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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l 08. 2022

아기를 향한 낭만을 가리는 냉혹한 현실

신촌. CGV. 브로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양육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부모가 자신들의 아기를 두고 가는 장소인 베이비 박스는 2009년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여전히 민간 주도로 운영되고 있는 제도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아기 양육은 한 가정의 부모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과거 전통 사회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아이가 자기 스스로 생활할 수 있을 때까지 온종일 아기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는 부모는 현대 사회에서 아예 불가능하다. 당장 맞벌이만이 아니라 혼자 자기 삶을 영위하는 것도 불안한 현대 사회에서 양육은 계속해서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공백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 제시된 민간 제도가 베이비 박스이다. 하지만 모성과 혈연에 기반한 정상가족 중심으로 사유되는 양육 담론에서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아기들은 사회에서 호명하지 않아 보호할 필요가 없는 아기들이자 일종의 상품일 뿐이다. 아기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보호가 필요한 순수한 생명이기에 가치의 유무와 무관하게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인식되지만 양육의 공백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와 양육 담론 속에서 어떤 아기는 역설적이게도 가치를 평가 받는 상품일 때만 간신히 존재를 인식 받는다.


그럼에도 아기에게 부여된 신화 혹은 아기를 인식하는 관점은 성역과 같아 양육 공백 속에서 홀로 위태롭게 존재하는 아기는 쉽게 다루기 어려운 소재이다. 다루는 영화들도 보통 아기가 아니라 아기의 부모를 경유해, 특히 보통은 미혼모인 어미니를 경유해 사회를 비판한다. 아직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기는 서사를 진행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기를 서사 전개의 중심으로 둘 경우 아기는 가치의 유무와 무관하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체가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욕망이 모이는 피사체, 즉 가치에 따라 판단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아기에게 부여된 생명력, 순수함, 가치와 무관함, 가능성 등이 욕망, 가치 등으로 환원‧파악될 때 마지막 남은 윤리의 보루가 무너진다고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는 오히려 아기를 서사 전개의 중심으로 두고 아기와 관계된 인물들의 욕망을 길 위에 전시한다. 하지만 금기를 범한 것치고는 최악의 문제작이라는 평가를 받지는 않은 듯하다. "날카로운 사회 관찰과 노골적인 감상주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걷는다."는 미국 영화 전문 매체인 데드라인(DEADLINE)의 평에서 알 수 있듯 <브로커>는 낭만주의의 가면 안에서 끊임없이 현실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미혼모 소영에 의해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우성과 보육원의 해진은 영화에서 가치 유무와 무관하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체와 건강하고 이쁜 상태라 판단되어 좋은 가격에 좋은 곳으로 입양되어야 하는 대상 혹은 상품 사이 경계 위에 위치한다. 이혼 상태인 자기 가족의 재결합을 원하는 상현, 유기 아동으로 보육원 출신이자 유기된 아이가 좋은 부모를 만나 자랐으면 하는 동수, 아이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아이를 기를 수 없는 소영, 형사계와 경쟁에서 이기고 진급하고 싶은 수진 등 다른 인물들의 욕망에 의해 해진과 특히 우성은 소중한 생명체가 되었다가도 교환 가치가 있는 혹은 교환 되어서는 안 되는 대상 혹은 상품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경계 위에서 흔들리는 우성의 모습은 지속적으로 관객을 불안하게 한다. '아기를 상품으로 그리는 영화가 과연 괜찮은 것인가?'와 같은 윤리의 불안이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윤리의 불안을 통해 관객은 영화에 온전히 감정 이입하지 못하고 거리를 둔 채 양육의 공백과 이를 모성에게만 책임을 돌리고 방치하고만 있는 사회,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가족이 되었음에도 끝끝내 가족이 되지는 못하는 현실을 마주한다.


관객이 느끼는 윤리 불안은 인물에서도 드러난다. 모성과 정상가족을 기반으로 사유되는 양육 담론에서 미혼모 소영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지만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소영도 성매매로 겨우 생존하고 있을 약자이다. 베이비 박스에 유기된 아기들을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능력 있는 부모를 찾아주는 자신들의 행위를 선의와 큐피드로 포장하지만 상현과 동수도 소영의 말처럼 그저 브로커에 불과하다. 하지만 동수는 유기 아동으로 보육원 출신이기에 유기 아동의 현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 그의 브로커 행위는 자기 합리화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잘못되었을 뿐 사회에 저항하는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상현은 이혼한 자기 가정을 재결합하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브로커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의와 큐피드로 포장하는 행위가 역겨워 보이지만 반대로 자기 가정의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소시민이기도 하다. 아기를 유기하는 소영도, 아기를 상품으로 보는 상현과 동수도 모두 못마땅해 하지만 형사계와 경쟁에서 항상 밀리는 여청계의 승리와 자신의 진급을 위해서 우성을 생명체가 아닌 대상으로 보는 수진도 아기가 팔리기를 가장 바랐던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경찰인 자신이라고 고백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결국 아기에 대한 윤리와 실제 사회에서의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이러한 불안으로 인해 관객은 영화를 조금 불편하게 느끼며 영화로부터 거리를 둘 뿐 영화 자체를 혐오스럽게 느끼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브로커>에서 인물들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며, 쫓는 경찰과 쫓기는 범죄자들의 로드 무비라기엔 <브로커>의 서사는 잔잔하게 전개되고, 영화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인물들은 우영을 중심으로 서서히 하나의 가족이 되어 간다. 이 중 상현, 동수, 소영, 해진, 우성이 영화 후반부에서 하나의 가족이 되어 가는 장면은 <브로커>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한다. 보육원에서 몰래 브로커 일당의 차를 탄 해진이 경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천역덕스럽게 동수와 소영을 엄마, 아빠라 부르는 것부터 <브로커>의 낭만성은 시작된다. 우성이 갑작스럽게 아파 모두가 병원에 갔을 때 동수와 소영은 어색하지만 처음으로 서로를 직접 부부라 말하고 모텔에서 교대로 우성을 돌보면서 네 사람은 혈연이 아닌 함께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을 통해 가족이 되어 간다. 월미도에서 모두가 함께 놀이기구를 타고 브로커 일을 마무리하기 전날 밤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나눌 때는 비로소 서로를 위해 당연히 희생할 수 있는 가족이 된다. 브로커 일당이 혈연을 넘어서 믿음을 통해 하나의 가족이 되는 낭만성은 생명체와 대상 혹은 상품 사이 경계에서 불안하게 존재하는 우성을 통해 양육에는 공백이 생기고 생존을 위해 아기를 대상 혹은 상품으로 볼 수밖에 없는 현실,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방치할 뿐만 아니라 더욱 부추기는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관객의 불안이 영화에 대한 혐오로 나아가지 않게 붙잡는다.


세부적으로 봤을 때 낭만성을 가장 강화하는 것은 상현이라 할 수 있다. 그저 허술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브로커 행위를 선의와 큐피드로 치장하는 상현은 이혼 가정 상태인 자신의 가족을 재결합 하기 위해 브로커 일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브로커 일이 최대한 어그러지지 않게 최소한 서로 기분 나쁘지 않게 마무리 하려고 한다. 갈등은 언제나 변수를 만들고 그 변수는 가족의 재결합을 위한 돈을 벌게 해주는 브로커 일을 아예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상현은 갈등을 최소화 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의 감정은 최대한 감추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들을 보러 오지 말라는 이혼한 아내의 전언을 딸을 통해 들었을 때 상현은 평정심이 무너지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영화 전체의 톤에 맞춰 가족의 재결합이라는 목표가 상실됨에 따른 굳은 표정과 눈물조차 맺히지 않게 감정을 억누르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이 순간 상현의 감정은 지금까지 해온 모든 브로커 활동이 의미 없어졌음을 알게 된 절망에 가깝다. 하지만 여전히 상현에게는 동수, 소영, 해진, 우성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있기에 절망은 자신의 가족을 특히 우성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희생의 원동력이 되어 상현은 우성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한 뒤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와 같은 낭만성을 통해 관객의 윤리 불안을 조절하는 가운데 윤리와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을 통해 관객은 자신이 느끼는 윤리 불안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서서히 구체화할 수 있게 된다. "왜 이러한 윤리 불안이 생겨나고 있는가?"를 고민했을 때 <브로커>는 지속적으로 사회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에게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책임이 있음에도 정작 베이비 박스에 아기를 유기할 때는 여성-엄마에게만 책임이 돌아간다. "키우지도 못할 자식을 왜 낳았는가?", "자식을 버린 엄마가 무슨 낯이 있는가?" 등 양육에서 남성은 사라지고 여성-모성만이 지속적으로 발화된다. 이는 여성-모성에 의존해 양육 담론을 사유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아기 유기에 대해 왜 여성-모성만 발화되느냐고, 남성-부성은 아무 책임이 없냐고 맞서는 소영의 모습은 현재의 양육 담론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소영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계 경찰들과 브로커 사건을 뒤쫓는 수진과 이형사의 모습은 현재 사회가 실질적으로 유기 아동 혹은 양육 공백을 해결할 수 없으며 현상 유지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영에게 성매매를 시킨 가출팸의 아줌마에게 형사계 경찰은 아이들에게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거냐고 일갈하지만 그 일갈은 해결책이 아니기에 생존 앞에서 공허하다.

출처. 왓챠피디아

<브로커>가 사회의 변화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은 브로커 일당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이후 에필로그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윤씨 부부와 브로커 일당의 거래가 실패했더라도 그 이후 윤씨 부부가 우성을 성공적으로 입양해 행복하게 양육을 한다거나 뿔뿔이 흩어진 브로커 일당이 모두 모여 윤씨 부부가 우성을 입양할 수 있을 때까지 우성을 중심으로 다시 가족이 되어 있다면 <브로커>의 낭만성은 강화되는 것을 넘어 신파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브로커>는 뿔뿔이 흩어진 브로커 일당이 그 누구도 서로를 다시 보지 않은 것으로 그린다. 경찰 수진이 우성을 책임지고 돌보는 가운데 유아 매매 관련 집행 유예를 받은 윤씨 부부가 우성을 성공적으로 입양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사건 관련인들을 만나고 있지만 동수와 소영은 수진을 만나지 않는다. 살인을 한 상현은 아예 소식을 알 수 없다. 이들이 수진을 만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성을 정상 사회로 보내기 위한 희생이다. 사회에서 소영은 아기를 유기한 엄마이며 동수는 유아를 매매한 보육원 출신 브로커이고 상현은 살인을 한 유아 매매 브로커이다. 비록 그들의 행위가 모두 우성이라는 아이를 위한 일이지만 동시에 여성-모성을 중심으로 양육 담론이 사유되는 정상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아무리 브로커 일당이 혈연이 아닌 서로를 향한 믿음으로 가족이 되었으나 사회 어디에서도 인정 받을 수 없는 가족이다. 하지만 우성은 선택만 된다면 정상 사회에서 정상 가족의 품에서 자랄 수 있다. 양육의 공백과 이를 모성에게만 책임을 돌리고 방치하고만 있는 사회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를 대안 가족은 여성-모성 중심의 육아 담론의 사회에서 그저 꿈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듯한 <브로커>의 연출이 옳은지 그른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아기, 양육, 모성, 정상성, 생존 등 여러 문제가 뒤엉켜 있는 가운데 아기의 생명력과 순수성 신화는 생존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건들이는 것 자체가 금기에 가까울 정도로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복잡하게 꼬인 이 상황에 대해서 고레에다 감독은 조금이라도 모성 중심의 정상 가족을 담보하는 양육 담론이 변화하지 않으면 <브로커>와 같은 일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낭만의 가면을 뒤집어 쓴 걸게다. 어떻게 유아 유기와 매매를 이렇게 낭만적이고 감상적으로 그렸냐고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나마 낭만과 감성의 장막이 있었기에 현실을 더욱 똑바로 볼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어쩌면 우리가 현실을 그만큼 명확하게 인지하지 않고 그 동안의 흐름대로 안주하고 있었다는 것의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가족이란 무엇이며 그 가운데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기 위해서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고 구성원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냉정하게 고민해야 하는 때인 듯 하다. 낭만의 장막이 사라지고 냉혹한 현실과 직면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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