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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Nov 15. 2021

왜 <죄와 벌>이어야만 했나

서울미래연극제. <죄와 벌: 파란 관성의 시대>

코로나19 사태가 닥치기 직전, 학교에서 대본을 쓰는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각자 자신의 글에 대한 기획서부터 시작해서 한 편의 대본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한 모임이었다. 그 당시 모임을 주도하신 선생님이 필자의 기획서를 보고 하신 말씀이 있다. “왜 이 주제를 굳이 각색본에 담으려고 하세요?” 당시 각색하고 싶었던 대본은 아서 밀러의 <시련>이었는데 왜 굳이 각색으로 자신의 주제를 표현하려고 하느냐는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각색이건 창작이건 상관은 없으나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시련>이라는 텍스트를 각색하는 것이 주제를 표현하는 것에 적절하다고 할 수 있는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도 <시련>이어야만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면 왜 굳이 각색을 하는가? 소재를 주제화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라는 행위에서 주제를 어떤 형식으로 전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죄와 벌: 파란 관성의 시대>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각색한 연극이다. 원작 <죄와 벌>은 한 인간이 스스로를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는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얼마나 큰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 와중에 다른 타인의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서 희망을 느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이라는 초인에 대해 경도당한 인간들에 대한 경고이자 오직 타인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 존재를 고찰한 원작과 달리 <죄와 벌 : 파란 관성의 시대>는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의 여동생 두냐에 초점을 맞춰 두냐에게 가해지는 권력의 폭력과 그러한 권력의 폭력을 유지하는 권력 간 영합에 따른 폭력을 그린다. 개인과 사회라는, 서로 다른 두 층위를 주목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권력의 폭력과 사회의 부패를 주목하는 <죄와 벌: 파란 관성의 시대>는 굳이 <죄와 벌>을 각색할 필요가 있었는가?

<죄와 벌>이라는 텍스트 자체는 이름은 유명하지만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800쪽 이상의 원작을 읽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은 익숙해도 내용을 모르는 원작을 각색한다면 그만큼 준비가 탄탄해야 한다. 다루고 싶은 주제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주제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 탄탄하게 준비했는지는 모르겠다. 우선 텍스트의 배경이 여전히 러시아다. <죄와 벌: 파란 관성의 시대>의 주제인 권력의 폭력과 사회의 부패는 러시아가 아니라 한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어느 국가를 배경으로 해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주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닳고 닳은 주제다. 그런 닳고 닳은 주제를 조금이라도 색다르게 보이려고 정한 것이 <죄와 벌>의 각색이라면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원작에 친밀감이 낮은 관객에게 마찬가지로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연극은 이해하기 위한 피로감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내용을 거의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피로도가 낮을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필자도 원작의 내용을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는 새로운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관객의 흥미를 높이기 위해 <죄와 벌: 파란 관성의 시대>는 암전이 반복될 때마다 대도구와 배우에 의해 공간을 형성한다. 무대 위에 설치된 대도구를 어떤 인물이 등장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무대에서 현동하는 공간이 바뀌는 것이다. 무대 위 공간은 매 순간 바뀌며 배우의 연기를 통해 생동감으로 가득 찬다. 어둠과 죄로 가득한 스비드리의 저택이 되기도 하고 권력이 영합하는 경찰서가 되기도 하며 긴장감이 넘치는 마차 추격씬이 되기도 한다. 무대가 변화할 때마다 배우들은 몸을 날리거나 계단 아래에서 두려움에 떨거나 다른 배우에게서 도망 다닌다. 무대는 배우들의 육체로 꽉 차고 관객은 배우의 생동감을 느끼며 공연에 몰입하게 된다.

하지만 무대 공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흥미를 가지고 무대를 바라보면서도 피로감은 높아진다. 2개의 트램펄린, 작은 계단 대도구, 바닥에 가득 깔린 종이조작, 카트 한 개가 전부인 무대 공간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무대를 관객이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어색함은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피로감을 준다. 그런 와중에 무대 공간은 암전이 될 때마다 새로 해석해야 한다. 약 120분의 시간 동안 암전이 정말 많다. 심지어 대도구 옮기는 것이 암전 상태에서도 희미하게 보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실시간으로 공간이 변화하는 것을 시청각으로 느낀다. 조명이 켜지는 순간 무대 공간은 어떤 곳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암전 당시 시청각에 의한 피로감이 더욱 커진다. 권력과 사회를 다루는 거시적이면서도 흔한 관점이 러시아라는 어색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것이 피로한 관객은 암전과 공간 변화라는 반복에서 다시 더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

하나의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 적어도 주제를 전달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주제만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과정이 없으면 전달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 된다. 주제와 합치하는 형식으로 주제를 적절하게 전달해 타인이 편안하게 주제를 인지할 수 있다면 타인이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더 편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 잘못된 주제는 없어도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잘못되면 결국 주제 자체도 잘못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관객의 불편함조차도 주제에 합치된다면 불편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가 되어 전달되기 때문에 관객도 편한 상태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죄와 벌: 파란 관성의 시대>는 피로한 연극이다. 흔하다면 흔한 주제를 잘 알지 못하는 어색한 원작을 각색하면서도 여전히 배경도 어색하며 연극의 전개는 너무 정해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관객을 피로하게만 한다. 왜 <죄와 벌>이어야만 했는가? <죄와 벌>이어야만 했다면 어떻게 전달해야 했는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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