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atchTal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zetto Feb 24. 2023

증명으로 감내하며 증거로서 살고자 하는 결심

넷플릭스. 나의 아저씨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일이네요. 신부님을 뵌 것이 벌써 한 달이 되어갑니다. 함께 식사도 하고 추억의 장소에서 술도 기울이며 대화가 끊기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면서 앞날에 대한 고민과 부담감이 하루하루 저를 좀 먹을 때 끊기지 않던 신부님과의 끊기지 않던 대화가 위로가 되었다고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빈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위로가 되었고 그래서 신부님 앞에서 주책 맞게 눈물도 흘렸네요. 마지막에 잠시 눈물도 흘렸던 그 대화에서 신부님께서는 저에게 <나의 아저씨>를 봤느냐고 물어보셨죠. 당시 보고 있다는 저의 답변에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니 그냥 넘어가겠다고 하셨고요. 이런 방식으로 드라마에 대한 평을 쓰게 된 것은 결국 신부님께서 <나의 아저씨>를 언급하셨다가 스포일러가 될까 말을 자제하셨기 때문이랍니다. 과연 이 글이 적절한 평이 될지 아니면 단순 편지글과 같은 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을 쓰게 된 것도 결국 반은 신부님의 책임이니 신부님께서도 평론이냐 아니냐에 나름 책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농담입니다. 글이야 제가 쓰는 것인데요.


신부님과 저는 증거하는 삶과 증명하는 삶이라는 삶의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눴습니다. 증거와 증명. 신부님과 저는 그 때 대화에서 이 두 단어를 각각 다음과 같이 합의했습니다. 증명은 심지어 자신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행위를 평가할 누군가를 전제한 행위로, 증거는 다른 누군가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인 행위로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사회는 증명을 강요하는 사회이며 그 사회의 일원인 우리 모두는 이미 증명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신부님과 저는 마지막에 가서 조금은 다르면서도 같은,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미 인간은 그 자체로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그저 그러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전 증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삶에 원동력을 가질 수 있도록 증명하는 삶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신부님께서 그러셨지요. 어째 그 삶이 더 이상적으로 들린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니? 그렇게 살려고 하면 너무 힘들지 않겠니? <나의 아저씨>를 보고 나니 더 신부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와닿으면서도 동시에 '아, 나는 결국 내가 한 말대로 살려고 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글은 그 때 못한 <나의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이자, 제가 신부님께 전하는 저의 답변이요, 저 스스로에게 하는 결심입니다.

출처. 왓챠피디아

1. 증명해야 하는 사회에서 우울을 견디는 인간

신부님과의 대화 중 언급된 <나의 아저씨>는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증거하는 삶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드라마였습니다. 증명해야 하는 사회에서 증거로서 상대를 대해 변화하면서 결국 서로를 구원한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왜 신부님께서 이 드라마를 보라고 하셨는지 알겠더군요. 잠시 이 드라마를 세부적으로 분석한 다음 제가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쨌든 이 글은 신부님에게 전하는 답변이자 저의 결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에 대한 리뷰 혹은 평론이기도 하거든요. 시간이 조금 걸려도 참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 드라마 속 한국 사회는 생존을 위해 구성원들에게 증명을 강요합니다.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란 것을 끊임없이 보여야 하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죄스럽게 느낍니다. 주변인들을 힘들게 하거든요. 대표적으로는 동훈(이선균 분)의 형인 상훈(박호산 분)이겠네요. 극중 상훈은 삼형제 중 언제나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웃고 오지랖도 넓으며 자기 딸의 결혼식 축의금 중 일부를 뒤로 빼돌릴 정도로 걱정없이, 자기 좋을 대로, 나이에 맞지 않게 사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장남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집안을 말아먹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인 애련(정영주 분)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에 괴로워 합니다. 장남답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매일 동생인 동훈과 기훈(송새벽 분)에게 미안하다고도 하죠. 삼형제와 함께 후계동 공동체의 주축(?)인 듯한 제철(박수영 분), 진범(서상원 분), 권식(이도현 분)도 삶이 고단하기만 합니다. 각각 청소업체, 미꾸라지 수입업, 모텔 수건 대여업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사회에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하지 못해 주변인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는 위기의 중년이 바로 이들입니다. 증명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깎아내리고 상처입히는 것이 당연한 사회.


그렇다고 증명에 성공하며 사는 사람들도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다들 언제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증명하며 삽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준영(김영민 분)이네요. 준영은 건설사의 대표이사 직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대표이사 직을 넘어 회사의 회장 직을 얻기 위해 겉으로는 젠틀하고 회사 업무에 최선을 다하죠. 대학생 시절부터 열등감을 느꼈으며 자신과 다르게 능력과 인망으로 회사에서 인정받은 동훈을 어떻게든 이기려고도 하죠.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능력 있으며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인정이 필요한, 즉 자신은 사회에 필요한 인간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는 인간이 준영입니다. 온전히 진심을 다할 수 있는 관계를 찾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만을 중심으로 하고 살아가는 준영에게 세상은 항상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려는 인간들로 가득한 악다구니판입니다. 준영만이 아닙니다. 준영을 보필하며 어떻게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사내정치질이 기본인 상태(정재성 분), 준영을 대표이사 직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동훈을 상무에 올리려는 영국(전국환 분), 자신보다 능력없는 상태가 자신과 같은 상무이사라는 것이 고까운 동운(정해균 분) 등. 삶을 증명하는 이들은 서로를 헐뜯고 깔아뭉개며 살아갑니다. 증명의 연속 속에서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는 사회.

출처. 왓챠피디아

<나의 아저씨>의 사회는 정말 우울했습니다. 그 우울이 16화 전반에서 느껴집니다. 아마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이자 스스로 동일시하고 있는 우리 각자의 모습일 것이고 그래서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미 고단하고 치이는 하루가 연속인 삶에서 그나마 삶을 잊게 해줘야 하는 드라마가 거울처럼 우리의 민낯을 대놓고 직시하게 하니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아주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구성원이 항상 증명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 사회 계층이 낮을수록 증명의 강도가 더욱 강해지는 사회. 증명을 위해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매일이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기에 두렵고, 두렵기에 매일 같이 증명을 해야 하고, 증명에 지친다고 해도 탈진한 자신을 맡길 수 있는 타인이 없다고 생각해 외롭고, 현재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아 자기 자신마저도 미워할테니까요. 두려움, 탈진, 외로움, 미움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하루에도 수 차례 쌓이는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의 아저씨> 속 인물들도 자신들의 삶을 견딥니다. 하루라도 평안한 날이기를 바라지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삶을 시덥잖은 농담, 치밀어 오르는 분노, 쓰면서도 달디 단 술 한 잔 등으로 견딥니다. <나의 아저씨>의 인물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우리는 쉽게 이입할 수도, 그만큼 멀어질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2. 증거로서 대하며 서로를 구원하는 이들

<나의 아저씨>가 이입과 멀어짐 사이를 줄타기 하는 것은 지안(이지은 분)과 동훈을 통해서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안을 먼저 살펴보죠. 사회 최하층민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도청과 미행 등의 일을 가리지 않고 하는 지안(이지은 분)의 삶은 '편안함에 다다른다(至安)'는 이름과 달리 불안으로 가득합니다. 그에게 삶은 잠깐의 편안함에 다다르기 위해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란 것을 매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투쟁의 장이죠. 그런 투쟁의 장을 살아야 하는 지안은 겉으로 보기에 날카로우면서도 단단해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안을 연기한 이지은 배우의 육체처럼 너무나도 작고 여리며 눈 밑의 짙은 다크서클처럼 피로하고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하자면 지안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이지은 배우말고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수로서 이지은은 항상 여리고 어린 소녀여야만 했으며 그 스스로는 매번 자신에게 부여되어 강요된 소녀로서 이미지를 깨뜨려야 했으니까요. 각설하고 생존하기 위해 매일 같이 증명을 강요 받는 지안은 현실의 이지은과 맞닿고 공명해 엄청난 빚에 허덕이는 가운데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 봉애(손숙 분)를 지키기 위해 준영을 이용하고, 동훈을 미행하고 도청합니다. 삶에 지쳐 있음에도 생존에 악 받쳐 타인에게 냉담하고 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바란 채 자신을 희생하며 죽어 있는 사람. 증명하는 삶을 사는 인간은 비참하고 처절했으며 안타깝고 슬펐습니다.


동훈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더군요. 현실적인 측면에서 동훈은 구조기술사로 대형 건설사의 부장이며 변호사인 윤희(이지아 분)와 결혼해 아들 지석(정지훈 분)을 유학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재력도 있는, 중산층 중에서도 상류층에 가까운 중산층입니다. 삶의 방식에서도 친구인 겸덕(박해준 분)의 말처럼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정답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모든 사람들에게서 알게 모르게 믿음과 사랑을 받는 동훈은 현실에 있다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일 겁니다. 하지만 동훈이 지안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동훈은 지안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죠. 하지만 물질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정신이라고 봤을 때 정신적인 측면은 지안과 동훈은 크게 차이가 없었어요. 몸이 천근만근이라는 동훈에게 마음이 천근만근이라는 겸덕의 답에서 알 수 있듯 동훈은 모든 것을 담아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인생의 어느 한 구석도 두고 싶지 않은 인간인 준영,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내 정치에 휘말려 받은 부당하고 억울한 감사, 준영과 외도를 하며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윤희, 답답함을 넘어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윤희와의 결혼 생활, 자신을 대놓고 싫어하며 괴롭히는 상태 등. 자신을 미워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인간들에게서 오는 물리적 짐 혹은 감정적 부담을 감내합니다. 오죽하면 다른 누가 죽을상이어도 꿈쩍 안 하는 기훈이 동훈이 죽을상을 하면 겁부터 난다고 할까요. 이런 동훈에게 겸덕은 희생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답에 가까운 삶을 살면 뭐할까요. 동훈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은 괜찮다는 것을, 자신은 아무렇지 않으니 함께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란 것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동훈도 비참하고 처절하며 안타깝고 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렇기에 동훈과 지안은 서로가 자신과 똑같이 비참하고 처절하며 안타깝고 슬픈 삶을 살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직되어 있다는 것 알아봅니다. 지안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에도 외로워하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듯한 동훈이 지겹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동훈은 모든 이들에게 발톱을 세운 채 차갑게 대하는 지안이 상처가 많아 측은함을 느끼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서로를 비슷하게 바라보는 둘은 동상이몽으로 관계를 시작합니다. 채권자인 광일(장기용 분)에게서 벗어나 할머니와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지안은 준영에게 동훈을 퇴사시켜 주겠다고 하며 동훈을 미행하고 도청합니다. 동훈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삶에 더 들어오려는 지안이 유혹처럼 느껴지기도 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동상이몽은 서서히 하나로 모입니다. 지안은 도청을 통해 지겹고 불행한 삶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감내하는 와중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측은하지만 착한 아이라 말하는 동훈을 알게 됩니다. 준영과 동훈을 이용해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동훈을 알고 싶어 하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며 동훈이 진심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동훈은 지안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도와주고 대신 울분을 토합니다. 지안을 대신해 그가 죄 짓지 않았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의 삶을 묵묵히 들어주고 위로해준 지안에게 감사해 합니다.

출처. 왓챠피디아

3. 증명으로 감내하며 증거로서 살고자 하는 결심

신부님, 기억하세요? 제가 신부님께 "저는 보통 이렇게 말하는데, 저는 사람을 믿지 않지만 사람을 믿는다고 많이 말해요." 라고 말했었죠. 저는 학창 시절 10년 동안 따돌림을 당하고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도 당했으며 믿음이 내팽개쳐 지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중2병이 심했던 시절에는 저의 죽음에 누구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절 그리워 하지 않을 테니 살건 죽건 스스로가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절 절망에 빠뜨린 사람이 미웠고 누구에게도 온전히 믿음을 줄 수 없었으며 그런 와중에 온전히 절 사랑하는 누군가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배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이런 모순된 마음을 가진 채 타인을 의심했고 저 스스로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30살이 되어서야 겨우 친한 사람 혹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제가 직접 '친구'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을까요. 그만큼 저에게 사람은 언제든 절 미워하고 배신할 변하지 않을 존재였기에 믿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친구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듯 절망에서 절 꺼내준 것도 사람이었습니다. 학부 때 알게 된 동기들과 선배들, 과거의 연인들, 연극을 하며 만난 이들, 대학원에서 맺은 인연들 등. 믿을 수 없고 그저 스쳐가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함께 하는 순간마다 저마다의 감정과 행동으로 저에게 이야기를 새기고 갔습니다. 절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그 이야기들에는 저를 향한 감정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라본 저를 온전히 생각하는 그 감정들은 저에게 사람은 결국 어느 순간 변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가능성 속에서 옳은 길로 차근차근 나아간다고 느끼게 했습니다. 국사 시간에 배웠던 불교의 수련법인 정혜쌍수와 돈오점수까지 들먹이며 신부님께 말했더랬죠. 저에게 사람은 정혜쌍수의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묵묵히 감내하다 돈오점수의 순간을 맞이해 도약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인간은 이미 존재 그 자체로 자기 자신임을 증거하고 있고 그렇기에 자신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순간순간 자신다운 선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습니다. 동훈과 지안처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온전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저에게는 어렵습니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지만 현실의 저는 여전히 사람이 무섭고 믿기 힘듭니다. 그래서 <나의 아저씨>를 보는 내내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토록 바라는 삶이 동훈과 지안을 통해 드러났는데 저는 그런 삶을 살기에는 마음으로 알고 있음에도 머리는 생각이 많습니다. 서로를 증거로서 대하며 있는 그대로 측은해 하면서도 행복을 바라고 정말 그럴 수 있게 상대를 대하는 둘의 방식을 살기에는 전 계속 사람을 무서워하고 괴로워하며 저 자신을 숨기려고 할 듯합니다. 아마 겉핥기이지만 오래 먹은 먹물의 영향도 있는 듯합니다만.  


그래서 저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타인에게 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 저를 증명해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 하는 삶에서 여전히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있으며 저 스스로가 먼저 그런 믿음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혜쌍수의 마음가짐으로 삶을 묵묵히 감수하면서 돈오점수의 순간 그러니까 증거의 순간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네, 아마 저는 끝없이 실패할 것이고 실패의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그 상처가 곪도록 스스로를 더욱 몰아칠 겁니다. 하지만 꿈처럼 짧은 성공도 할 것이고 성공의 순간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그 순간을 나누며 함께 있는 그대로 행복해 하기도 할 겁니다. 아마 실패의 순간에도 성공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단단히 하고 불완전하더라도 증거로서 타인을, 끝내는 저 자신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너 나 살리려고 이 동네 왔었나 보다. 다 죽어가는 너 살려놓은 게 나야."
"난... 아저씨 만나서 처음으로 살아봤는데."

(중략)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나의 아저씨> 16화 中
출처. 왓챠피디아

<나의 아저씨>를 보며 누군가는 청년 연하녀에 대한 중년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드라마라고도 하고 여성의 삶을 가학적으로 그리고 있는 드라마라고도 했더군요. 하지만 전 화를 다 시청했다면 과연 온전히 위와 같이 표현할 수 있을지, 아니 애초에 저런 평이 가능하다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리도 분노해 저리도 날카롭게 말을 하는지 궁금하면서도 측은하게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그만큼 저희의 삶은 서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은 너무나 슬픈 듯합니다. 서로에게 증명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가시를 크게 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돋친 가시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사람의 관계는 아름답게도 보입니다. <나의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가 서로를 살렸다고 말하는 동훈과 지안처럼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살리고 있는 증거라고 본능적으로 느끼기에 다가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에 다가가 누군가에게 정말 순수하게 행복을 바랐기에 할 수 있는 질문, "편안함에 이르렀나?"라는 질문을 하기 위해 저는 저 스스로에게 제가 생각한 삶의 방식을 차분하고 묵묵히 감내하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쓰러지려고 한다면 그 때 다른 사람을 찾겠습니다. 신부님을 찾겠습니다. 저희 집 근처 본당을 다니던 때 당시 주임 신부님께서 기도를 할 때 너무 구복적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신은 모두를 위해 있는데 왜 항상 자신을 위해서 뭘 해달라고 하느냐고 강론하셨죠. 그 때 이후 전 기도를 할 때 절 위해서 뭔가를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제가 힘든 순간 혹은 찾는 순간 잠시 동안의 조용한 버팀목으로 있어주세요 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도처럼 그저 조용히 저의 인생에 있어주세요. 저 역시 조용히 신부님의 인생에, 당신의 인생에 있겠습니다. 온전한 증거의 삶에 언젠가 도달할 가능성을 안고 함께 묵묵히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장과 춘몽의 이미지 사이를 부유하는 밀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