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atchTal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zetto Nov 18. 2023

쓰러져도 멈추지 않을 보는 이의 소통

혜화. 연우소극장. 우리.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초대해주신 극단 고래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대봐야 부활을 믿을 수 있겠다는 성 토마스에게 일갈한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복음 20장 29절의 내용이다. 본다는 행위는 단순히 시각이라는 감각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순수하게 시각을 통한 정보는 있을 수 없다. 보는 순간 삶 이전 선험하는 것과 삶 이후 경험한 것들의 총체인 육체와 정신은 보는 대상을 즉각적으로 해석한다. 인지하는 주체에 맞춰 빠르게 단편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다는 행위는 크게 두 가지 면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본다는 행위가 지닌 함정. 보는 순간 주체는 대상을 자신에게 맞는 편린으로 분해해 이해한다. 언어로만 가능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분해해 이해하고는 존재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보는 행위로는 그렇기에 그러하다는 믿음이 불가능하다. 만지고 보는 행위는 결국 착각의 연쇄를 일으켜 예수를 예수가 아니게 만들 뿐이다. 둘째로 본다는 행위가 지닌 가능성. 보는 순간 대상을 편린으로 분해해 이해한다는 것은 존재를 재구축해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언어로만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 언어에 대한 인간 개개인의 인지와 상상력은 모두 다를 것이다. 대상을 의심하고 분해해 재구축하는 과정으로 인간은 새로운 믿음을 가능하게 한다.


양자역학과 페미니즘이라는 소재로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극단 고래의 <우리>는 굉장히 흥미로운 공연이자 학부 때 활동했던 연극 동아리 시절이 떠올라 공감이 많이 가는 공연이다. 흥미와 공감이 모두 발하는 이유는 이 연극이 본다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현재 한국 사회의 소통 문제와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서술한 본다는 행위의 양면 중 <우리>는 가능성의 후자를 기대했으나 함정의 전자를 마주한 비극을 담고 있다. 공연을 보는 내내 관객들 사이에서도 살면서 겪은 보는 행위의 함정이 떠올라 안타까움, 후회, 분노 등의 다양한 감정이 퍼진 듯했다. 하지만 <우리>가 제작된 비하인드까지 생각해보면 단순히 이 연극이 현실에 대한 풍자나 비극의 재현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힘이 빠지고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 수 없는 비극적인 결말조차도 그럼에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어떠한 방법을 찾고 싶다는, 그걸 위해 먼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말한다는 공연진의 의지가 느껴졌다. 메타 연극인 <우리>는 무대 이전부터 공연을 시작해 무대 이후의 현실에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하고 있다.


1. 서로를 보며 미워하다

극단 고래 제공

메타 연극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대 이전의 공연, 그러니까 제작 비하인드를 잠시 상상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를 위해서 공연 팜플렛에 적힌 내용과 공연의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공연 팜플렛에 적힌 내용부터 그대로 옮겨 보겠다.

연극 <우리>는 극단 고래의 대표이자 상임연출인 이해성과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대표이자 연출가인 홍예원의 공동 연출/공동창작으로 구성되었다. 50대 남성 연출가인 이해성은 스스로 페미니즘의 가치를 학습하고 실처나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연극과 삶이 페미니스트들과 잘 소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체감한다. 그리고 연극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페미니스트와의 소통부재를 감각하고 이에 문제 제기를 해보고자 이 공연을 구상하였다.

팜플렛에 적힌 공연에 대한 설명 전문이다. 이후 글에서는 더 이상 그대로 옮겨 적거나 있는 그대로 재현한 내용은 없다. 모두 필자가 '본' 내용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불편할 것이라는 혹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언제든 편하게 하차해주길 바란다. 각설하고, <우리>는 소통부재라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에 무지했고 앞으로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50대 남성 연극인이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과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체감 속에서 그들과 소통하며 어떠한 극을 만들고자 공연의 구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관객은 그 남성 연극인이 공연의 구상을 시작해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여성 연극인과 함께 작업에 들어가는 것을 관객석에서 보게 된다. 관객은 과거에서 시작된 연극 <우리>를 현재에 보고 있는 시간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쪽 우주의 시간선 상에 있는 과거는 아닌 듯하다. 비슷한 다른 우주의 시간선에 있는 과거랄까. <우리>의 무대에 등장하는 극단 <상어>의 상임연출 '홍예성'(정나진 분)과 페미니즘 연극인 '이해원'(박윤선 분)은 각각 현실의 <고래> 상임연출인 50대 남성 연극인 이해성과 <우리>의 공동 연출 및 창작을 맡은 페미니즘 여성 연극인 홍예원을 떠오르게 한다. 연극을 관람하기 전 팜플렛에 적힌 공연 소개글을 읽었다면 느껴졌을 기시감. 그 기시감을 시작으로 <우리>는 관객과 함께 시간여행을 떠난다. 이 시간 여행에서 관객은 공연 2개의 프리 프로덕션을 보게 된다. 홍예성 연출과 이해원 연출이 함께 연극계 내 페미니스트와의 소통 부재 문제를 다루는 공연과 워크숍 공연으로 극단 상어의 신입 연출과 배우들이 함께 만드는 양자역학과 관련된 공연이다. 이 중 주목해야 하는 것은 후자의 공연이다. 어떤 공연을 준비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중 슬릿 실험 발제를 통해 극단 상어의 연출과 배우들이 함께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입자와 파동이라는 상반된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는 빛이 관측 즉, 보는 순간에 따라 입자 혹은 파동으로 보인다는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해 배우들만큼이나 관객들도 어리둥절하다.


<우리>는 먼저 관객에게 본다는 행위가 지닌 함정을 인식하게 한다. 잠시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의 내용을 인문학으로 바꿔보자. 빛이라는 어떤 존재는 입자와 파동, 최소 양면성을 지닌 존재이다. 이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파동으로, 어떤 측면에서 보면 입자로 보인다. 즉, 어떤 측면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의 시작을 보자. 50대 남성 연극인인 홍예성이 함께 작업할 공동 연출자로 페미니즘 여성 연극인을 수소문하고 있다. 우리에게 50대 남성은 흔한 말로 꼰대라 불린다. 50대 남성 연극인인 홍예성은 어떻게 보이는가? 그가 페미니즘 여성 연극인을 찾는 행동은 어떻게 보이는가? 작중 홍예성이 직접 말하듯 그의 행동은 연극계의 대세를 따라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기회주의로 보일 수 있다. 혹은 진짜 페미니즘과 소통하기 위해 먼저 다가서는 진보적인 연극인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언어는 결국 홍예성을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관측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홍예성의 통화를 보는 순간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지, 통화를 보기 직전의 감정이 어땠는지 등. 홍예성을 본다는 것은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 변화한다. 우리는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본다고 착각한다.

극단 고래 제공

이러한 착각은 <우리>에서 무대 내외로 발생한다. 홍예성과 이해원은 서로를 어떻게 보는가? 공동 창작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듯한 홍예성과 이해원의 대화를 보면 서로 말이 오고갈 뿐 소통이 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작중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듯, 홍예성은 이해원을 어떤 틀의 페미니스트로, 이해원은 홍예성을 어떤 틀의 남성 연극인으로 인식한다. 이해원 연출은 홍예성 연출을 위계의 권력으로 작업을 마음대로 진행하는 권위적인 남성 연극인으로, 홍예성 연출는 이혜성 연출을 페미니즘을 무기로 자신을 죄인화하고 작업을 진행하는 권위적인 페미니스트로 보게 되는 것이다. 무대 외부에서는 관객 각각이 홍예성과 이해원을 각자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 누군가는 홍예성 연출을 자신은 바뀔 생각이 없었으면서 페미니즘을 이용하려 한 기회주의 꼰대로 보며 주먹을 쥐고, 누군가는 이해원 연출을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며 오히려 권위를 이용해 또 다른 차별을 낫는 페미 나치로 보며 한숨을 쉰다. 겉으로 보기에 수많은 입장들이 교차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교차점이 존재하지 않는 헛교차.


홍예성과 이해원의 작업만이 아니라 상어의 워크샵 공연 준비 과정도 순탄치 않다. 나이, 성별, 선후배 등 다양한 요소가 얽히고 섥힌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미 어떤 틀에 규정하고 있다. 양자역학을 소재로 기획한 공연에 대해 연출을 맡은 '아진'(손아진 분)은 기존과는 다른 공연을 만들겠다고 하며 주제, 배역, 대본 등 모두를 정하지 않으려 한다. 입자도 파동도 아닌 빛, 즉 어떤 하나의 상태로 정해지지 않은 모순된 빛의 상태처럼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정해진 그 모순을 공연화 해 관객들이 반응하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다. 배우들은 그런 아진을 이해하지 못한다. 연출과 배우만이 아니라 배우들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이가 어린 데도 자신에게 시도때도 없이 반말을 하는 '한나'(구한나 분)와 갈등하는 '형욱'(박형욱 분). 후배들의 연기에 대해서 선배로서 코멘트를 하는 '아름'(한아름 분). 배역에 대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머리를 밀었으나 배역도 사라지고 그나마 맡은 고양이 배역은 사람 말도 못하게 된 '현명'(사현명 분). 연습 중 자신의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는 '소진'(안소진 분)과 연출과 배우들, 최고참 선배인 '나진'(정나진 분)과 후배들 사이에 끼어 있는 중간자 '윤선'(박윤선 분) 등. <우리>의 시간여행 동안 수많은 봄은 중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과 위치에서 다르게 쌓이며 헛교차할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보는 것으로 미워한다.

극단 고래 제공

2. 서로를 보며 나아가려 하다

이처럼 <우리>는 헛교차 하는 봄과 커져만 가는 미움으로 가득하다. 관객석을 채우던 웃음은 어느 순간 한숨과 탄식을 만나 씁쓸한 웃음로 바뀐다. 소통의 부재를 실감해 시작했다고 하는 <우리>는 어쩌면 공연을 제작하며 겪는 모든 소통의 부재를 재현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시작부터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공연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통의 부재를 느끼고 기획한 공연이라 했는데 무대에서는 그 공연의 기획을 보고 있는 기묘한 시간여행. 그렇기에 단순히 소통의 부재를 재현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소통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듯한 <우리>는 공연 중 재현의 윤리를 한 번 짚고 넘어가면서 소통의 부재에 대한 단순한 재현이라는, 혹시 있을지 모를 평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하다. 어디선가 공연의 기획과 프리 프로덕션 단계를 겪었을 당사자들이 무대에, 관객석에 있을텐데 그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몸으로 직접 연기하고 그 연기를 직접 경험하게 되는, 어색하다면 어색하고 불편하다면 불편할 시간여행. 이 재현의 끝을 끝까지 봐달라는 듯하다. 어색하고 불편한 순간을 넘어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는 듯하다.


<우리>는 시간여행의 어색함과 불편함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중시킨다. 관객이 육체적으로 느끼는 연출의 공동 협업과 극단 상어의 워크샵 작업 장면만이 아니다. 무대 뒤 벽에 떠오르는 줌 회의와 인터뷰 영상을 보자. 줌 회의. 각자의 카메라로 보이는 작은 틀은 오로지 정면을 향해 있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스크린이라는 틀에서 보이는 정도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으며 보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스크린을 통해서만 보이는 참가자들의 숄더샷들이 정면을 향해 있는 모습만을 본다. 참가자들은 스크린을 통해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 시선들은 벽에서 관객석을 향해 있을 뿐 서로에게 가닿지 않는다. 스크린이라는 디지털 물리적 틀에 갇힌 참가자는 상대를 어떤 틀로 이미 보고 있다. 가닿지 않는 시선에 최소 이중의 틀이 겹쳐진 상태. 단순히 회의 전체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소통의 부재를 재현하는 연출은 관객이 느낄 어색함과 불편함을 극대화한다.

극단 고래 제공

인터뷰 영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상에서 인터뷰어는 목소리만 혹은 질문지로만 등장한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말하거나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산다는 인터뷰이는 줌 회의와 마찬가지로 얼굴부터 어깨 혹은 허리 정도까지 보이는 모습이다. 온전한 전체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그런 가운데 이들은 자신들이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산다고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모르고 여전히 배우고 있다 말한다. 빛처럼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을 실천한다고 소개하지만 페미니즘 그 자체라고 혹은 페미니즘이라는 상태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 인터뷰이의 모습은 무대 위 페미니즘 연출가 이해원으로 이어진다. 관객은 이해원이 자신도 페미니스트이지만 페미니즘을 잘 모르기에 배우고 있다 말하는 것을 보지만 동시에 그가 보이기에 확신에 찬 어조와 목소리로 홍예성과 대화하는 것을 본다. 홍예성과 대화에서 시종일관 우위를 점한 듯한 이해원. 그가 어떻게 보이는가? 조심스러운 듯한 어조와 목소리로 이해원을 대하는 홍예성. 그는 어떻게 보이는가? 인터뷰이들은 어떻게 보이는가?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는 웃는다. 누군가는 한숨을 쉰다. 관객마다 다르게 보일 것이다. 다르게 보는 관객들의 다양한 육체적 반응은 불협화음이 되어 어색해진 무대 위 상황과 조응한다.

극단 고래 제공

이렇게까지 어색함과 불편함을 극한으로 쌓아올리나 <우리>는 사실 관객에게 이미 스포일러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공연의 기획 전사를 관객들에게 팜플렛으로 알려주고는 무대에서 그 공연의 기획을 보여준다는 것은 곧 이 공연이 기획과 프리 프로덕션의 단계를 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연 제작 겪는 소통의 부재가 막장으로 치달았을 때 맞이하는 공연의 무산. <우리>에서 관객이 볼 수도 있었을 2개의 공연은 프리 프로덕션 중 갈등으로 결국 무산된다. 서로의 봄을 결국 교차하지 못한 홍예성 연출과 이해원 연출의 공동 협업은 더이상의 작업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이해원 연출이 작업에서 빠지겠다 말하며 붕괴된다. 극단 상어의 워크샵 공연은 연출-배우, 배우-배우 사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아진이 공연 준비를 그만두자는 말과 함께 중단된다. 그 어떤 공연도 결국 무대 위에 올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현실의 관객은 공연을 보고 있다. 붕괴되고 중단된 공연을 보고 있다는 모순. 어찌된 일일까?


공동 협업이 붕괴되는 순간 극단 상어의 워크샵 공연 연출과 함께 공동 협업 공연의 조연출을 맡고 있기도 한 아진이 홍예성에게 말한다. 만약 연출님이 정말 소통의 부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공연을 올리고 싶다고 진정으로 생각하신다면 지금 이 순간을 무대에 올리셔야 할 것이라고. 극단의 후배, 연극계의 후배, 여성 연극인인 아진의 말이 홍예성에게 던져져 남는다. 바로 다음 공동 협업처럼 중단된 극단 상어의 워크샵 공연 연습 현장에서 아진은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두 공연을 함께 올리면 어떻겠느냐는, 소통의 부재를 겪고 있는 두 공연을 함께 올렸으면 한다는 홍예성의 전화. 극단의 선배, 연극계의 선배, 남성 연극인인 홍예성의 말이 아진에게 돌아간다. 아진이 "그렇게 해요."라고 답했다면 공동 협업처럼 중단되 <우리>는 낭만적이고 낙관적으로, 심하면 오락적으로 재현을 소비했다는 평가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렇게 해요." "Show must go on."이라는 격언과 다르게 아진은 사이를 둔다. 지금까지의 순간을 되짚어보고 갈무리하기 위함인지, 잠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함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답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이를 거친 언젠가는 바로 관객이 무대를 보는 그 순간에 펼쳐지고 있고 펼쳐졌다. 전화이기에 무대 위에는 아진만이 있다. 전화이나 홍예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직 아진만 보이는 무대 위에서 그 언젠가가 현재에 도달한 순간 홍예성과 아진 사이의 어떤 소통이 발생한 듯하다. 서로를 보고 있는 어떤 틀을 부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언젠가라는 사이를 둔 것만으로 공연은 결국 무대 위로 올라갔다. 과거에서부터 어색함과 불편함을 쌓아오던 시간여행은 관객의 현재와 일치하는 그 순간에 찰나와 같은 소통의 순간을 남기고 끝이 난다. 바로 순간 공연 중 처음으로 봄이 어떤 점에서 교차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연의 시간이라는 형태로 관객에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나아가려 한다.


<우리>는 봄으로 소통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봄을 무기로 소통을 거부하는 세태를 조명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소통에 피로함을 느끼고 있다. 이해원 연출이 말했듯 우리는 소통의 의지를 잃고 편하게 사는 것에 집중한다. 자기 자신의 발전 혹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만 연대하는 것만 유지할 뿐이다. 소통하자는 제스처는 삶을 피로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뒤흔드는 공격이다. 그렇기에 홍예성 연출이 알고 있듯, 이해원 연출이 홍예성 연출을 공격하듯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소통하려고 하느냐고 되묻는다. 상대 입장, 언어, 태도 등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는 자격에 대한 의문. 그러한 의문을 뛰어넘는 것은 아주 잠깐의 사이이다. 잠시 상대방을 곱씹어보든. 잠깐 자신을 되돌아보든. 감정을 정리하든. 자격에 대한 의문에서 벗어나 육체적, 인식적, 감정적 거리를 두고 다시 상대와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페미니스트 연극인이기 때문에, 가부장적 권위주의 연극인이기 때문에, 피해의식에 찌든 20대이기 때문에, 생계와 꿈 사이에서 고민하는 선배이기 때문에 소통을 못하겠다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소통을 해보고 싶다로 가기 위해서. 멈추지 않기 위한 그 사이가 우리의 봄이 서로 교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나 진정한 우리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무대의 시간여행에서 피어난 그러한 사이의 의지가 어 현실에서도 계속 여행을 계속 되길 소망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세대의 끝에서 다음 세대를 축복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