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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l 19. 2024

스트레인지 달링 단상

부천시청 어울마당.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스트레인지 달링.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반전을 엮어가며 인생의 고통을 마주하다(3.5)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본 두 번째 영화이자 스릴러 장르의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영화이다. 이미 다들 알고 있듯이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콘텐츠 생산은 좀 싸게 말하면 가면 갈수록 더럽게 힘들 것이다. 이미 앞서 만들어진 적 있을 것이고 어디서 본 적 있을 것이다. 따라서 콘텐츠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선 것들을 창작자의 색깔을 가미해 활용하면서 창작자 본인의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다. <스트레인지 달링>을 보면 떠오르는 감독 2명이 있다. 우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연쇄살인마냐는 여성의 질문에 상대를 빤히 바라보다 목을 조르는 남성으로 문을 연 영화는 시작부터 6막으로 구성된 스릴러 영화라고 관객에게 일러주고 각 막마다 소제목과 대사 하나를 알려주면서 진행된다. 다음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스트레인지 달링>은 타란티노처럼 총 6막으로 구성된 스릴러 대본의 시간 진행을 뒤죽박죽으로 엮었다. 의문의 여성이 의문의 남성으로부터 도망치는 카체이싱으로 시작하는 3막은 누가 봐도 살인마로부터 도망가는 여성 피해자의 탈출 스릴러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스트레인지 달링>은 극이 진행될수록 장면을 통해 관객이 인식하는 모든 것이 선입견이라 말하며 계속해서 뒤집는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전에 <아카디안>에서 말했듯 장르 영화의 약점은 결국 "이 영화를 왜 봐야 하는가?"라는 생각, 즉 이른바 장르적 재미라는 것만을 좇던 영화를 보고 난 다음 허무감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스트레인지 달링>은 영리하게 이러한 허무감을 살인마의 허세, 살인 동기 등을 통해 지운다. 다르게 말하면 살인마가 살인을 하는 동기나 그의 허세는 이 영화가 지향하는 일종의 세계관이다. 살인마를 보면서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서 나온 '백대식(황정민 분)'이 떠올랐다. 백대식은 자신을 찾아온 '김선우(이병헌 분)'에게 "인생은 고통이야."라는 말을 남긴다. <스트레인지 달링> 역시도 고통의 연속이다. 하룻밤 섹스를 위해서 만난 여성과 남성은 여성의 섹스 성향에 따라서 가학적인 전희를 즐긴다. 하지만 이러한 전희는 살인을 위한 살인마의 의식과 같은 행위이다. 그런데 살인마는 자신의 시선에서 누군가에게서 악마가 보일 때 살인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추격전 속에서 경찰에 신고하려는 일반인들을 살해하는 살인마는 자신의 지론과 다르게 너무 많은 살인을 했다고 말한다. 재밌지 않은가? 타인에게서 악마가 보일 때만 살인을 하는 살인마의 가학적인 전희 의식은 본인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서 악마를 깨우는 의식이다. 그렇다면 살인마는 스스로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디스트이자 그러한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가 된다.

<스트레인지 달링>의 추격전 즉, 비선형적인 서사 구조와 진행은 관객에게도 일종의 고통이다. 관객은 계속해서 막이 진행되는 동안 인식하게 된 것을 수정해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성과 남성은 하룻밤이지만 서로를 탐하는 달콤한 연인으로 만났으나 사실은 둘 모두 괴이한 이들이라는 점부터도 하나의 반전이다. 또한 여성과 남성은 누구인가, 남성은 여성을 왜 쫓는가, 사람들은 왜 죽어있는가, 여성의 귀는 왜 다쳤는가 등. 작은 사건부터 큰 사건까지 관객은 남성과 여성의 추격전에서 느끼는 스릴과 반전을 마주하며 느끼는 스릴 모두에 노출되어 있다. 그렇기에 관객에게 <스트레인지 달링>은 재밌는 고통이다. 특히나 마지막까지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총을 겨눈 살인마가 도리어 총을 맞고 자신의 얼굴에서 악마를 보게 되는 순간은 다른 의미에서 블랙 코미디이다. 시덥잖은 이유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살인마가 반대로 살인을 정당화한 자신의 이유에 의해 자살과 비슷한 결과를 맞이하니 말이다. 동시에 이러한 끝은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생각과 맞닿으며 스크린 바깥 현실과 연결된다. 고통이라는 인생에서 그러한 고통은 누가 만들고 있는가? 단순하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장르적 재미는 영화가 끝나면서 휘발되는 재미가 아니라 한 번 정도 현실을 환기하는, 현존하면서 연속되는 재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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