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atchTal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zetto Jul 22. 2023

이상적인 허무와 현실적인 희망 사이

광화문. 씨네큐브. 슬픔의 삼각형. 더 메뉴.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블랙코미디 장르만큼 제 살을 깎아먹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 누구건 간에 익살과 유머의 소재로 사용되고 누구나 풍자와 해학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블랙코미디는 결과의 미학이 아니라 과정의 미학으로 즐겨야 한다. 자기 자신을 대상화해 비웃음과 파안대소를 날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그 아이러니의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면 블랙코미디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장르이다. 블랙코미디의 끝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허무로 가득하고 한참을 웃음에 쓰고 난 뒤 관객의 육체는 그 허무에 쉽게 잠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와 같은 블랙코미디 영화를 보고 어쩔 때는 피식거리고 어쩔 때는 파안대소를 했음에도 영화관을 나서면서 찝찝하고 축 처지는 기분이 든 이유도 바로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 탓일 게다. 블랙코미디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영화에 집중하면서 자기 자신을 잠시 잊게 되지만 영화의 스크린에는 영화의 서사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함께 부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슬픔의 삼각형>은 의외로 찝찝하고 축 처지는 기분이 덜했다. 작년에 본 <더 메뉴>와 비교하면 <슬픔의 삼각형>은 영화 내적으로 완성도가 더 나은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그럼에도 <더 메뉴>와 비교하면 찝찝하고 축 처지는 기분이 비슷했다. 심지어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나서는 허무감을 느끼는 것보다 왜 이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지 의아하다는 몇몇 평론가들의 글이 먼저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공감이 가기도 했다. 완성도 측면에서 <더 메뉴>보다 더한 허무감에 허우적대야 정상일 <슬픔의 삼각형>은 가성비 측면에서 <더 메뉴>보다 못한 블랙코미디 영화인 것이다. 물론 두 영화 중 한 번 더 본다면 뭘 보겠느냐는 질문에는 <슬픔의 삼각형>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울기는 하나 애초에 두 영화 모두 다시 보기에는 아주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이렇듯 가성비의 측면에서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고 최고로 권위 있는 상의 수상에 의문이 들기도 하며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도 크게 동하지 않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인한다. 허무감에 허우적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떤 희망을 엿보게 하는 듯한 마지막 장면말이다.


1. 가장 이상적으로 허무를 말하는 슬픔의 삼각형의 이중성

<슬픔의 삼각형>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하다. '아비게일'(돌리 데 레온 분)과 '아야'(샬비 딘 분)가 지나간 산길을 급하게 헤치며 달려가는 '칼'(해리스 딕킨슨 분). 바로 직전 사람 머리만한 돌을 들어올려 해변가를 바라보는 아야의 뒤로 다가가는 아비게일의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아이러니의 긴장이 달리는 칼과 함께 갑자기 사라지는 기분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계급과 계층의 전복을 3부에 걸쳐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 특성상 호화 크루즈에서 일개 청소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표류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아비게일이 이른바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절망과 분노로 아야를 죽이려는 듯한 결말은 관객들에게 공감과 반감이 동시에 드는, 더할 나위 없는 허무에 빠지게 하는 결말이다. 생각해보라. 내일의 희망은 커녕 차별과 멸시로 가득한 지옥같은 지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 비록 살인이 과격한 수단일지라도 그 수단을 선택하는 것에 공감은 아니더라도 약간의 이해, 그보다 못해도 인지조차도 못해주는가? 도덕적 옳음의 잣대가 흔들린다는 점에서 아비게일의 절망과 분노를 담은 돌은 관객에게 뻔하지만 효과적으로 허무를 유발할 수 있다. 그런데 루벤 외스툴룬드 감독은 어찌된 일인지 영화의 마지막 시선을 돌이 아니라 칼의 달리기로 옮긴다.

출처. 왓챠피디아

달리기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슬픔의 삼각형>에서 말하는 슬픔의 삼각형이 무엇인지 보자. <슬픔의 삼각형>에서 슬픔의 삼각형은 1부에서 딱 한 번 언급된다. 패션 브랜드의 모델 선발에 참가한 칼에게 워킹을 시키는 브랜드 심사위원들 중 한 명이 칼에게 이마와 콧잔등 사이의 찡그려지는 슬픔의 삼각형 좀 펴보라고 말한다. 한국의 먹잘알 성시경 씨는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해서 찡그린다고 하지만 사실 이 삼각형은 보통 불쾌가 은연 중에 혹은 대놓고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부위인 것이다.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즉 다른 타인이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을 때 불쾌가 표현된다는 점에서 슬픔의 삼각형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신체 반응인 것이다. 하지만 슬픔의 삼각형으로 자신의 불쾌를 대놓고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자본에 의해 획득한 육체적, 심리적 활동 반경이라 할 수 있다. 즉, 육체적, 심리적 활동 반경이 좁은 이가 불쾌를 표현하는 것은 역성혁명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존재라 하지만 슬픔의 삼각형은 그러한 동등성을 내포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현재의 사회가 얼마나 불공평한지를 육체적으로 드러내는 이중적인 부위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렇기에 영화에서 슬픔의 삼각형을 자유자재로 찡그려는 이들은 최상위 계급 혹은 계층이다. 그 밑의 구성원들은 자기 혼자 있을 때도 슬픔의 삼각형을 제대로 찡그리지 못한다. 어디서 누군가 슬픔의 삼각형을 찡그린 자신을 보고 상대적 선임자에게 알려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렇듯 <슬픔의 삼각형>은 슬픔의 삼각형이라는 개인적인 신체 부위를 불평등한 사회 구조와 연결하면서 피라미드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위선을 끊임없이 고발한다. 영화의 고발에 관객들은 웃지만 앞서 말했듯 이러한 고발-웃음의 과정은 모두 영화와 관객 사이 외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의 내부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현실에서도 필자를 포함해 관객 개개인은 모두 자본주의의 상대적 피라미드 구조에서 타인의 슬픔의 삼각형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1, 2부를 지나 3부에서 무인도에 표류한 크루즈 승객들의 피라미드가 뒤집히는 모습이 관객들에게 환호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는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피라미드는 뒤집혔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슬픔의 삼각형을 찡그릴 수 있는 이는 아비게일 한 명이며 다른 구성원들은 아비게일의 눈치를 보며 서로를 억압할 뿐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상징인 슬픔의 삼각형이 사실은 절대적 자유와 평등의 불가능성을 보이는 것이라는, 애초부터 사회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먹지 못한 존재라는 가장 이상적인 허무 속에서 영화도 관객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킬킬댈 뿐이다.


2. 이상적인 허무와 현실적인 희망 사이를 부유하는 무책임함

출처. 왓챠피디아

그러나 앞서 말했듯 <슬픔의 삼각형>은 어찌된 일인지 더 깊은 허무로 관객을 끌고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허무의 맥을 끊어버린다. 아니 단순히 끊어버리고 끝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논조로 이야기하는 듯하다. 1부에서부터 계속해서 잔 위기를 겪는 커플인 칼과 아야는 3부에서 절정의 위기를 맞이한다.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아비게일이 아야가 보고 있음에도 대놓고 칼을 자신의 잠자리로 불러 성관계를 갖는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아비게일의 능력과 지도력이 필수인 상황에서 아비게일을 거부하거나 혹은 대놓고 불만을 넘어 증오를 표현할 수 없다. 칼은 생존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아비게일과 아야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아비게일의 쾌락을 위해주며 식량을 얻고 아야는 증오심을 키우며 이따금 이를 갈며 울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세 사람의 긴장감은 아야가 아비게일과 같이 주변을 둘러보고 오자고 제안하고 그 제안을 아비게일이 받아들였을 때 증폭된다. 드디어 아야가 뭔가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건가! 아야의 분노와 증오를 알고 있던 아비게일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아비게일과 아야의 갈등의 끝에서 생존자 그룹의 피라미드를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이상으로 밥상을 엎어버리 선택을 한다. 생존자들이 표류한 섬이 무인도가 아니라 사실은 호화 휴양지의 호텔이었음이 드러나면서 상승 중이던 두 인물 사이 감정의 긴장은 오히려 피라미드의 재전복으로 낙하하는 것을 넘어 아예 사라진다. 다시 호화 크루즈 시절의 피라미드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아비게일이 느끼는 절망은 관객이 느끼는 다행의 허탈과 허무의 웃음보다 더 클 것이다. 즉, 관객과 아비게일이 느끼는 감정은 혼란함이다. 표류한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다시 그 지옥같은 현실로 돌아가야 해 죽고 싶다고 해야 할까. 다시 한 번 절대적 자유와 평등의 불가능성을 엿보여주면서 <슬픔의 삼각형>은 관객과 함께 제 얼굴에 침을 뱉으며 킬킬댄다. 이러한 허무의 비웃음은 3부에 들어 슬픔의 삼각형으로 자신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드러내던 아비게일이 아야가 자신을 보지 않을 때 거대한 절망과 분노를 드러내며 돌로 내려치려는 모습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돌로 내려치려는 직전에 블랙아웃 됐다면 <슬픔의 삼각형>은 뻔하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관객과 함께 허무의 구렁텅이로 다이빙 했을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났을지 알 것 같지만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끝나든 희망이 없다는 사실. 이 두 사실만으로도 절정의 순간에서 허무의 밑바닥까지 허무의 비웃음이 지닌 에너지는 물이 가득한 물풍선이 순식간에 땅에 닿아 폭발하듯 관객들을 휘감아버릴 터였다.


그런데 이상적인 허무에 휘감기는 선택 대신 <슬픔의 삼각형>은 갑자기 현실적인 희망으로 자신의 논조를 바꾼다. 휴양지 호텔의 해변가로 이어지는 산길을 급하게 헤치며 달리는 칼은 어떤 선택을 한 듯하다. 아비게일과 아야의 사이에서 칼은 생존을 위해서 아비게일을 따라야 한다는 합리적 선택을 충실히 따르지만 동시에 자신의 연인인 아야에게 끊임없이 감정적 수치를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은 섬을 탈출할 때까지는 아비게일과 아야 사이의 긴장을 현상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놀리기나 하지만 어쨌든 칼은 아비게일을 애무해줄지언정 삽입 섹스만은 하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아비게일의 잠자리에 들어간 이상 그게 무슨 노력이냐 싶지만 칼에게 자신의 행동은 생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과 연인을 향한 감정적 수치를 최대한 동등하게 유지하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야와 아비게일이 단 둘만 있게 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칼은 평소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산길을 피부가 긁혀 피가 남에도 헤쳐 나아간다. 아무 일이 없던 일상에서는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논조를 바꾼 <슬픔의 삼각형>의 태도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생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과 연인을 향한 감정적 수치 중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고 칼이 평소에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비게일과 아야 사이에서 현상유지만 하려던 칼이 어떤 감정적 정동에 의해 달려간다는 직접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아비게일이 아야에게 돌을 내려친 직후 현장에 도착할지. 아비게일이 내려치려는 순간 아비게일을 덮쳐 살인을 막을지. 무인도가 사실은 호화 휴양지의 호텔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행동할지. 이러한 가정적 미래는 중요하지 않다. 칼의 달리기는 인간에게 절대적 자유와 평등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이상적 허무를 뒤엎어 절대적 자유와 평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어떤 에너지의 단초가 인간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나마 현실적인 희망을 느끼게 한다. 지금까지 한참을 우리 인간이 얼마나 이중적인지, 위선 속에서 종말을 향해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현실이 뒤집힌다고 해도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거울에 반사해 전시하며 관객과 함께 스스로를 비웃던 영화가 관객을 붙잡고 희망을 놓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조차 비웃어달라는 건지 아니면 정말 진지하게 말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어느 쪽이든 <슬픔의 삼각형>은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모습조차 비웃어달라는 것이라면 무책임하게 웃음을 강요하는 듯하다. 마지막까지 전복의 행위 예술을 이어가는 건가? 이 모든 것은 그저 가벼운 영화에 불과하니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건가? 진지충이 되지 말라는 건가? 하지만 그냥 웃고 말라기엔 난데없이 완전히 반대되는 길을 제시했다. 심지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계속해서 기대하게 되는 희망이라는 존재를 제시했다. 이미 영화와 함께 한참을 허무의 비웃음을 한껏 만끽하며 '에라 모르겠다...', '인간이 그렇지 뭐...' 상태가 된 관객에게 '멍청아,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데 그걸 포기하려고 해?'라고 하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건가?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 그 상한 감정의 에너지를 행동으로 옮기게 하려는 것이었다면 반대로 그게 효과적인 방법인지를 묻고 싶다. 그렇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라면 관객을 무책임하게 도덕적 방종 상태에 놓은 것과 다름없다. 거울에 반사되듯 불합리한 사회와 인간의 위선을 함께 보며 '너나 나나 똑같지 뭐...'하며 웃었는데 갑자기 붙잡고 훈계를 하는 듯하다. 아니 관객인 '나'만 나쁜 건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다면 관객인 '나'도 그렇지만 영화 '너'도 제작 못 되는 거 아닌가? 심지어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에서 관객은 거의 완전히 수동적인 위치에 있지 않은가? 영화를 관람하기로 선택한 순간 영화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는 선택 이외에 현실적으로 관객은 영화와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참을 함께 웃었는데 갑자기 관객에게 비도덕적인 웃음을 보였다고 훈계한다면 관객은 억울할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슬픔의 삼각형>은 무책임하게 자신이 할 말만 배설하는 영화에 가까운 듯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허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관객을 조금이라도 케어하기 위해 약간의 현실적인 희망을 제시하는 배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배려로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러닝타임 147분 동안 관객은 <슬픔의 삼각형>을 따라 함께 자신을 찌르며 킬킬대면서 웃었다. 피를 흘릴 대로 흘린 상황에서 배려라는 이름으로 주지만 너무나 미약하게만 느껴지는 휴지 조각을 쉽게 배려라고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스크린 이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영화가 스크린 이후에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관객을 약올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더 쉬울 것이다. 이상적인 허무를 함께 허우적대든 현실적인 희망이라도 지푸라기 잡듯 붙잡든 영화가 관객과 선을 긋지 않았으면 싶었다. 영화가 자기 할 말만 배설하듯 하고 스크린에서 사라지면 현실을 살아가는 관객에게는 현실의 끔찍한 고독만 남을 뿐이다.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허무를 씁쓸하게 곱씹으며 축 처지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러한 고독을 견디기 위한 생존 본능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존 본능조차도 계산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안배일까? 어떤 생각이었는지 모르니 그저 배설하는 감독의 모습에 실망할 따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