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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Mar 12. 2023

어느 영화광의 자기 고백 :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잠실. 롯데시네마. 바빌론.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이 발명되기 이전과 이후로 예술의 분기점을 잡을 수 있을 듯하다. 사진 이전의 예술은 모두 인간 본인의 육체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시는 종이가 없어도 쓸 수 있고 그림은 땅에 그릴 수도 있으며 조각은 돌로 돌을 깎아 만들 수 있다. 사진 이전의 예술은 이론적으로 혹은 의외로 현실적으로 인간 본인의 육체로 구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진 이후의 예술은 인간의 육체만으로는 구현될 수 없다. 구현하기 위해서는 육체와 현실을 매개하는 기계 장치가 필요하다. 사진은 카메라 없이, 영화는 카메라, 필름, 영사기 등의 다양한 기계 장치 없이 구현될 수 없다. 손에 쥔 스마트폰 하나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기는 했지만 애초에 스마트폰 하나의 가격도 만만치 않다. 현대로 오면서 예술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육체와 현실 사이의 매개체가 필요하다. 자본과 기술이다. 어느 시대건 예술에 자본과 기술이 결부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을 테지만 현대로 오면서 예술에 대한 자본과 기술의 영향이 과거에 비해 더욱 커진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사진 이후의 예술 중 영화만큼 자본, 기술과 관계를 맺은 복합 예술은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태생부터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사진‧영상 기술을 통해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더욱 쪼갠 이미지로 만든다. 애초부터 전체 세계를 볼 수 없어 겨우 사유만 하는 인간에게 영화는 인간이 보는 파편조차도 더욱 잘게 쪼개 보여준다. 말하고 나니 굉장히 섬뜩한 듯하지만 그렇기에 영화는 애처롭게 슬프면서도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현실에서는 인식할 수 없는 수많은 파편들이 때로는 의미를 가지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동안 인간은 흘러가는 파편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새로운 순간의 가능성, 파편 그 자체의 가능성, 무의미의 가능성 등. 비록 관객에 따라 기회를 어느 순간에 인식하게 될지 혹은 아예 인식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영화는 되풀이할 수 있는 흘러가는 파편이자 파편에서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에 매력적이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1. 자본과 기술을 부모로 둔 영화의 슬픔

영화가 슬픈 이유는 자본과 기술을 부모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과 기술은 영화를 각기 다른 영향으로 영화를 슬프게 만든다. 자본은 영화를 산업화 하는 것으로 영화를 슬프게 만든다. 영화에 활용되는 기술은 그 자체로 자본과 연관되어 있으며 자본은 사용된 것 이상의 자본을 요구한다. 즉, 기술이 없으면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는 최소한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자본을 요구한다. 하지만 언제나 한 줌이라도 더 많은 자본을 원하는 자본이 어떻게 기술을 사용할 정도의 자본만을 원하겠는가. 벤야민의 사유처럼 영화는 더 많은 대중에더 많은 순간을 보이기 위한 대량생산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대량생산 그 자체로서 영화는 산업이라는 이유로 기존의 예술과 구분되는 저급 예술, 아니 예술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저급 오락으로 불릴 뿐이다. 1920년대부터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부흥하기 시작한 영화 산업을 배경으로 하는 <바빌론>이 어두운 듯 화려하게 빛나는 주황색 불빛 아래 시뻘건 커튼이 드리워진 가운데 술, 섹스, 마약 등 모든 쾌락이 모여 천박한 파티가 열린 언덕 위 고급 저택에서 시작하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 산업에서 거국적이면서 고풍스러운 예술적 이상은 찾기 어렵다. 더 큰 유명세와 자본만을 탐욕스럽게 좇으며 날아드는 부나방들만 있을 뿐이다. 자본이라는 부모로 둔 영화는 겉으로만 화려할 뿐 속은 영화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곪은 욕망으로 가득해 슬프다.


하지만 영화가 슬픈 이유에서 자본은 외적 이유에 불과하다. 영화가 슬픈 또다른 이유는 기술이라는 내적 이유에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점은 카메라의 시점, 즉 샷에 종속되어 있다. 카메라의 렌즈에 담기는 세계는 이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24개의 지나간 파편이다. 영화는 그 24개의 지나간 파편을 다시 편집해 이어붙인다. 파편을 파편화해 만들어지는 영화는 이미 사라졌어야 할 누더기 괴물과 다름없다. 이미 사라졌어야 할 이미지를 이어붙이는 영화는 태양 아래에서 움직일 수 없는 흡혈귀이기도 하다. 태양 빛이 강렬하게 내려쬐는 낮에 영화의 찢어진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주 옅은 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영사기의 빛이 새벽 혹은 황혼의 빛처럼 비칠 때 영화의 파편들은 움직이게 된다. 이미 지나간 움직임인 영화의 파편들은 어둠 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죽어 있으되 살아있는 유령이다. 누더기 괴물. 흡혈귀. 유령. 원래라면 서서히 잊혀야 하는 과거가 눈앞에서 전체 움직임 중 그것도 일부만이 찢어진 채 어둠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기에 영화는 섬뜩함과 애처로움을 내재하고 있다. 기술을 부모로 둔 영화는 겉으로는 화려한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리저리 찢긴 데다 어둠이 아니면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과거의 움직임이기에 슬프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렇게 탐욕, 섬뜩함, 애처로움을 내재하고 있는 영화를 <바빌론>은 1920년대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영화 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한 할리우드에서부터 발견한다. 영화가 발생한 유럽보다 더 빠르게 대중에게 소비되는 미국에서 영화는 예술이라는 이름조차도 붙이기 어려운 대중 오락 취급을 받는 와중에도 그 어떤 예술보다 막대한 자본이 투자되는, 기이하고도 모순된 욕망의 도가니이다.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분),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 분), 시드니 팔머(조반 아데포 분)와 같이 수많은 부나방들이 당연히 자신도 성공할 것이라 믿으며 찾아오고 잭 콘레드(브래드 피트 분)처럼 이미 성공한 이들은 자신들의 성공에 도취해 온갖 향락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근거 없는 믿음은 찢어진 채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그들의 움직임처럼 밤에만 빛을 발한다. 고풍스럴운 클래식을 들으며 한 손에는 샴페인, 다른 손에는 핑거푸드, 연초, 부채 등을 들고 자신들의 예술적 지식을 뽐내며 젠 체하는 고급 예술의 사교 파티는 낮에 열리는 것과 다르다. 할리우드의 성공은 위로는 고급 예술을 즐기는 상류층의 자본에 의해, 아래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어둠 속에서 봐주는 대중의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자본에 종속된 유령들은 탐욕스럽게 부와 명예를 취하고 파티, 도박, 마약, 섹스로 허영을 채우고 허무를 견디는 와중에 그들이 영원히 빛나는 외로운 별(Star)이라 착각한다. 흑인 재즈 연주가인 시드니는 화면에서 백인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흑인임에도 검은색 분으로 칠해야 하는 장면은 영화계의 스타들이 실제로는 자본에 종속된 유령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단적이면서도 충격적으로 드러낸다. 엘리너 세인트 존(진 스마트 분)이 잭 콘레드에게 일갈하듯 그들은 언제든 무너질 준비가 된 바빌론의 탑 위에서 대중이 어둠 속에서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허락할 때만 빛날 수 있는 망령된 별일 뿐이다. 심지어 제임스 맥케이(토비 맥과이어 분)처럼 영화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며 더욱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망령된 자본까지 영화계로 몰려든다. 자본과 기술에 휘둘리는 영화는 온갖 허영과 허무에 허우적대며 빛나는 별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는 찢긴 채 움직이는 이미지, 영화는 슬프다.

출처. 왓챠피디아

2. 영화는 슬프지만 파편으로 빛나고 있어 아름답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수많은 영화와 함께 결혼 스캔들을 남긴 잭은 젊은 호텔 직원에게 미래는 이제 당신의 것이라고 말하며 화장실에서 자살한다. 누구나 성공과 비전을 맞이할 수 있는 영화판에서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한 멕시코 청년 매니는 허영과 허무에 허우적대면서도 탐욕스럽게 돈과 명예에 취한 영화를 목도하는 순간 살기 위해 바지에 오줌을 지리면서 목숨을 구걸하고 사랑하는 넬리를 둔 채 도망친다. 자신은 날 때부터 스타라고 말하고 실제로 성공한 넬리는 유성 영화의 시대에 도태된 채 도박과 마약에 찌든 채 이미 찢긴 몸을 할리우드의 어둠 속으로 서서히 밀어넣으며 서서히 사라진다. 성공의 광기에 몸을 맡긴 채 고공 행진하던 그들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키노스코프를 방문한 매니는 정리하지 않은 수염에서 알 수 있듯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않다. 할리우드에서 도망친 그 날부터 매니는 이미 살아있는 시체와 다름없다. 매니와 비슷하게 이미 시체가 되었으나 필름에 기록된 채 여전히 움직이는 잭과 넬리 역시 살아있는 시체이다. 어딘가 뒤틀린 채 현실에 살아있는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찢긴 채 움직이는 이미지로 채워진 영화에 가장 가깝게 맞닿아있다.

출처. 왓챠피디아

아마 할리우드에서 도망친 밤부터 쳐다 보지도 않았을 영화를 매니는 키노스코프를 방문한 그 날 다시 보게 된다. <사랑은 비를 타고>. 무성 영화가 아닌 유성 영화이다. 무성 영화의 시대를 풍미한 매니에게 유성 영화는 새로운 성공을 예감하게 했으나 결국 자신을 실패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애증의 대상이다. 자신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준 잭과 넬리가 도태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증오스러운 대상이다. 애증과 회환의 눈물이 매니의 얼굴에서 흐른다. 이미 죽은 이들의 얼굴이 그의 머리를 스쳐간다. 그 순간 매니는 깨닫는다. 잭과 넬리는 살아있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는 것을 허락받는 유령이지만 그들은 필름에서 영원히 살아있다는 것을. 그들처럼 수많은 무성 영화가 여전히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무성 영화만이 아니라 유성 영화도 변화를 거듭하는 와중에 여전히 남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부터 채플린의 무성 영화와 5, 60년대 유성 영화를 지나 <터미네이터 2>, <쥬라기 공원>, <아바타> 등 오늘날의 영화까지. 자본과 기술을 통해 끊임없이 다양한 파편을 이리저리 기워 만들어지는 영화는 영원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크고 중요하면서도 영원한 흐름의 일부로서 영화는 끝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선보인다. 자본과 기술의 비를 맞으면서 힘겨워 하면서도 영화는 웃으며 목놓아 외칠 것이다. "난 살아있다."


수많은 파편들이 그 자체로 혹은 다른 파편과 연결되는 와중에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며 빛난다. 단순히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그 짧은 순간마저도 인간은 인지해본 적 없는 감각을 느끼며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다. 오늘날에 와서는 스크린을 넘어서 스크린 안으로 인간을 끌어들여와 물에서 헤엄치게 한다.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체험하는 것으로 현실을 다시 보게 한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파편들은 자본과 기술에 종속되어 있지만 그런 종속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살아숨쉬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누군가에게는 어떤 순간을, 누군가에게는 파편의 연결을 각인시킨다. 태양 아래에서는 볼 수 없는 찢긴 유령들의 움직임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는 것 때문에 현실의 움직임보다 더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 전작 <라라랜드>보다 더한 라라랜드를 그리며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데미언 셔젤 감독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당혹스러우면서도 일견 수긍하며 빠져들 수밖에 없다. 파편을 더욱 쪼갠다면. 파편 사이에 다른 걸 끼워 넣는다면. 파편에게 사랑을 느끼는 와중에 느껴지는 가능성의 자극은 우리가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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