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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May 01. 2023

용의 승천 : 신파와 모성의 이름으로

넷플릭스. 동백꽃 필 무렵.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용이 하늘로 승천할 때는 폭풍이 온다고 한다. 하늘로 올라 세상을 누비며 온갖 조화를 부릴 존재가 탄생하는 경사가 재앙으로 시작하는 아이러니. 용이 되기 위해 무려 1000년 동안 수련을 하는데 승천하는 날만큼은 좀 맑아도 되는 것 아닌가? 심지어 오르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들켜 "와, 뱀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 1000년을 수련해야 한다고 한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면 놀라 바짝 엎드릴 법도 한데 빳빳하게 고개 쳐들고 하늘을 보는 인간도 대단하지만 그런 인간에 의해 흔들리는 탄생의 순간이라. 용의 탄생은 1000년의 인내에도 모자라 탄생의 순간까지도 스스로를 숨겨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오랜 수련의 시간에 이어 경사라고 할 수 있는 순간까지 스스로를 숨기고 인내해야 하기에 하늘에 오르는 순간만은 재앙과 같은 폭풍으로 참아 왔던 모든 감정을 분출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용의 승천은 한국 콘텐츠의 양날의 검인 신파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승천하는 그 순간에 모든 감정을 폭발시키기 위해 온갖 고통을 수련과 승천의 그 순간에까지 배치한 듯하다. 


감정을 인내하고 억압하다 승천하며 폭풍으로 모든 감정을 분출하는 용. <동백꽃 필 무렵>에서 이러한 용의 모습을 본다면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동백꽃 필 무렵>은 이러한 용의 승천 과정에서 시작한 듯하다. 제목처럼 <동백꽃 필 무렵>은 수련이 거의 끝난 용이 승천하기 직전, 그러니까 굽이굽이 접히고 꼬인 동백의 인생이 피기 직전의 역경을 다룬다. 가상의 충청도 어촌 옹산에서 이렇게까지 운이 없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동백이 겪는 역경은 관객에게 답답한 안타까움의 응어리를 쌓게 한다. 심지어 모성까지 두껍게 쌓이면서 안타까움의 응어리는 답답한 눈물까지 흘리게 한다. 응어리와 눈물 속에서 예고된 해피 엔딩은 의심되어 도무지 길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무릇 신파의 매력이란 모든 고통과 의심이 새드 엔딩을 예고하는 것 같아도 관객이 인물과 함께 결국 해피 엔딩에 도달해 서사의 레이스를 마치는 것 아니겠는가. 신파와 모성의 현란한 드리블 속에서 알고도 당하는 페인트라. 항상 욕을 먹는 신파와 모성을 대놓고 썼음에도 너무 아름다워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동백꽃 필 무렵>은 신파 연출의 교본과 같은 드라마라 할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1. 억압과 분출의 신파와 한국의 정한(情恨)의 문화

<동백꽃 필 무렵>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신파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며 신파를 얘기하려면 이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하다. 다음 질문에 답해보자. 


신파는 무엇인가?


신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래서 정확히 신파가 무엇인지 답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구체적인 예시는 생각나는데 신파 자체는 구체적으로 정의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대중의 관점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신파를 주요 소재로 대학원 졸업 논문을 쓸 당시 기존의 신파 연구를 살펴보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학계에서도 신파를 명확히 정의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1910년대 이래로 약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에서 존재한 신파가 실제로는 아사모사하게 통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다. 아니, 오히려 무섭다고 해야 하나? 오래 전부터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왔고 나름의 예시도 쌓여왔지만 실상 아무도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말하지 못한다니. 귀신에게 홀린 것일까? 그럼에도 신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신파를 조금은 다르게 보려는 시도가 일어났으며 나아가 어느 정도 정의가 되기도 했는데 몇 가지 키워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족주의, 명확한 선악 구도, 고통, 자학과 자기 연민, 과잉된 눈물


이러한 키워드를 엮어 구체적으로 풀어쓰면 신파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공동체주의를 기반으로 명확하게 선한 것으로 판단되는 인물이 명확하게 악한 것으로 판단되는 인물에 의해 고통 받으면서 선한 인물은 자신의 고통에 의해 자학과 자기 연민에 빠지다 고통을 더 이상 참지 못할 때 과한 눈물로 이를 해소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완벽하게 정의된 것은 아니지만 참고는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정의에서 신파의 중요한 특징을 두 개의 키워드로 요약하면 억압과 분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파의 핵심은 감정을 억압해 가장 적절한 순간까지 모아뒀다가 터뜨리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파의 두 키워드는 가족 중심의 한국 공동체주의와 쉽게 연동된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으나 여전히 가족은 한국 사회에서 물리적‧정신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억압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공동체주의에 의한 억압으로 구체화할 수 있으며 이를 한(恨)과 연결할 수 있을 듯하다. 한의 감정은 분노, 그리움, 슬픔 등 복합적인 부정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되 이를 속에서 응어리지도록 참으면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신파의 억압과 연결할 수 있다. 성인이 된다고 해도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굉장히 늦을 뿐만 아니라 벗어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익숙한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개인을 억압해 한의 감정을 형성하는 기반인 것이다. 반면 분출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공동체주의를 위한 분출로 구체화해 정(情)과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 감정은 사랑, 행복, 기쁨 등 복합적인 긍정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표현하면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신파의 분출과 연결할 수 있다. 즉, 개인은 억압되어 있던 한의 감정을 분출해 가족과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반대로 기존의 가족과 화해하거나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면서 더욱 끈끈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사실 신파와 한국의 정한 문화가 연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온전히 분리된 개념인지는 명확하지 않. 애초에 신파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신파극이라는 연극의 일종으로 시작되었다가 1930년대 이후 단순한 극의 형태를 넘어 하나의 미적 특질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공동체주의는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긴 역사를 지닌 왕조들로 형성된 역사적 특성, 한중일 3국의 역사적 관계 등이 결합하면서 형성된 것이라 봐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에 기반한 정한이라는 한국만의 독특한 감정 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즉, 역사적으로 발생한 시기를 보면 한국의 정한 문화와 신파는 분리된 개념이며 연동되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전통 연희나 고전 문학을 살펴보면 정한 문화 자체가 애초부터 신파의 억압과 분출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일부 상위 계급의 남성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사회구조에서 가족은 한국 사회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을 위한 기반이되 동시에 사회구조를 유지해 개인을 억압하는 기본 단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한 문화와 신파는 애초부터 융합되어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은 아니었을까? 어찌 됐든 신파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공동체주의와 쉽게 연동되어 작동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2. 모성과 신파의 정한 : 공동체의 유지와 확장 

<동백꽃 필 무렵>의 서사는 현실의 한국 사회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신파의 특성인 억압과 분출이 드러나기에 적합하다. 특히 한국의 전통 공동체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쟁점인 모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 신파는 더더욱 힘을 얻는다. <동백꽃 필 무렵>의 신파가 펼쳐지는 옹산의 게장 골목을 살펴보자. 게장 식당들로 가득한 옹산의 게장 골목은 한 다리 건너면 친구거나 사돈이요, 두 다리 건너면 사돈의 팔촌이다. 한 지역 안에 혈연, 지연, 학연 등 모든 연이란 연이 모인 공동체. 전날 누구네 몇 째 아들이 누구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더라. 누구에게 돈을 빌린 누구네 집 누구가 돈을 갚지 못해 어제 맞았다더라. 집집을 가르고 있는 담과 문이 무색하게 별의별 이웃의 사정이 입과 귀를 넘나든다. 옹산의 공동체는 현대의 한국 사회보다 전통 한국 사회에 가까운 것이다.  


모성은 옹산의 전통 공동체적 특성을 더욱 강화한다. 옹산 공동체의 주도권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게 있다. 집안 대소사의 결정권은 억척스럽게 집안을 이끌고 온 여성들에게 있으며 남성들은 등짝을 안 맞은 하루면 다행으로 넘어가는 어촌이다. 드라마의 1화에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의 눈을 피해 놀 것인지를 궁리한다. '저렇게까지 놀아야 하는 건가?'하며 한심하다 싶으면서도 눈칫밥 먹으며 사는 것이 웃프기도 하다. 얼핏 보면 옹산의 공동체는 가모장제 공동체인가 싶다. 하지만 실상 이 골목의 여성들은 모두 억척스럽게 한 집안을 건사하는 어머니로서 자신이 자리 잡은 곳을 떠나지 않는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집이기도 한 식당에 꼿꼿하게 박힌 채 식당 바깥에서 생활하고 오는 남편과 자식들, 특히 주로 아들들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 골목은 가모장에 의해 통솔되는 곳이 아니라 여성의 탈을 쓴 가부장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골목인 것이다. 

출처. KBS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가모장을 가장한 가부장 사회인 옹산에서 모성은 그 억척스러움 때문에 공동체를 더욱 단결시킨다. 모성은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모성은 돌아올 이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이 위치한 곳을 가꾸고 보존하는 보수성이다. 그렇기에 옹산 공동체는 게장 식당, 쌀가게, 떡집 등을 운영하는 여성들에 의해 가꿔지고 보존된다. 이런 가운데 옹산 공동체 각자의 사정은 골목에 박혀 남편과 자식을 기다리는 여성들의 눈과 귀로 흘러 들어간다.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다같이 모여 상대방 뒷담화를 하기도 하고 일부러 앞에서 쪽을 준다. 보수적인 모성은 자정 활동을 통해 공동체를 헤치는 요소를 배제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한다. 하지만 모성은 보수적이기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상호작용한다. 상대의 사정을 알게 된 이상 여성들은 그것을 보고만 있지 않는다. 이미 알게 된 이상 찝찝하고 그동안 쌓인 고운 정과 미운 정 때문에라도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자 한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워한다고 그렇게 축 처져 있으면 더 보기 싫으니 일부러라도 더 부대끼라고, 필구(김강훈 분)를 자신에게 맡겨야 자신도 준기(김건 분)를 맡길 것 아니냐고 말하는 찬숙(김선영 분)의 말은 억척스러운 모성으로 단결한 옹산 공동체를 대변한다.


결과적으로 모성은 이웃 간의 정과 한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전통 공동체인 옹산을 유지하면서 확장하는 원동력이다. 옹산에서 어제는 보고만 있어도 좋은 이웃이 오늘은 보는 순간 답답해지는 웬수가 되기도 하는 이유는 모성에 있다. 모성의 보수성은 자기 식구 챙기기라 할 수 있다. 모성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식구가 되어야 한다. 한 식구가 되어 이리저리 부대끼며 동전의 양면인 정과 한을 쌓아야 한다. 한없이 아낄 수도, 한없이 미워할 수도 없는 식구. 옹산 공동체의 모성은 공동체를 헤치는 이들은 배제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상호작용하며 헤치는 이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가족과 자식에 대한 사랑, 즉 자기 식구에 대한 사랑인 모성은 곧 같은 공동체의 일원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정반합을 주장한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모성은 바로 그 정반합의 원리와 같은 신파의 정한을 통해 공동체의 유지와 확장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새로운 공동체로 도약한다. 


3. 토끼와 용의 로맨스는 신파를 타고 

이처럼 모성에 기반한 전통 공동체인 옹산 공동체에 <동백꽃 필 무렵>은 동백과 용식(강하늘 분)의 낭만적인 로맨스를 덧붙여 신파를 더욱 강화한다. 로맨스의 상극인 모성은 가장 큰 장애물로서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와 맞부딪히며 서사의 긴장도, 즉 억압의 에너지를 생성한다. 이와 같은 억압의 에너지는 동백과 그의 터전인 까멜리아가 옹산 공동체의 경계에 위치했기에 발생한다. 눈치 보지 않고 놀기 위해서 자신들의 공동체와 연이 없는 이가 운영하는 장소가 필요한 옹산의 남인들. 그들에게 동백의 까멜리아는 음식도 음식이지만 옹산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외부인인 동백이 운영하는 곳이다. 어디서 헛짓거리 하지 않을까 감시해야 하는 느작 없는 남인들 덕분에 속 터지는 옹산의 여인들. 그들에게 동백은 미혼모이기에 공동체의 물을 흐릴지도 모를 비정상적인 어미이자 남성들의 헛짓거리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즉, 동백은 옹산 공동체의 경계에 위치한 인물이다. 돌아올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자신이 위치한 곳을 억척스럽게 지키는 보수적인 모성이 보기에 경계에 위치한 동백과 까멜리아는 단결되어 있는 공동체를 헤치는 인물이자 공간이다. 


드라마의 시작에서 용으로 지칭되는 동백은 용임에도 어린 시절 엄마 정숙(이정은 분)에게 버려진 고아이자 아들 필구를 둔 미혼모라는 자신의 처지와 팔자 때문에 이미 타인에게 억압당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동백에게 모성에 기반한 전통 공동체인 동백에게 타인의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대는 것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며 죄지은 듯 눈을 내리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몸에 밴 습관과 다름없다. 외부에서 보기에 술 파는 곳인 까멜리아의 공간적 특성을 잘 알고 있기에 눈치보기, 눈 내리깔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등은 더욱 심해진다. 옹산 서열 1위로서 토끼인 용식의 든든한 보호자인 덕순(고두심 분)은 동백의 베프이나 동시에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하다. 젊어서 남편을 여읜 과부였기에 덕순은 누구보다 동백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동백이 자신의 삶을 살기를 응원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덕순도 한국의 엄마이기에 미혼모이자 까멜리아의 사장인 동백이 며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마음 한 켠으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타들어가는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모진 말로 동백과 필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러나 모성이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에 장애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모성은 공동체 내부에서 갈등하며 미운 정을 쌓은 둘의 로맨스가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동백과 용식에게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모성과 맞부딪히며 억압당하던 로맨스는 모성에 의해 분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덕순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가장 큰 지원군도 덕순이다.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팔자 타령의 주전부리가 되는 과부와 미혼모이기에 덕순은 동백에게 동변상련을 느낀다. 하지만 단순한 동변상련이 아니라 동백은 자신과 비슷한 미혼모이면서 엄마에게 버려진 고아이기에 덕순에게 동백은 수양딸과 같은 위치에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단순히 동백을 향한 용식의 고집스러운 사랑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용식에 의해 조금이나마 행복한 삶을 꿈꾸며 용식과 연애를 하고자 하는 동백의 마음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정히 용식과 결혼한다면 아주 귀하게 맞이하겠다는 덕순의 모습은 동백의 새로운 엄마와 같다.


덕순만이 아니라 찬숙을 비롯한 옹산의 여인들도 미운 정을 느끼고 있는 동백이가 까불이에게 해코지를 당하면 찝찝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 동백이는 공동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정네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여우(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시각에서만이다.)이다. 하지만 그런 여우 같은 동백이가 공동체의 경계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시야에 무려 6년 동안이나 보였다. 즉, 동백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만 텃세를 부릴 수 있는 미운 동생이다. 종렬(김지석 분)과의 관계를 파려고 외지에서 온 기자들조차 한따가리 해서 확 조사부렀는데 까불이 같은 어디 개놈의 잡놈이 감히 "나만 미워할 수 있는 예쁜 내 동생을?!" 옹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옹산의 오랜 골칫거리이자 미스터리인 까불이를 붙잡기 위해 이른바 옹산 네트워크를 가동하는 용식이를 보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던 모성은 공동체의 일원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덕순이 동백에게 새로운 엄마라면 찬숙을 비롯한 옹산의 여인들은 동백에게 새로운 자매와 같다. <동백꽃 필 무렵>의 로맨스와 모성의 갈등 속에서 필구를 제외하면 가족이라고는 없던 동백이 가족을 갖게 되는 과정은 더욱 가열차게 역동하며 억압에서 분출로 나아가는 비약의 에너지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세상의 역경에 이리저리 괴로워하며 하늘을 날아오를 생각을 못하던 용이 자신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토끼를 만나 처음으로 하늘을 바라게 된 이야기. 토끼 옆에서 깐족대는 여우들과 토끼 뒤에서 용을 노려보는 호랑이의 도움닫기를 통해 하늘로 비약하는 이야기.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계속해서 참고 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끝끝내 속에 응어리진 그 인내를 슬픔과 기쁨이 가득한 울음으로 승화해 분출하면서 가능하다. 물론 <동백꽃 필 무렵>에서 신파는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만이 아니라 극 전반에 내재되어 있다. 자신을 버린 엄마 정숙의 과거, 그런 정숙과 화해하는 동백, 동백의 곁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아보고 싶어진 향미(손담비 분), 옹산의 대표 소인배이자 꿈도 야무진 무식한 규태(오정세 분)의 성장기, 그런 규태의 곁에서 걸크러시를 선보이는 자영(염혜란 분)의 행보 등. 적재적소에서 수많은 인물들의 개별 서사가 각자의 서사와 전체 서사에 내재한 억압의 에너지와 분출의 에너지를 조절하며 서사의 신파를 강화한다. 만약 이 드라마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서사 속에 응집되고 잘 짜여진 신파가 뿜어내는 에너지의 역동을 음미하길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용과 함께 하늘을 오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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