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아프게 한 감정을 꼽으라면 사랑일 것이다. 신화의 신들조차 사랑 때문에 눈물만 흘린 것이 아니라 살인을 하고 더 크게는 전쟁까지 일으키기도 했다. 인간도 신들과 똑같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신부 보쌈 당해서 10년이나 길게 전쟁을 해놓고는 "사실 이 모든 건 신들 사이 질투 때문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하는 거 보면 신들이 더 불쌍하다. 신화만이 아니라 전설, 민담, 고사, 연극, 영화, 드라마 등 인간이 말과 언어로 만들고 기록한 문화 텍스트에서 사랑은 단골 소재이다. 태어난 직후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어와 사회의 규범으로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잃어가는 인간에게 사랑은 타 존재에게서 자신이 잃은 그 무언가를 즉, 무의식 속 욕망을 발견하고 갈구하는 감정 중 가장 만족스러우면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서로에게서 잃어버린 욕망을 발명하고 갈구하는 사랑의 관계는 서로 욕망을 채워주기에 만족스럽다가도 타인이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거나 욕망에 관심이 없다는 역치의 사실에 고통으로 이어진다.
막상 타 존재 그 중 타인과 맺는 사랑만 찾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쫓기게 된다. 아무리 상대가 사랑해주고 상대를 사랑한다고 해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존재를 우선하기에 사랑이 충족해주는 욕망에는 한도가 있다. 결국 서로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갈등하다 이별이 찾아온다. 하지만 욕망을 잠시라도, 가장 잘 잊게 하는 것이 사랑을 통한 충족감이기에 사랑이 어그러지고 사라지는 이별의 순간은 고통이 되어 다른 대상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욕망과 사랑 사이 악순환은 사랑의 관계에서 오직 타인만을 찾게 해 사랑의 감정과 관계의 동력인 자신과 타인 중 자신을 사라지게 한다. 사랑을 해야 하는 '나'는 어느 순간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관계에서 자신이 사라진 사랑을 쫓느라 자신이 최악이 된 것도 모르게 된다. 즉, 사랑은 타인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경유해 자신에게 돌아와야 하는 과정이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1. 욕망이란 무엇인가? : 노자, 프로이트/라캉, 하이데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살펴보기 이전에 욕망과 사랑의 관계를 더 자세히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잠시 동양 철학자 노자의 사유를 살펴보자. 노자는 바퀴와 바퀴살 사이 빈 공간을 통해 유(有)와 무(無)가 함께 공존해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상호 관계를 굉장히 명징하게 드러내는 이 사유를 욕망에 덧입히면 욕망은 개개의 인간이 평생동안 채우지 못하는 무(無) 즉, 빈 공간이다. 인간은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있기에 살아있을 수 있다. 흔히들 욕망을 부정했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노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것 즉, 프로이트의 언어로 말하면 사실상 성욕이라 할 수 있는 무의식 속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살아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자는 욕망이 있기에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다만 타 존재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은 욕망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 만족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이 있음을 알 수 있는 지적 존재라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관계도 위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관계도를 지우고 자신을 보면서 적정 수준 이상으로 과도하게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이 노자가 파악한 천하무도(天下無道)의 원인이었다.
출처. 왓챠피디아
잠시 프로이트 혹은 라캉의 언어를 빌려 노자의 사유를 다시 살펴보자. 욕망을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 표현한 것은 프로이트와 라캉 특히 라캉의 관점에서 봤을 때 상상계와 연결할 수 있다. 욕망을 어린 시절 억압받은 성욕에서 기인한다고 본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다중도착(多重倒錯)이라고 말한다.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억압받기 이전의 인간은 사실상 모든 것에서 성욕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무엇에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억압받은 적이 없는 인간은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상태로 모든 것에 자신을 표현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기는 세계를 언어로 인식하지 않으며 자신이 감각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관점으로 표현하면 바로 태어나서 아직 언어화와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 시기가 상상계이다. 아이를 중심으로 상징으로서 어머니의 품으로 한정되는 세계. 상상계에서 다중도착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욕망을 과도하게 추구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표현하면 세계는 거기에 응답해 어떻게든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언어화와 사회화의 과정 부터이다. 언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상의 특정 이미지가 부각되고 그 이미지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대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의해 부각된 이미지가 의미화되어 즉, 왜곡되어 전달된다. 부각되는 이미지, 부여되는 의미, 이미지와 의미의 연결 등은 모두 우연에 기초하고 있으나 어쨌든 언어화 되는 순간 대상은 일부분만 전달된다. 아기는 성장하면서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면서 세계를 왜곡되게 인식한다. 나아가 언어로 규정된 사회는 다시 그 내부의 규범, 관습, 성역할 등으로 아기의 다중도착을 정상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억압한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이다. 상징계의 주체는 언어와 사회에서 본래의 존재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회가 허락한 형태의 존재로 왜곡되어 존재한다. 정상성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어 억압되고 왜곡된 요소들은 프로이트가 말했듯 억압되어 무의식에 잠든 욕망이 된다. 상징계의 주체가 보기에 욕망은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를 기반으로 유지되는 상징계에서 욕망은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기에 인식할 수 없으며 인식할 수 없음은 곧 존재 자체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에서도 노자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도식에서 죽음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다. 태어남은 곧 죽음이라는 반대항을 내재하고 있다. 반대로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은 해결이라는 반대항을 내재하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중 우루크 왕조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삼황오제만큼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자칭한 진시황, 성배를 찾아 영국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다는 위대한 왕 아서 등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보라. 전설과 역사에 남은 위인과 영웅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자체는 죽음과 연결하면 벗어날 수 없는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인간은 현대의 문명을 건설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에 있어서 죽음은 노자에게 있어 평생동안 채울 수 없는 무(無)인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빈 공간(無)이 있기에 인간은 있을(有) 수 있으며 인간이 있기에 죽음은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2. 욕망과 사랑의 관계 : 쫓기는 사랑과 하는 사랑
노자, 프로이트, 라캉 등의 사유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욕망은 존재하지만 존재를 부정 당한 모순을 안고 있다. 그리고 욕망의 모순된 존재처럼 재밌게도 욕망은 타 존재를 통해서 인식된다. 무의식에 내재되어 인식되어서는 안 되는 욕망은 '나'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존재하는 타 존재를 바라보는 순간 '다름'에서 발견된다. 비슷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르다는 점은 호기심과 공포로 이어진다.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기에 공포스럽지만 인지되는 순간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어난다. 거칠게 나누면 공포가 크면 클수록 대상에 대한 반응은 비호감 혹은 혐오로, 호기심이 크면 클수록 호감 혹은 사랑으로 반응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 말한 하이데거의 사유로 이해해 보자. 죽음은 삶과 존재의 종말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삶의 끝이라는 경계로서 죽음이 있기에 인간은 자신의 삶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나아가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고민한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은 곧 호기심의 대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인간은 자신의 삶을 보다 더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출처. 왓챠피디아
영화를 통해 타 존재의 다름이 주체에게 미치는 호기심과 공포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연과 상상>을 구성하는 3개의 단편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하, <마법>) - <문은 열어둔 채로> - <다시 한 번> 중 <마법>이 인간 주체가 느끼는 타 존재의 다름에 의한 호기심과 공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편이라 할 것이다. <마법>에서 메이코는 카즈아키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궁금하다. 하지만 알고 싶다는 호기과 함께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도 존재한다. 카즈아키를 향해 있는, 메이코의 끝맺지 못한 감정은 카즈아키의 감정이 있기에 변화를 맞이해 어떤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문제는 있다는 것이 분명한 메이코를 향한 카즈아키의 감정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즈아키가 메이코를 여전히 사랑할지 안 할지는 우연에 기초해 있다. 이미 츠구미라는 새로운 상대를 만나고 있는 카즈아키의 감정은 확인하는 게 나아 보이면서도 확인하지 않는 게 더 낫기도 하다. 이러한 우연의 불확실성으로 카즈아키의 감정을 알고 싶다는 메이코의 호기심은 자신에 대한 감정을 알고 싶다며 카즈아키를 찾아가 긴긴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알고 싶지 않다는 메이코의 공포는 결국 카즈아키와 자신이 사귀었다는 과거를 숨긴 채 카페를 떠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노자의 사유로 돌아가보자. 노자가 보기에 천하무도(天下無道) 즉, 도가 땅에 떨어져 세상이 혼란해진 것은 결국 인간에게 원인이 있다. 왜? 하이데거의 언어로 바꾸면 죽음을 사랑해 죽음을 향해 나아가며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완성하려는 인간이 지나치게 죽음을 사랑해 자신의 삶을 과도하게 완성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언어로 바꾸면 잃어버렸음에도 잃어버린 지도 몰랐던, 무의식에 내재한 욕망을 과도하게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두 표현을 노자의 언어로 바꾸면 도라는 거대한 세계에 다른 존재자와 관계 위에서 일개 존재로 있는 인간이 다른 존재자와 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삶만 과도하게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자와 관계에서 적정 수준에서 만족하며 자신의 삶을 완성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왜? 하이데거의 사유와 노자의 사유를 결합해 표현하면 결국 인간이 죽음을 사랑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끝에서 완성하지 못한 삶이라는 공포는 죽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죽음은 계속해서 미뤄야 하는 완성의 데드라인일 뿐이다. 미루고 미뤄 어떻게든 원하는 완성에 도달해야 만족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노자가 전하는 욕망의 불행 편이다.
욕망의 불행 편을 살펴봤다면 이번엔 욕망의 행복 편을 살펴보자. 공포-혐오와 호기심-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욕망을 주체와 타 존재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타 존재는 흥미롭다. 주체가 타 존재를 통해 무의식에 내재된 욕망을 인식한다는 말은 곧 타 존재를 경유해 자신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세계에서 주체와 타 존재 사이 맺어진 관계는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우연과 상상>의 예에서 봤듯이 타 존재는 딱 잘라서 공포스러운 존재 혹은 호기심을 일으키는 존재로 나눌 수 없다. 공포와 호기심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 존재와 맺는 관계는 곧 자신에 대한 공포이면서도 호기심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사유는 타 존재를 경유해 자신을 구체화 하면서 괴물로서 자신과 천사로서 자신을 만나는 과정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욕망에 대한 사유로 봤을 때 노자의 언어로 욕망의 행복 편을 말하면 타 존재와의 관계를 인식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수준까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와 욕망을 인식하게 하는 타 존재가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자기 스스로도 편안하고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죽음을 미루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안분지족(安分知足). 노자가 전하는 욕망의 행복 편이다.
욕망의 불행 편과 행복 편을 이제는 사랑의 불행 편과 행복 편으로 바꿔보자. 분명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명확하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 욕망은 공포이면서도 호기심이다. 욕망으로 드러나는 주체의 민낯은 괴물이면서도 천사이다. 타 존재와의 관계가 주체가 타 존재를 경유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결국 주체는 괴물로서 자신과 천사로서 자신을 모두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타인과 맺는 관계라는 중 만족감과 고통이 가장 큰 감정이자 관계라는 점에서 타 존재와 사랑하는 관계는 괴물로서 자신을 마주해 가장 큰 고통을 겪으며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는 관계거나 천사로서 자신을 마주해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며 욕망을 충족하는 관계이다. 즉, 후자의 관계에서 인간은 타 존재에게서 극상의 행복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전자의 관계에서 인간은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 타 존재를 혐오하며 나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를 우선하는 존재의 특성상 고통을 주는 타 존재를 벗어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타 존재를 찾는다.
출처. 왓챠피디아
타 존재와 맺은 관계는 주체 자신이 자신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결과 중 과정일 뿐이라는 점에서 관계의 끝은 자신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자신과 타 존재를 모두 인정하고 사랑하는 우주적 관점에서 사랑, 노자로 말하면 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상태이다. 부처, 성인, 진인(眞人) 등 이상적으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사랑의 행복 편이다. 이후의 설명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사랑을 하는 것은 이 사랑의 행복 편 뿐이라는 점에서 인간에게 사랑은 추구하는 목표이지 행위 그 자체는 아닌 듯하다. 각설하고 인간에게 사랑의 행복 편은 유니콘처럼 전설이나 다름없으며 사랑의 불행 편이 일상 도처에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을 어떻게든 완성하겠다는 욕망과 나아가 계속해서 사랑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이야기가 존재하면서도사랑의 완성에 대한 욕망과 사랑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경향은 사랑의 절대적인 위치를 굳건하게 한다. 이렇게 굳건해진 사랑의 위치는 주체를 착각에 빠뜨린다. 타 존재와 관계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느라고 자신을 파괴하기만 할 뿐이라는 착각과 타 존재를 통해서만 자신을 제대로 인정할 수 있고 나아가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말이다.
두 착각 모두 사랑의 불행 편이다. 우선 전자는 타 존재와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할 수 있는 주체의 특성상 타 존재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거나 타 존재와 맺는 관계 자체를 모두 자신으로 수렴하는 극단적인 경우로 나르시시즘이나 죽음 이후에나 가능하다. 이 경우 주체는 타 존재보다 우월한 위치를 획득한다. 하지만 애초에 존재는 서로 동일하되 대등하다. 즉, 비슷하지만 다르다. 주체 중심의 상하관계에서 타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다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주체가 타 존재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타 존재도 주체를 경유해 자신을 바라보는데 상하관계에서는 존재의 전제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관계의 쌍방향성이 성립할 수 없다. 타 존재보다 우월한 위치를 획득한 주체에게 타 존재는 자신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주체에게 포함되어 있는 동일한 존재이다. 관계 자체가 소멸한 것이다. 비슷하되 다른 존재가 서로를 비출 때 성립하는 세계에서 타 존재와 관계의 소멸은 곧 주체 자신의 소멸 즉, 죽음이다. 타 존재를 통해 인식하게 되는 주체 자신의 반쪽 즉,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사라졌기에 주체는 살아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 하지만 결국 죽은 상태인 언데드(Undead)가 된다. 사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허할 뿐이다.
반면 후자는 타 존재에게 주체가 완전히 자신을 의존하는 경우로 관계라는 과정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경우이다. 과정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동안 주체는 자신이 타 존재를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서 주체는 타 존재를 통해 자신을 인지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타 존재를 자신의 이상향으로 상정하고 숭배하게 된다. 존재의 상하관계로 인해 동일하되 대등하다는 존재의 전제는 오로지 숭배의 대상인 타 존재에게만 부여된다. 즉, 후자의 경우에서 주체는 사라진다. 타 존재를 경유해 다시 돌아와야 하는 주체 자신이 사라졌기에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끝없는 죽음이다. 앞서 주체와 타 존재는 비슷하되 다르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되 대등하다고 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서 주체는 타 존재와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타 존재 그 자체이다. 어떻게 보면 전자의 경우보다 더 심각하게 주체는 자신을 잃은 상태에서 끝없는 죽음을 계속해서 미루고 피하면서 사라져 버린 자신을 찾느라 타 존재에게 '쫓기는' 사랑을 하게 된다. 전자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후자에서 주체는 이미 타 존재와 동일시 되고 있기에 타 존재에서 자신의 반쪽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언데드로 끊임없이 타 존재에게 수렴되는 것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사랑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3. 쫓기는 사랑에서 하는 사랑으로
출처. 왓챠피디아
드디어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율리에를 살펴보자. 영화는 스마트폰, 범람하는 정보의 이미지, 기후 변화와 이상 기후, 혐오와 전쟁 등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파편화한 이미지들을 통해 율리에를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현실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는 20대로 제시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은 불안과 공포로 채워진 현실로 다시 이어져 악순환을 이루는데 이는 곧 변화무쌍한 율리에의 감정과 인식으로 나타난다. 공부를 애초에 잘했기에 최상위 점수에 맞춰서 당연하게 간 의대를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던 중 뇌가 달린 해골 모형이 율리에를 심리학과 그 중 상담심리로 이끈다. 하지만 상담심리를 공부하던 중 자신이 함께 공부하는 다른 학우들을 관찰하는 즉, 시각에 남다른 자질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율리에는 별안간 지금까지 했던 이성에 기반한 공부가 아니라 시각이라는 감성에 기반한 사진작가의 길을 선택한다. 이런 변덕의 시기에 율리에의 감정도 아주 변덕스럽다. 심리학 강사와 사랑을 나누다가도 사진작가가 되고서는 모델이 되어준 남성과 썸을 타기도 한다.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율리에 자신이 자신을 찾기 위한 원동력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찾느라 타인에게 쫓기는 사랑을 하게 하는 변화무쌍한 감정이다.
물론 율리에가 앞서 언급한 사랑의 불행 편 중 후자의 경우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율리에는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다. 율리에는 타인을 숭배하면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지는 않으며 이는 영화 끝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현실의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고민은 감정의 동요로 이어져 율리에 본인이 계속해서 불안해 하는 원인이자 율리에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율리에는 타인과 맺은 관계에서 발견한 자신에게 만족하면서도 만족할 수 없다.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와 그에 따른 불안과 공포가 남아있기에 그런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기에 율리에의 감정과 행동은 변덕스럽고 빠르게 전개되며 이는 곧 프롤로그의 빠른 숏 변화와 숏 마다 율리예의 선택과 인간 관계가 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재밌게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변하는 숏과 율리에는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관객과 조응하면서 관객이 율리에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나아가 율리에를 응원하게 한다. 사랑의 감정 변화와 똑같이 변하는 영화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면서 관객은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 율리에를 따라간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런 의미에서 프롤로그의 마지막에 수많은 타인과 만나던 와중 40대의 악셀에게 율리에가 사랑을 느끼고 연인이라는 안정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은 영화에서 중요한 첫 번째 분기점이다. 악셀과 우연하게 바에서 만난 율리에는 썸을 타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모델 대신 악셀과 꽤 진한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연인으로서 관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할 뻔한다. 40대인 악셀이 보기에 아직 20대인 율리에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현실과 부딪히면서 자아를 찾으며 자신만의 미래를 조금씩 설계해야 하는 방황을 겪어야 한다. 이미 자신은 거쳐간 그 시기를 잘 알고 있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인생도 살아가야 하는 악셀 입장에서 방황을 맞이해야 하는 율리에에게 함부로 끼어드는 것은 율리에의 불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수 있기에 두려운 일이다. 율리에와 맺은 관계에 자신이 상처 받아 힘들 수 있는 일이며 상처 받은 자신이 다시 율리에를 힘들게 할 수 있어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악셀은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하며 율리에에게 연인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관계를 그만 끝내자고 말한다. 이러한 악셀의 솔직함은 율리에에게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방황의 시기를 맞아 불안한 상황에서 악셀은 자신의 불안을 이해해주면서 자신을 위해 선택했기 때문이다.
율리에는 악셀의 선택에서 악셀을 통해 자신의 불안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악셀의 선택을 통해 불안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악셀과 헤어지고 그의 집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던 와중 갑작스러워 보이는 율리에의 감정 변화는 갑작스러우면서도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 누군가에게서 이해 받고 먼저 생각되는 것에서 오는 안정감과 그 안정감을 통해 느끼는 자기 존재의 안정감. 한 번쯤은 경험했거나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바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최고라 할 수 있는 순간이지 않은가. 프롤로그에서 안정 상태로 접어드는 율리에의 모습은 율리에와 비슷하게 현실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관객의 입장에서 관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안정감을 느끼게 하면서 다음 장으로 나아가기에 앞서 감정 이입한 율리에와 더욱 깊이 동화하게 한다. 이미 자신과 비슷한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는 율리에가 느끼는 행복은 이후 율리에가 느끼게 될 감정선과 그에 따른 반응을 관객이 따라갈 수 있는 시작점으로서 중요한 분기점인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후 영화는 프롤로그에서 한껏 끌어올린 불안과 공포, 그에 따라 변덕스러운 감정과 행위, 사랑의 시작으로 한껏 고조된 감정과 존재의 안정감을 서서히 죽여가며 사랑의 변화에 맞춰 영화의 속도를 맞추는 듯하다. 이러한 영화의 속도 변화는 프롤로그를 통해 율리에와 동화되는 과정을 거친 관객 입장에서 악셀과의 관계와 에이빈드와의 관계를 거치는 동안 보이는 율리에의 변화를 더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영화 내내 율리에는 사랑을 하는 주체로서 서술‧재현되기에 관객이 보고 있는 영화의 전개 속도는 곧 사랑에 따라 변화하는 율리에의 감정과 행위의 변화 속도인 것이다. 이렇게 관객이 율리에의 감정과 행위의 변화 속도를 영화의 전개 속도와 동일하게 느끼게 하여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율리에가 자기 존재를 계속해서 불안해 하는 사랑인 쫓기는 사랑을 하다 결국 자기 존재의 불안과 욕망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하는 사랑으로 나아감을 보여준다.
영화 전개 속도와 동일하게 흐르는 율리에의 감정과 행동의 변화 속도는 자신의 불안과 공허함에 오슬로를 배회하다 에이빈드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율리에, 모두가 멈춰버린 상상 속에서 에이빈드를 찾아가 함께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함께 있는 율리에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악셀을 위한 축하전에서 율리에는 뒤에 스스로가 밝히듯 자기 인생임에도 구경꾼 혹은 조연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미 그 이전부터 악셀과는 결혼관, 소통 방식 등에서 삐걱거린다는 것을 느꼈고 사진 작가를 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서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 중이며 어떤 정해진 직업을 갖고 안정되게 생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자기 인생의 주연으로 축하받는 악셀과 비교해 초라해 보인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불안과 공허함을 잊기 위해 피우는 담배 연기는 노을진 하늘에서 무의미하게 흩어질 뿐이며 천천히 걸으며 보는 오슬로의 저녁 풍경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서서히 차오르게 한다. 그렇기에 이름 모를 결혼 피로연에서 만난 에이빈드는 자신의 불안과 공허함을 잊게 하는 새로운 만남이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지만 서로에게 끌리고 있으면서도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모르는 사람이기에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서로의 체취부터 비밀스러운 성욕까지 나눈다. 비밀을 공유했다는 짜릿함과 상대가 그 비밀을 간직하고만 있을 것이라는 안정감은 악셀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자신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킨다.
부엌 불 스위치를 끄자 모두가 멈춰버리는 상상은 에이빈드와 만나 밤새 함께 있는 동안 느낀 율리에의 사랑이 프롤로그에서 보인 사랑의 변화와 비슷하게 변덕스러우면서도 프롤로그와 달리 천천히 그리고 낭만적으로 쌓이는 것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있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에이빈드에게만 집중하고 있기에 다른 시민들은 모두 시간이 흐르고 있는 중에도 율리에가 그들을 본 순간에 멈춰 있다.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서로를 껴안고 키스를 나누며 차오르는 사랑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끽한다. 사랑이 차오르는 와중에 각자의 연인이 떠오르면서 현타 아닌 현타를 맞아 어색한 시간이 흐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곧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함께 붙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랑을 만끽했음에도 전혀 시간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서 다시 사랑의 낭만을 만끽한다. 택배를 맞이하는 정재영 배우의 짤과 비슷하게 기대로 가득한 율리에의 모습은 이미 율리에에게 동화된 관객에게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불 스위치를 켜며 악셀과의 현실을 마주한 율리에가 자신이 그동안 느낀 둘의 관계와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모습은 현실에서 겪은 이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이미 떠나버린 감정을 어떻게 하겠냐며 동조하게 만든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악셀을 거쳐 에이빈드로 옮겨 가는 율리에의 사랑은 여전히 안정적이지 않다. 율리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고 원치 않지만 악셀은 율리에와 결혼하여 아이를 갖고 싶다. 하지만 아이 동반 부부 모임에서 율리에가 본 것은 일상을 피곤하게 만드는 무자비한 아이들의 모습이다. 자신의 성취를 이룬 것처럼 보이는 악셀은 질투의 대상이기도 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를 강요하는 맨스플레인의 남성이다. "#미투 시대의 오럴섹스"를 소재로 쓴 글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관심을 바랐던 아버지는 그 글을 읽지도 않았으며 이후에 다른 글 작업을 해서 스스로 만족한 경우는 없다. "우리처럼 같이 대화하고 웃고 하는 커플은 없어."라고 말한 악셀의 말처럼 에이빈드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오히려 평소 문학에 관심도 없던 에이빈드가 자신은 만족하지 못한 소설을 자신의 이야기라 잘 읽혔다고 말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난다. 율리에는 사랑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좀더 안정되고 싶지만 마주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계속 급해지고 불안하며 그 불안을 제대로 감내하지 못해 더 화가 날 따름이다.
이러한 율리에의 불안을 영화는 두 차례에 걸쳐 치유한다. 첫 번째는 환각 버섯을 먹고 살아오면서 만난 남성들과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심과 사랑도 주지 않으면서 핑계만 대는 아버지를 마주했을 때이다. 환각 버섯을 먹은 율리에는 늙고 추레헤진 자신의 몸을 지금껏 만난 남성들이 만지지만 결국 아무도 옆에 남지 않는 것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신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는 아버지가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불안과 공포가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난 듯한 늙고 추레한 몸을 이끌고 율리에는 아버지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는 자신의 성기에서 생리컵을 꺼내 던진다. 생리혈이 터져 아버지에게 묻고 불안과 공포의 형상 속의 피를 자신의 얼굴에 직접 묻히며 율리에는 1차적으로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마주할 수 있는 정신적인 계기를 맞이한다. 두 번째 치유는 헤어지고 췌장암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악셀과 만나서이다. 암의 고통과 시시각각 느껴지는 죽음에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악셀은 율리에에게 좋게만 혹은 나쁘게만 기억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한다. 또한 율리에에게 율리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자신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말한다.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잊고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관계는 타인을 거쳐 자기 자신으로까지 나아가는 관계이다. 자신의 욕망, 불안, 공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영화는 상당히 갑작스럽게 율리에의 현실적 불안과 공포를 상쇄한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다. 췌장암으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악셀이 갑자기 죽고 이를 서점에서 퇴근하기 직전에 전해 들은 율리에는 슬픔으로 밤새 오슬로의 거리를 돌아다닌다. 헤어졌으나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자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알게 해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으며 마지막에는 불안과 공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한 악셀의 죽음은 율리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충격은 샤워 중 흘러내리는 피를 통해 율리에에게 미래에 대한 또다른 불안을 야기한 임신의 갑작스러운 유산으로 이어진다. 이 일련의 과정은 아직 불확실한 미래를 안고 있는 율리에라는 인물에 대한 서사 외부의 개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율리에와 악셀의 후반부 관계에서 죽음에 의한 충격과 유산으로 이어지는 서사가 서사 내적으로는 정합적이기는 하다. 하지만임신이라는 요소가 지닌 거대한 불안을 내버려두는 것은 이후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는 율리에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에이빈드가 다른 이와 결혼해 자식을 둔 것을 보며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에 방해가 되기에 임신이라는 요소를 서사 외적으로 개입해 지워버렸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럼에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율리에가 사랑이라는 관계를 통해 결국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안정 상태로 돌아옴을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에필로그를 제시해 율리에를 향한 관객의 동조가 끊기지 않게 하면서 쫓기는 사랑이 아니라 하는 사랑에 대해 강조한다는 점에서 싫어할 수 없는 영화이다. 악셀은 죽고 에이빈드와 헤어진 후 영화 스틸컷 작가로 살아가는 율리에는 자신의 연기에 불안을 느끼며 자책하는 여성 배우의 스틸컷을 찍는다. 그 날 촬영이 끝나고 자신도 퇴근하려는 가운데 율리에는 자신이 스틸컷을 찍은 여성 배우가 에이빈드의 아내이자 둘 사이에 아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방금까지 자기 연기에 불안을 느끼며 자책하던 배우가 아이를 안고 안심하며 과거의 연인 에이빈드와 함께 돌아가는 모습은 율리에가 느껴온 불안과 공포의 모든 형상을 풀어버린다. 아르바이트로만 연명하며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고 뭔가 성과 없이 반복되는 생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인식과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모성, 갑작스럽게 찾아온 임신 등 과거의 사랑에서 자신이 느꼈던 수많은 불안과 공포를 자신처럼 불안을 느끼던 여성 배우가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은 율리에마저도 안심하게 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찍은 여성 배우의 사진을 또렷이 바라보며 사진 작업을 하는 율리에의 모습은 자신에게 내재한 불안과 공포를 온전히 받아들인 모습이자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더 이상 사랑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다시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마지막 장면처럼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불안하고 흔들리는 삶 속에서 사랑에 쫓기기는 쉬워도 사랑을 하기란 어렵다. 언제나 욕망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불안은 가중될 것이며 그 와중에 마주하는 자신의 모습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반복되면 어떤 사랑을 해도 결국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자신을 칭찬하는 연인의 목소리는 좋은 소리를 하며 자신을 속이는 목소리로 들릴 것이고 조금이라도 안 맞는 구석은 점점 더 커지면서 애초에 자신과 맞지 않은 이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잠깐의 안정된 감정을 느끼고자 계속해서 잠깐의 떨림을 관계에서 느끼는 최고의 안정감이라 착각하며 새로운 상대를 찾게 될 뿐이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관계에서 보게 되는 자신의 욕망과 불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현실적으로 다시 흔들릴지 몰라도 흔들림 속에서 인간은 다시 굳건하게 바로 서게 될 것이다. 지나쳐온 과거의 사랑이든 현재를 함께 하고 있는 사랑이든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처에 있는 사랑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돌고 돌아 도에 이르듯 인간은 최악을 거쳐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