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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n 25. 2022

욕망을 마주하고 나아가는 반 걸음

신촌. CGV. 박쥐.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처. 왓챠피디아

욕망의 주체라 해도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마주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도 보여준 적도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이불킥 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욕망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욕망은 삶의 필수 요건이자 관계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대상을 향한 일종의 목표 의식인 욕망은 다른 존재를 향한 주체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즉, 욕망은 자신에게 부재한 것을 원하는 것이자 가지고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이기에 대상을 경유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대상을 경유해서 바라보는 만큼 자신의 욕망 그 자체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자신이 삶에서 어느 시점에 도달했는지를 알 수 다. 그저 욕망이 가리키는 대상을 향해 무작정 돌진해 나아가는 주체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욕망을 통해 관계를 맺는 다른 존재들까지 모두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그렇기에 너무 늦게 욕망을 마주해서는 안 된다. 아니 너무 늦더라도 마주봐야 한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 등장하는 상현과 태주처럼 너무 늦게 욕망을 바라봐 파국에서 겨우 반 걸음만큼 벗어났을 지라도 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박쥐>에서 상현과 태주는 각자의 욕망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해 결국 파국에 이르는 주체들이다. 상현은 어느 날 갑자기 창궐해 치료법을 알지 못하는 이브 바이러스의 치료법을 알아내 고통받는 환자들을 구하는, 지극히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에 기반한 욕망을 가진 인물처럼 보인다.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에 따른 욕망과 상현 개인이 바라는 욕망이 일치한다면 상현의 욕망은 타인을 향한 사랑에 기반한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상현은 지극히 이상적인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부로서 자신의 욕망을 밝혔음에도 이브 바이러스 연구소의 연구소장이 어떤 목적에서 연구소를 찾아왔는지를 카메라를 보고 말하라고 하자 상현은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난감해 하며 카메라로 향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의 욕망을 말하지 못한다. 이 장면 뒤로도 영화에서 상현의 욕망은 항상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를 경유해서 발화될 뿐 상현 개인이 직접 발화하지 않는다. 자신에게서 모두가 멀어지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바치며 이브 바이러스 치료법 연구에 신부로서 자신의 몸을 온전히 바치고 끝끝내 피가 뿜으며 죽는 와중에도 상현은 자신의 욕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처럼 사회적 위치를 제외한 상현 개인의 순수한 욕망을 알 수 없기에 상현은 흡혈귀가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상현에게 수혈된 피가 괴물이든 미확인 생물이든 즉, 어떤 피인지는 영화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상현은 본인의 순수한 욕망을 온전히 발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상현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았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러한 후회 없는 죽음에 갑작스럽게 새로운 삶이 주어진 순간 상현에게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에 따른 욕망은 다른 존재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림막에 불과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욕망을 발화한 적 없는 상현에게 흡혈이라는 즉, 다른 존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피를 먹는, 파국으로 향하는 원초적 욕망이 생긴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보지 못한 이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진 순간 그 삶에는 거침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거침없이 사는 삶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불가능하게 할 뿐더러 이미 평생을 신부로서 살아온 상현에게 사회적 위치에 따른 욕망을 완전히 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상현은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에 따른 욕망으로 자신의 원초적 욕망을 가려 버린다.

출처. 왓챠피디아

상현과 비슷하게 태주는 며느리라는 사회적 위치에 태주 개인이 바라는 욕망이 억압되고 있다. 어린 시절 라여사와 강우의 집에서 세들어 살다 아버지에게 버려진 이후 라여사에게 길러지다 강우와 결혼한 태주는 살아온 세계가 라여사와 강우의 집에 국한되어 있다. 그렇기에 태주는 자신의 삶을 위한 관계를 스스로 맺어본 적도 삶의 방향을 정하기 위한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도 없다. 태주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구체화하기 위한 배경과 배경을 통해 욕망을 구체화하는 선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태주는 나이가 40이 넘어가는데도 어린애처럼 칭얼대고 자신에게 집착하는 강우와 그런 강우만 감싸고 자신을 길러줬다는 이유로 학대하는 라여사를 향한 분노와 증오심만 속으로 묵혀둔다. 하지만 묵혀둔 분노와 증오심은 몽유병을 핑계로 밤에 맨발로 뛰며 표출될 뿐 실제 행동을 위한 원동력이 되지는 못한다. 태주에게 라여사와 강우는 세계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분노와 증오심을 통해 상현을 꾀어 남편 강우를 죽여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는 삶을 살게 되었음에도 식욕, 색욕, 수면욕 등 기초적인 욕망에만 머무른 채 아무런 목적 없이 자신의 욕망을 방사하는 것으로 태주가 재현되는 이유이다.


사회적 위치에 따른 욕망으로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가려버린 상현과 사회적 위치가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원초적 욕망에 머무른 채 욕망에 방향성이 없는 태주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되 왜곡되게 비추는 거울이다. 상현과 태주는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고사하고 정확히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지 못하는 어린애와 같은 모습을 서로에게서 발견해 서로를 비슷하다 생각하며 끌린 것처럼 보인다. 아니다. 상현과 태주가 서로에게 끌린 이유는 각자에게 부재한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를 경유해서만 상대와 관계를 맺은 상현에게 태주는 원초적 욕망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존재이다. 반대로 며느리라는 사회적 위치로 인해 욕망에 방향성이 없이 원초적 욕망에만 머무른 태주에게 상현은 며느리라는 사회적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 즉, 배경을 지닌 존재이다. 둘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욕망했다. 하지만 각자의 욕망을 보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어린애이기에 상현과 태주는 성욕에 기반해 서로를 거침없이 뜨겁게 탐하는 것으로 관계를 시작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상현과 태주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다. 둘 모두 각자의 욕망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생명을 빨아먹는 흡혈의 욕망은 다른 존재의 생명에 기생할 뿐만 아니라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기에 본질적으로 파국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를 버리고 때로는 자신을 신부라 부르는 태주에게 신부가 아니라고 고함치는 상현은 앞서 말했듯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는 상대의 생명을 거침없이 빨아먹는 흡혈의 욕망을 정당화 하면서 상현 본인의 죄의식을 경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태주와는 하루에 5번씩은 성관계를 맺을 정도로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는 신경쓰지 않은 채 성욕에 미쳐있음에도 정작 자신에 의해 흡혈귀가 된 태주가 살기 위해 산 사람을 사냥하며 흡혈하는 행위에서는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에서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런 와중에 태주보다 힘이 강함에도 상현은 태주를 향한 감정을 이유로 태주를 완벽하게 규제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강우를 죽이도록 태주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태주를 신부인 자신을 타락하게 만든 악녀라고도 말한다. 이러한 상현의 이중성은 상현이 자신의 원초적 욕망 자체를 온전히 바라보고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해 결국 파국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상현이 자신의 욕망을 온전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상현을 속여 강우를 죽이고 그로 인해 시어머니인 라여사는 풍이 와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며 심지어 상현에 의해 흡혈귀가 된 태주에게는 더 이상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다. 상현에 의해 흡혈귀가 되기 전에는 강우를 즉,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이 집안을 축축하게 만드는 물처럼 계속해서 생각 어딘가에 남아 있어 잠을 제대로 못 자기도 한다. 하지만 태주의 죄의식은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표출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재밌는 것은 상우를 죽였다는 죄의식은 상현에 의해 흡혈귀가 된 후에 사라진다. 이는 태주에게 자신의 자유를 표출하기 위한 힘 즉, 배경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태주는 자신이 얻게 된 힘으로 식욕만 충족하면서 자신이 꿈 꿔온 자유를 원초적 욕망의 형태로만 남겨둔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는 태주에게 흡혈의 힘은 원초적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배경만 될 뿐 자유를 더욱 가치있게 표출하는 배경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태주는 식욕, 색욕, 수면욕 등 원초적 욕망에 기반한 생존 이외에 다른 욕망을 생각하지 못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렇듯 파국을 향해 폭주하는 상현과 태주는 일종의 현타를 맞이하며 멈출 수 있게 된다.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가리고 있던 상현은 흡혈을 원초적으로 욕망하는 태주를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때 느끼는 죄의식은 자신의 식욕을 위해 다른 존재를 살해하는 태주에게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가 반감을 느끼는 것일 뿐 아직 파국을 향해 폭주하는 욕망을 멈출 수 있는 원동력은 아니다. 상현이 진정으로 자신의 욕망을 멈출 수 있게 된 것은 수도원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무리에게 여성을 강간하려는 것을 들키게 되면서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이다. 이브 바이러스에서 살아남은 신성한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가 강간하는 현장을 보이면서 완전히 해체됐을 때 상현은 자신의 흡혈 욕망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숨을 곳 없는 절벽으로 태주와 함께 가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반대로 태주는 끝까지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태주는 여전히 원초적으로 남아있는 생존 욕구에 따라 살고자 한다. 하지만 결국 어디에도 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태주는 포기한 채 상현을 끌어안은 채 죽음을 받아들인다. 마지막 순간까지 숨으려고 하는 태주의 모습은 인간적이기에 결국 상현의 옆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애달프면서도 스스로 멈추게 된다는 점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상현과 태주가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 태주가 정말 죽도록 싫어하는, 울고불고 하는 뽕짝이 흐른다. 자신의 앞에 다가온 죽음 앞에 살고 싶음에도 살 수 없는 현실을 애도하는 것이자 결국 가장 싫어하는 뽕짝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현과 태주를 위로하는 것에서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느끼게 한다. 애달픈 뽕짝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타버린 태주의 신발이 툭툭 떨어진다. 그 모습이 마치 반 걸음을 걸어나간 듯한 모습이다. 때로는 가장 욕망하지 않는 것이 마지막 순간을 위로해주는 것처럼 가장 좋아하는 것만 추구하면서 살 수 없다.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며 그 욕망을 어떻게 표출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다른 존재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욕망을 추구하는 와중에 멈춰야 하는 때, 충족된 때, 참아야 하는 때 등을 계속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계속해서 고민할 때 다른 존재와 함께 공존하며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 죽음이라는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 반걸음이나마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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