 윤난영을 잃은 뒤 누구도 잃지 않았으며 경성의 한 강당에서 쥰지의 함정에 걸려든 흑색단 역시 동우를 제외하면 누구도 죽지 않았다. <암살>의 안옥윤이 계속해서 누군가를 잃으며 그를 짊어지고 나아간다면 <유령>의 박차경은 고립되고 우울한 이미지를 쓰고 있을 뿐 누군가를 잃고 그를 짊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안강옥과 함께 흑색단 동지들을 구하고 쥰지를 사살하기까지 한다. 춘몽의 비애는 <유령>의 서사 전반에서 느껴지지만 어디까지 이미지로 둥둥 떠다닐 뿐 인물과 세계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다.


<유령>에 있는 <밀정>의 비장한 정체성도 살펴보자. <밀정>의 정체성이 이정출 개인의 정체성에서 시작한다면 <유령>의 정체성은 박차경 개인의 정체성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단순히 개인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개인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을 통해 집단의 정체성 엿보게 한다. <밀정>이 이정출 개인의 정체성을 통해 조선인이라는 집단 정체성을 엿보게 한다면 <유령>은 흑색단이라는 가상 집단의 집단 정체성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차이는 춘몽의 비애가 이미지로 둥둥 떠다니게 된 이유에서 기인한다. <밀정>에서 엿보이는 집단 정체성인 조선인으로서 집단 정체성은 이정출 개인에게 내재된 것이자 이정출 개인으로 수렴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토와 식민지라는 차이로 끊임없이 차별과 억압을 당하는 조선인이면서도 식민지 조선에서 권력을 쥐고 살아가는 일본 제국민이기도 한 이정출은 일본과 조선 사이의 경계에 서있는 인물이면서도 이미 조선이라는 경계 안에 서있는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밀정>은 이정출을 중심으로 그가 의열단원인 김우진(공유 분)과 제국 경찰 하시모토(엄태구 분) 사이에서 고민하다 조선인이라는 집단 정체성을 개인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인이라는 집단 정체성이 포괄적이고 표면적인 정체성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정출 개인의 구체적인 정체성으로서 엿보이는 집단 정체성이 된 것이다.


반면 흑색단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항일 단체이기 때문에 <유령>의 집단 정체성에서도 조선인으로서 집단 정체성을 엿볼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암살>이나 <밀정>과 다른 <유령>의 특징으로 <유령>의 집단 정체성은 조선인으로서 집단 정체성과 독립 운동가로서 집단 정체성이 분리된다. <암살>이나 <밀정>이 각각 독립 운동을 하고 있는 조선인 혹은 일본과 조선의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조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과 달리 <유령>은 고립과 우울로 흔들리고 있는 독립 운동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에 가깝다. <암살>과 <밀정>이 <유령>과 다른 점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폭정을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독립 운동가와 조선인의 정체성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암살>과 <밀정>의 인물들은 일본의 폭정을 눈으로 보면서 조선인을 위하는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얻게 되고 독립 운동가로서 정체성과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령>은 일본의 폭정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지 않고 독립 운동가들의 항일 투쟁을 중심으로 폭정을 스쳐지나가듯 보여주거나 아예 보여주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독립 운동가는 조선인으로서 정체성과 분리되어 고립되어 우울하고 외롭게 홀로 투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간신히 버티고 서있다는 구체적인 정체성으로 형상화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독립 운동가로서 박차경의 정체성은 고립과 우울을 기반으로 타성적으로 행하며 죽지 못해 투쟁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 박차경이 타성에서 벗어나 희망을 느끼며 살기 위해 주체적으로 투쟁하는 존재로 변화하게 되는 것은 안강옥을 만나면서이다. 즉, 안강옥을 만나기 이전의 박차경이 식민지 조선에서 보는 것은 일본의 폭정에 신음하는 조선인들이 아니라 그런 일본의 폭정에 고립된 채 홀로 맞서야 하는 독립 운동가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이다. 비록 흑색단에 속해 있으나 총독부에 홀로 암약하고 있다는 생각과 동지인 난영을 돕지 못하고 죽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던 무력감 등은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는 독립을 바라며 혼자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시시각각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박차경 개인의 정체성을 경유해 <유령>은 흑색단이라는 가상의 집단이 공동체로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듯하다. 독립이라는 이상이 요원해지고 전향의 고뇌가 깊어지는 1930년대에서 점조직인 독립 운동 단체에서 고독하게 투쟁해야 하는 투쟁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하는 공동체의 동지들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유령>의 집단 정체성은 박차경을 통해 다른 단원들에게 퍼지지도, 박차경에게 수렴하지도 않는다. <유령>의 박차경은 호텔에서 안강옥 덕분에 살아남고 그를 구해 함께 경성으로 돌아와 흑색단을 구한다. 이 과정에서 박차경은 누구도 잃지 않는다. 누군가를 잃은 것은 쥰지의 총탄에 동생인 동우를 잃은 영주일 뿐 박차경과 안강옥은 누구도 잃지 않는다. 또한 <밀정>이 이정출로 수렴하는 서사 진행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게 <유령>은 박차경이 호텔에서 안강옥과 함께 탈출한 이후부터 흑색단 전체를 조명하려는 서사 진행을 보인다. 즉, 시작에서 박차경 개인을 통해 흑색단을 보여주던 <유령>은 끝에 와서는 흑색단 전체를 조명하며 집단 정체성을 보여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관객이 보기에 이러한 서사 진행은 이미 주인공이라 인식하고 있던 박차경 혹은 박차경과 함께 주인공이라 여겨지는 안강옥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과 관련해 괴리를 발생시킨다. 박차경으로 시작하는 흑색단의 집단 정체성은 박차경을 경유해 흑색단 전체로 퍼지거나 박차경을 대표로 하며 엿보여야 한다. 하지만 박차경은 호텔 부분에서는 주체적일 수 없었고 경성 부분에서도 행동은 주체적일지 몰라도 서사의 의미 층위에서 주체적이지 않다. 끊임없이 주인공임에도 주인공이 아니게 되는 박차경은 <유령>의 집단 정체성을 대표하지도 혹은 집단 정체성의 중심이 되지도 못하면서 비장한 정체성도 <유령>의 서사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한 채 떠다니게 된다.


이처럼 비장한 정체성도 둥둥 떠다니는 게 되면서 <유령>은 춘몽의 비애와 비장한 정체성을 어설프게 연계한 결말 속에서 둘 중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제목 그대로 부유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관객이 보기에 <유령>은 매력적인 이미지의 외관을 가졌으되 이미지만 보여줄 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애매하다. 타성에 젖어 고립과 우울을 견디는 독립 운동가가 서로를 인식하고 연대한다는 서사와 견디기 힘든 현실을 연대하며 끝까지 버티는 이들은 슬프게 아름답다는 서사에서 <유령>은 전자에 가까워 보이긴 한다. 하지만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유령>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었을 밀실추리 소재가 소모되는 이미지로 활용되어 사라지는 가운데 어느 쪽으로도 이미지를 연쇄하지 못해 어디선가 본 듯한 엉성한 영화로 끝난다. 고립, 우울, 연대, 정체성 등의 소재가 조합되며 형성된 의미가 2023년 현재와 관련해 관객들과 깊이 있게 소통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어 이름처럼 부유하고 있는 <유령>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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